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취향의 다양성과 서브컬처 Vol. 34
서구권에서 K-팝은 열광적인 팬덤을 가졌지만 아직 다수의 대중이 즐기는 것은 아니라고 평가되어왔다. 그런데 얼마 전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합작 싱글 ‘아파트’가 그 고정관념에 작은 균열을 가져왔다. ‘아파트’를 시작으로 K-팝은 서서히 그냥 ‘팝’으로 인정받게 될까?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
© 더블랙레이블 인스타그램
2024년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막강한 싱글 하나가 기습 등장했다. 10월 18일, 첫 정규 앨범 <rosie>의 발매를 앞둔 블랙핑크의 멤버 로제가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손을 잡고 신곡 ‘Apt.(이하 아파트)’를 발표한 것이다. 둘의 만남은 등장과 동시에 많은 주목을 받으며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 나갔다. 멜론과 벅스를 포함한 국내 음원 차트 5곳에서 모두 정상을 석권했고, 해외에서는 미국 빌보드 차트 8위와 UK 오피셜 차트 2위 성적을 거뒀다. 애플 뮤직 차트에서는 13개국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스포티파이 3억 회 스트리밍 돌파와 틱톡 역대 최단 기간 20억 조회수 달성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일들이 발매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거둔 성과다.
로제의 <아파트>는 발매 2주 만에 빌보드 차트에서 8위를 차지했다
출처 | 빌보드 웹사이트
올해를 상징할 글로벌 히트곡이 탄생하자 곡의 흥행 원인을 찾기 위한 각양각색의 분석이 오고 갔다. 혹자는 다른 스타일을 가진 두 가수가 만나 대중적 팝 시너지를 자아낸 덕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응원 구호처럼 따라 부르기 쉽게 구성한 챈트(chant) 형식의 승리라고 답했다. 몇 년 사이 세력을 키운 K-팝 진영의 영향력이 자연스레 ‘K-서브컬처’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또한 후렴구에 등장하는 ‘콩글리시’ 특유의 거센 소리가 이국적인 말맛을 만들어낸다는 언어학적인 관점의 주장도, 팬데믹 시기 차트를 호령했던 팝 펑크 장르를 다시 호출해 친밀감을 형성했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장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만큼, ‘아파트’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즐길 수 있음과 동시에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면 여러 흥미로운 시사점을 끌어낼 수 있는 화수분 같은 곡이기도 하다. 한국 젊은 층 사이에 유행하는 술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했다는 점, 1982년 미국 뮤지션 토니 바실의 전설적인 응원가 ‘미키’를 기반으로 약간 변형을 거쳐 짧고 경쾌한 챈트-팝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그렇다. 영어식 발음인 ‘아파트먼트(apartment)’ 대신 한국의 콩글리시 발음인 ‘아파트(apatue)’를 그대로 살렸다는 점도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 SNS를 조금만 둘러봐도 외국인들이 서투른 발음으로 ‘아파트’를 함께 따라 부르는 영상과, 더 나아가 직접 ‘아파트 게임’을 배워 선보이는 영상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아파트’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하지만 ‘아파트’의 재료를 곰곰이 따져보면 그간 K-팝이 지향해온 접근법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먼저 엔터 기획사의 철저한 공정 시스템을 따르지도 않고, 트렌드를 발 빠르게 쫓아 유행하는 장르와 사운드를 선점하려는 시도도 없다. 댄서와 함께 군무 퍼포먼스를 펼치거나 자본을 대거 투자한 고감도 영상을 산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빈티지 필터를 입힌 단색의 세트장 위에서 번갈아 춤추고 노래하고 가볍게 연주하며 그저 장난스럽고 친근한 분위기를 드러낼 뿐이다.
앨범과 다운로드 수치로 단기간에 화력을 집중해 빠르게 차트인을 성사시키는 팬덤 기반의 수요 공식과 달리, 지속적으로 높은 스트리밍 수치와 여러 나라 순위권 전반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차이다. 이는 곧 흥행 척도가 ‘대중’에 기반이 놓여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영어로 이뤄져 있지만 몇몇 한국어 가사가 등장하는 노랫말에 이르러서야 유일하게 ‘K’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으로 시작하는 로제의 도입부, 브루노 마스가 태극기를 흔들며 ‘건배’를 연호하는 장면, 투박하고 정겨운 발음의 훅이 그렇다.
‘아파트’는 팝과 K-팝의 모호한 경계에 서있다. 여기서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기획사가 짠 빠듯한 스케줄 아래 주어진 콘셉트를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그룹의 일원이 아닌, 솔로 활동으로 전환하며 자기주도적으로 커리어를 갱신하는 흐름의 시작. 팝의 문법과 융합하되 K-팝 고유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고 가수 개개인의 재능과 의견이 적극 반영되어 표현의 범주를 넓히는 ‘애프터 K-팝’의 시금석인 셈이다.
제니의 싱글 ‘만트라’
©OA엔터테인먼트
작년 11월, 재계약 시즌을 맞이하면서 그룹 활동은 YG 체제로 가되 솔로로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 블랙핑크 멤버들의 행보가 이 현상을 집약한다. 제니는 소속사 ‘오드 아틀리에’를 직접 설립한 뒤, 지난 10월 11일 도발적인 트랙 ‘만트라’를 발표해 자신을 둘러싼 선정성 논란을 정면으로 타파하고 아이코닉한 캐릭터를 공고화했다. 가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날카로운 질감의 소리 아래 아시아권 여성의 정체성과 연대의 메시지를 호출한 ‘록스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 로살리아와 협업을 거친 ‘뉴 우먼’ 등의 곡을 선보인 리사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신을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모두 블랙핑크의 영토 아래 있을 때는 쉽게 떠올리기 힘들던 파격적 태도와 지향점이다.
리사의 싱글 ‘뉴 우먼’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아파트먼트’가 아닌 ‘아파트’는 뉴질랜드 복수 국적자로서 다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두 양상은 자연스럽게 마찰되고 혼합되며 새로운 감각을 창출하고, 자연스럽게 로제의 다각적인 캐릭터를 부각한다. 간단한 예시로, 유려한 영어 발음으로 브루노 마스와 합을 맞출 때는 가죽 재킷을 걸친 쿨한 대학생이, ‘아파트’를 외칠 때는 영락없이 귀여운 한국 소녀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후반부 록 사운드로 전환되며 자신의 강점인 독특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을 마음껏 뿜어낼 때는 코첼라 페스티벌 무대에서 좌중을 압도하던 경력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국의 술 문화를 소재 삼고 대형 스타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주도했다는 관점에서 우리는 이미 2014년 싸이의 ‘행오버’라는 선례를 가지고 있다. 그로부터 10년의 공백을 끊고 발을 내디딘 주인공이 K-팝 시스템의 최전선에 위치하던 인물이라는 점은 세월의 흐름 가운데 K-팝 진영에도 많은 변화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로제의 성공 사례가 등장해 생각의 폭을 넓힌 순간, 다음 타자가 등장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 장준환(웹진 <IZM>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