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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ssue 3

따로 또 같이,
IP로 헤쳐 모이는
세계 콘텐츠 시장

글. 최보윤(조선일보 기자)

‘이것은 어쩌면 서막에 불과하다’. 영화나 드라마 예고편에 쓰일 법한 문구지만 현재 미디어 업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문장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코로나19 사태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콘텐츠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몸집 불리기가 한창이다.

이용자 사로잡을 관건은 콘텐츠 IP

기존 네트워크 TV 채널이 장악하던 콘텐츠 공급 시장에 넷플릭스라는 스트리밍 거인이 등장한 이후, ‘넷플릭스 대항마’를 키우는 게 업계 생존 전략으로 꼽혔다. 스트리밍 시장 재편과 분할을 위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가입자 2억 명을 돌파한 넷플릭스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집콕 문화’나 ‘재택근무’의 최대 수혜주로 꼽힌다.

여기서 관건은 ‘콘텐츠’다. 지난 5월 미국 방송가 최대 행사로 꼽히는 업프론트(upfronts·방송 광고 판매 설명회)에서 등장한 “IP는 새로운 황금 시간대(Prime Time)”라는 문구가 이를 대변한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먹고 자란다’며 자사의 강력한 콘텐츠로 1억 명 넘는 가입자를 확보한 디즈니플러스조차 새롭게 발굴하는 콘텐츠의 양 등에서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니 콘텐츠 보유와 투자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진짜 ‘꿈’을 완성해라… 미국, 프랑스 등에서 쏟아지는 연이은 합병

미국에선 최근 AT&T의 콘텐츠 자회사 워너미디어와 케이블 TV 채널 디스커버리의 합병에 이은 아마존과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MGM의 합병 소식으로 뜨거웠다. 통신사 AT&T의 자사였던 워너미디어를 분리·합병해 독보적인 스트리밍 회사로 키우겠다는 방편이다. 2018년 AT&T가 CNN 등을 보유한 타임워너를 인수한 뒤 3년 만에 내린 이번 결정은 통신 비즈니스와 TV 비즈니스는 결국 결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도 많다. 하지만 동시에 콘텐츠의 가치를 높이 산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콘텐츠 제작 능력을 갖추면서도 소비자들이 기꺼이 돈을내고 볼만한 ‘콘텐츠 명가’가 살아남는다. 워너와 디스커버리의 합병은 <해리포터>와 <배트맨> 시리즈 등 독보적 IP 프랜차이즈를 거느린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오프라 윈프리로 대표되는 토크쇼·드라마 강자(强者)의 결합을 뜻 했다.

새롭게 출범한 미디어사의 이름은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Warner Bros. Discovery)’. 슬로건은 ‘꿈으로 만들어진 것(the stuff that dreams are made of)’이다. 1941년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영화 <말타의 매>에서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의 마지막 대사다. <말타의 매>가 손쉽게 얻을 수 없는 귀중한 보물로 불리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찾아 나서게 만들지만, 그 실체는 쓸모없는 쓰레기였다는 내용이다. ‘희망의 파랑새’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가까이에 있는 것이 바로 ‘행복’이었다는 것을 역으로 연상시키듯 하다. <말타의 매>는 허황된 꿈을 좇는 이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통해 자본주의의 타락과 허무를 꼬집는다. 하지만 이러한 실체 없는 것을 좇는 이들에 대한 실체를 고발하는 것도 하나의 콘텐츠가 해낼 수 있는 영역이고, 또 본질을 찾아 계속 꿈꾸게 한다는 것 역시 콘텐츠가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번 합병의 슬로건에서 결국 콘텐츠를 통해 꿈에서만 바라고 상상했던 모든 것을 이루어 내겠다는 의욕이 엿보인다. 누군가는 합병을 <말타의 매>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지만, 자신들은 결국 이를 실존하는 <말타의 매>로 만들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또 그 사이 ‘콘텐츠의 힘’은 뉴스 시장도 들썩이게 했다. 워너의 자회사인 CNN이 OTT 시장에 뛰어든다고 선언한 것. 내년에 공식 출범할 ‘CNN 플러스’라는 새 OTT 서비스를 위해 앤더슨 쿠퍼와 돈 레몬 등 CNN의 유명 앵커들이 참여하는 신개념 뉴스쇼를 내놓겠다고 했다. 이는 콘텐츠 시장에서 뉴스도 다른 엔터테인먼트 분야 못지않은 콘텐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다. 게다가 ‘전달자’ 혹은 ‘스타’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같은 뉴스라도 ‘누가’ 전달하느냐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아마존프라임을 서비스하는 전자 상거래 업체 아마존이 84억 5,000만 달러 규모(한화 약 9조 5,000억 원)에 MGM 스튜디오를 인수합병하기로 한 것 역시 ‘결론은 콘텐츠’라는 판단에서였다.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MGM은 <007> 시리즈나 <매드맥스> 같은 IP를 보유하고 있다. 비록 현재 판권의 50%만 소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존 프라임 회원 수를 늘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설명이다. 아마존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이조스는 이번 합병 발표와 관련해 주주들에게 “MGM은 방대한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으며, MGM과 아마존 스튜디오의 재능 있는 인력들이 만나면 IP 재구상과 개발에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인 라이온스게이트와 CBS 방송사와 MTV, 파라마운트 스튜디오 등을 보유한 비아콤CBS, 미국 최대 케이블 회사인 컴캐스트 등도 합병 대상으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각각 NBC 유니버설,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 스카이 등과 손잡을 것으로 내다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를 탄생시킨 이래 ‘영화’ 하면 떠오르는 콘텐츠 강자 프랑스 역시 큰손들끼리 뭉쳤다. 프랑스 거대 방송사인 TF1과 M6가 합병한 것이다. 스트리밍 시장에 대한 반격을 꾀하는 미국과 달리 전통적인 방송사들이 손을 잡았다는 데서 또 다른 의의가 있다. 2014년 프랑스에 진출한 넷플릭스를 시작으로 아마존 프라임, 디즈니플러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세를 확대하는 상황에 레거시 미디어의 합병이 어떤 효과를 보일지 관심이다. TF1과 M6 계열 시청자는 전체 프랑스 TV 시청자의 40%가량. 프랑스 TV 광고 시장에서도 70%를 차지하고 있다.

