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취향의 다양성과 서브컬처 Vol. 34
서브컬처가 주류 문화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면서 게임, 웹툰, 드라마, 음악 등 각 K-콘텐츠산업은 서브컬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고민하고, 또 실행에 옮기고 있다. 콘텐츠 전문가 6인에게 서브컬처의 수용, 활용, 포용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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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처는 독특하거나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정 코드에 열광하는 문화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브컬처가 ‘서브’인 이유는 그것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특정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신나게 즐기는 공간이 바로 서브컬처다. 하지만 모두가 그 코드를 알고 즐기게 되면 서브컬처는 본연의 힘을 잃고 만다. 따라서 우리나라 콘텐츠산업 전체를 바라본다면, 단순히 특정한 하나의 서브컬처를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다양한 서브컬처를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서로 다른 문화 코드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견제하며 동시에 시너지를 발휘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건강한 문화 속에서 건강한 콘텐츠가 자라날 수 있다. 다양한 서브컬처가 공존하며 각각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콘텐츠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이재민(웹툰평론가)
1870년대 <학문을 권함>의 저자이자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40년간 일본 1만엔 권 초상화의 주인공이었다. 서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열강으로 성장한 일본과 쇄국정책 속에서 일제강점기를 맞은 우리의 역사는 뚜렷이 대조된다. 이 때문에 새로운 문화 현상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서브컬처’라는 용어가 주류의 ‘하위’ 개념으로 여겨지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세대 변화는 기성세대 문화에 대한 반발과 함께 주류와 비주류의 위치 교대를 동반한다. 이제 서브컬처는 단순한 부속 현상이 아닌 MZ세대의 문화적 기호로 자리 잡고 있다. K-팝과 J-팝이 교류를 이루고, 버추얼 아이돌이 기존 아이돌과 대등하게 인기를 얻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회귀, 빙의, 환생 같은 장르도 서브가 아닌 메인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주류 문화를 고수하며 서브컬처를 간과한다면 변화의 흐름에서 밀려날 수 있다. 포용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급변하는 콘텐츠 산업에서 생존하기 위한 상호 교류와 학습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서브컬처는 대안이 아닌, 우리의 삶과 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축으로 발전하고 있다.
윤승민(모칸 대표, 영화 <승리호> 작가)
광고 중심의 콘텐츠 제작 시대는 저물고, 창작자들은 소비자의 직접적인 지지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브컬처는 새로운 기회로 떠오르고 있으며 기존 콘텐츠에 서브컬처적 요소를 결합하는 시도는 창작자들에게 큰 가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열린음악회>나 <전국 노래자랑> 같은 레거시 콘텐츠에 서브컬처적 요소를 결합한 <열린 시티팝 음악회>나 <전국 좀비 노래자랑> 같은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유튜브와 틱톡에 익숙한 젊은 콘텐츠 소비층은 더 자극적이고 금기시되던 이야기들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을 즐기며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두드러진다. 최근 필자가 태국과 공동으로 TV 쇼를 제작하며 주요 출연진에 LGBTQ+(성 소수자) 인물을 포함한 사례는 국내외에서 다양성을 수용하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지하 아이돌과 같은 소규모 서브컬처도 점차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창작자와 제작진은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이를 활용할 필요성을 느끼며, 동시에 사회적 논란에 대비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서브컬처는 창작의 틀을 깨고 콘텐츠의 새 지평을 여는 중요한 열쇠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원우(디턴 대표)
세계는 점점 평평해지고 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되며 사람들이 접하는 정보와 콘텐츠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기계 번역 기술의 발전으로 언어 장벽도 낮아져 전 세계적으로 콘텐츠 소비의 유사성이 커지고 있다.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평평한 세상에서 서브컬처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주류에서 벗어난 서브컬처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매력을 지니며, 팬덤을 기반으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실패를 용인하는 환경은 새로운 크리에이터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갈등이 생길 때도 있지만, 이는 오히려 문화산업에 다양성을 더하는 계기가 된다. 기술의 평준화도 서브컬처의 성장을 돕고 있다. 인디 크리에이터와 프로 크리에이터가 사용하는 기술 간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서브컬처 시장은 새로운 콘텐츠와 사업 모델을 실험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일상적인 요소들이 콘텐츠로 재탄생하는 현상도 이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자산은 ‘관심’이다. 서브컬처 콘텐츠는 저비용으로도 강력한 관심을 끌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도 서브컬처는 평평해진 세상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며, 문화산업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요훈(IT 칼럼니스트)
2023년 한국 극장가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귀멸의 칼날>이 상위권을 차지하며 서브컬처의 대중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OTT 플랫폼의 성장으로 극장 관람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서브컬처는 강력한 입지를 다졌다. Z세대는 서브컬처의 확장을 주도하는 세대다. 과거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오타쿠’라는 단어는 이제 ‘취향’과 ‘친구’를 의미하며 이들은 취향 존중을 바탕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소통한다. 서브컬처는 더 이상 소수의 문화가 아닌, 주류와 맞먹는 영향력을 가진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서브컬처가 주류로 도약하는 요인은 신기술 활용, 2차 창작 생태계 활성화 그리고 플랫폼의 결집과 확산 능력이다. 예를 들어, 팬덤에서 시작한 유튜브 채널 피지컬갤러리의 김계란은 아이돌 그룹 QWER을 론칭하며 서브와 주류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결국 서브컬처는 단순히 소수의 취향에 머물지 않고 대중문화와 연결되며 미래의 주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신기술과 플랫폼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서브컬처는 앞으로도 대중문화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다.
김종민(바이브컴퍼니 마이닝콘텐츠랩팀 매니저)
지난 11월 8일 고양시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 열린 J-팝 페스티벌 ‘원더리벳 2024’에는 사흘 동안 2만 5천여 명의 관객이 몰렸다. 헤드라이너 유우리는 내년 5월 케이스포돔(1만 5천 석)에서 내한 콘서트를 예고했고, 후지이 카제는 오는 12월 고척스카이돔 공연(2만 석)을 전석 매진시키며 주목받았다. 과거 ‘오타쿠’로 한정되던 서브컬처는 이제 대중이 선택하고 즐기는 주요 장르로 자리 잡았다. J-팝의 인기는 한국 서브컬처 콘텐츠도 해외에서 유행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웹툰·웹소설은 OTT 시대의 IP로 부상하며 경제적 가치를 입증했다. 모바일과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문화적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중요한 기준이 되면서, 콘텐츠를 주류와 비주류로 경계 짓거나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버추얼 아이돌도 진위 여부보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반영한 선택으로 주목받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강렬한 한국적 서브컬처로 글로벌 성공을 거뒀다. 서브컬처는 기존 주류 문화를 대체하기보다는 문화적 다양성과 매력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창출하며 K-콘텐츠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안동환(서울신문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