K-콘텐츠, 이제 시작이다

한국은 이번 코로나19 시기에 가장 각광받은 콘텐츠 강국 중 하나로 꼽힌다. 넷플릭스가 5,500억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하는 등 한국산 콘텐츠는 가격 대비 고급 품질에, 뛰어난 배우들, 세계 트렌드를 좌우하는 VFX(특수영상)능력 등 어느 할리우드 스튜디오 못지않은 완성작을 내놓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세계적 명품 브랜드의 글로벌 얼굴로 활약하고 있는 K-Pop 스타 등 MZ세대 트렌드를 지휘할 핫한 인물이 상당하다.

국내에선 KT 같은 통신사 산하 제작사와 CJ 등 케이블 네트워크와 제작사를 겸하는 CJ ENM 등도 콘텐츠 강국을 향한 청사진을 줄줄이 내놨다. 스트리밍 업체인 티빙을 소유하고 있는 CJ ENM은 최근 향후 5년간 콘텐츠 제작·인프라 확장에 5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바 있기에, 오리지널 IP를 확대해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과 겨루겠다는 것이다. 2000년 이후 만든 4,854편의 IP, 꾸준히 확보해온 700여 명의 감독·작가 등 크리에이터의 힘이 그 바탕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올해만 8,000억 원을 투자한다고 공언한데 이어 일본 지상파 회사인 TBS와 손잡고 만들어 글로벌 콘텐츠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KT의 콘텐츠 전문기업 스튜디오지니가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면서 2년 후 기업가치 2~3배 이상 성장을 목표로 제시했다. KT 스튜디오지니는 올 가을 첫 오리지널 콘텐츠를 선보이고, 다양한 원천 IP를 확보해 K-콘텐츠 생태계 조성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2023년 말까지 원천 IP 1,000여 개 이상, 드라마 IP 100개 이상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지상파 3사와 SKT 합작사인 OTT 웨이브(wavve)도 2025년까지 1조 원을 투자한다고 나서는 등 ‘한국판 넷플릭스’를 향한 ‘IP 어벤저스’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포부에 일부에선 ‘버블론’을 내놓기도 한다. 콘텐츠 제작비가 치솟으면서 투자비용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날 것이란 설명이다. 영화판이 일종의 도박 아니면 잭팟이라 불리듯, 대작 드라마 제작에 불나방처럼 모여들다 파산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특히 중국 등 해외 자금이 유입되면서 국내 정서에 반발을 살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일부 콘텐츠는 최근 시류를 읽지 못한 중국 관련 PPL 등으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트리밍 시장이 확대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선순환 구조를 가져올 수 있다는 평도 있다. 미국 할리우드 최대 규모로 꼽히는 UTA(유나이티드 탤런트 에이전시·United Talent Agency)가 지난 4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 67%가 코로나19 팬데믹 유행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엔터테인먼트에 소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UTA 연구는 조사 회사인 SightX와 협력해 18~54세의 미국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 4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56%가 코로나 기간 중 1개 이상의 스트리밍 플랫폼을 추가했고, 10명 중 7명이 여러 개의 스트리밍 플랫폼을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코로나 이후에도 계속 이용할 것이라고 답했고, 3분의 1은 더 많은 플랫폼에 가입하거나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콘텐츠 다양성이다. 소비자들은 프랑스 스릴러 영화 <루팡>을 비롯해 다큐멘터리나 교육용 비디오, 외국 드라마 등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를 시도하는 데 더 개방적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조사 대상자 셋 중 하나는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글로벌 콘텐츠와 스토리를 소비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다. 스트리밍 대국인 미국 시장에서 이러한 소비자의 개방성은 한국 콘텐츠 역시 다양하게 소비될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을 실어준다. 특히 소비자 5명 중 1명은 코로나 이전보다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독점 콘텐츠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세계 명품 시장을 뒤흔드는 K-Pop 아이돌을 비롯해 글로벌 앰배서더로 활약하는 국내 스타들이 자신의 IP를 이용한 메타버스 등 온라인 시장 확대는 물론, 유료 콘텐츠 역시 확장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지만, 콘텐츠 시장에는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또 다른 시험대가 되고 있다. 새로운 스타를 갈구하는 대중 미디어 시장에서 MZ세대와 호흡하는 K-콘텐츠는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말타의 매>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필자 소개

  • 최보윤
  • 조선일보 기자.
    문화부에서 방송과 라이프스타일을 담당하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콘텐츠에 대해 매번 경외감을 느끼며, 콘텐츠 창작자로서의 외연도 키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