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덕’과 함께 성장하는 K-콘텐츠 Vol. 33
‘콘덕’은 좋아하는 콘텐츠를 덕질하는 행위 또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연말 발표한 콘텐츠산업 2024 전망 키워드 중 하나다. 일부 덕후들의 문화로 알려졌던 콘텐츠 덕질은 이제 하나의 콘텐츠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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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로 예정된 나영석 PD 팬 미팅 티켓이 개시 1분 만에 매진됐다. ‘유명 예능 PD’와 ‘팬 미팅’의 조합이라니.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이에게는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미 인기 아이돌의 상징적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생일 카페’ 또한 성황리에 마친 바 있다. 이 모두는 나영석 PD가 소속된 유튜브 채널의 콘텐츠를 위해 시도된 것으로, 카메라의 앞보다는 뒤가 익숙한 사람을 아이돌처럼 대할 때 발생하는 엉뚱한 상황을 즐기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 하지만 생일 카페는 기획자조차 당황할 만큼 많은 인파를 몰고 왔고, 결국 팬 미팅이라는 더 큰 이벤트로 이어졌다.
이 일화에서 나 PD 군단의 인기만큼이나 주목되는 것은 ‘누군가를 덕질하는 행위’가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 잡아 일종의 콘텐츠로서 대중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덕질이 더 이상 일부 덕후들의 마니악한 취미가 아니게 된 것이다. 팬 미팅은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그 빈도와 다양성 면에서 어느 때보다도 활성화된 상태다. 나영석 PD의 팬 미팅 티켓이 판매된 인터파크에만 한정해 봐도 9월과 10월에 이미 10개의 팬 미팅이 예정되어 있다. 규모와 주최 아티스트가 다양해진 것 또한 눈에 띄는 추세다. 200석 안팎의 소극장에서 주최되는 팬 미팅이 있는가 하면 1만6천 석이 넘는 고척돔에서 주최되는 경우도 있다. 유명 아이돌과 배우뿐만 아니라 운동선수, 유튜버 심지어는 캐릭터까지도 팬 미팅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배구 선수 김연경, 크리에이터와 캐릭터의 경계에 있는 펭수와 다나카 그리고 카카오 캐릭터 춘식이까지 무대에 올랐으니, 이쯤 되면 나영석 PD의 팬 미팅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닌 듯하다.
팬 미팅, 생일 카페 등의 덕질 행위가 일종의 콘텐츠로 대중화되고 있다
출처 | 인터파크 홈페이지
또 다른 덕질 공식인 ‘생일 카페’나 ‘굿즈’도 비슷한 형태로 대중화된 모습을 보인다. 생일 카페는 ‘최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이벤트성 카페로, 행사 기간 동안 카페를 대여해 해당 인물의 사진들로 공간을 꾸민 뒤 팬들을 초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팬들은 이 특별한 공간에서 최애의 탄생을 축하한 뒤, 최애의 얼굴이 박힌 컵 홀더를 포함해 주최자가 준비한 굿즈를 안고 돌아간다. 9월에 열린 웹툰 <가비지타임>의 캐릭터 박병찬의 생일 카페와 가수 아이유의 데뷔를 기념하는 데뷔 카페의 사례만 봐도 그 기념 대상과 콘셉트가 얼마나 다양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애와 관련된 다양한 상품’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굿즈’는 언급한 덕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의가 다소 모호한 이유는 그 종류가 무수하기 때문이다. 포토 카드와 엽서, 키링, 스티커는 가장 흔히 보이는 굿즈이며 그립톡, 텀블러, 에코백, 티셔츠 등 실생활에 틈틈이 침투할 수 있는 생활용품 형태의 굿즈 외에도 캐릭터의 이미지를 후각으로 구현한 향수처럼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굿즈까지 활발히 소비되고 있다. 최근 번화가 곳곳에서 열리는 팝업스토어는 굿즈의 대중적 소비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유튜버 침착맨, 웹툰 <마루는 강쥐>, 아이돌 제로베이스원 등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최애의 존재를 기념하는 팝업스토어가 화제 속에서 진행되었다.
인기리에 열렸던 <마루는 강쥐> 팝업스토어 포스터
©네이버 웹툰
콘텐츠로서의 덕질은 팬들의 능동적 참여를 수반함으로써 한층 더 활기를 띤다. 유튜브 콘텐츠의 일환으로 제작진의 주관 아래 준비된 나영석 PD의 경우를 사례로 들었지만, 본래 생일 카페의 핵심은 그것이 팬의 주도 아래 운영되는 이벤트라는 점에 있다. 가끔 뜻밖의 행운으로 최애가 직접 생일 카페를 방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오로지 팬들에 의한 팬들만을 위한 행사다. 소량으로 직접 제작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굿즈 제작 역시 팬들이 직접 참여하는 주요한 덕질 콘텐츠가 되었다. 팬들은 판매 수익금을 최애의 이름으로 기부하기도 하고, 직접 만든 굿즈를 공연 날 주변 팬들과 나누기도 한다. 공식 행사인 팬 미팅이나 콘서트 역시 팬들의 참여가 문화로 굳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슬로건과 ‘떼창’ 이벤트다. 대개 본 공연이 끝나고 앵콜을 요청할 때 이름 대신 선곡된 노래를 통해 최애를 부르고, 해당 공연을 기념할 만한 문구가 적힌 슬로건을 손에 드는 식이다. 화려하게 준비된 슬로건 카드나 ‘떼창’을 시작하기 위해 절도 있게 호루라기 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 행사를 이끄는 것이 스태프인지 팬인지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다.
굿즈를 구매하는 것은 인터넷 쇼핑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재주가 된다면 혼자서 제작해 소장하면 그만이다. 인스타 라이브 방송부터 공연 중계 실황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라이브 영상이 제공되고 모바일로도 초고화질 영상을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이 두 시간씩 줄을 서서 팝업스토어를 방문하고, 많은 비용을 내며 공연을 보러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티켓 값을 벌기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직접 굿즈를 만들고 이벤트를 운영하는 정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장에서만 판매하는 한정판 굿즈가 있다거나 최애를 실물로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라는 사실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언급된 다양한 사례들을 고려할 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듯하다.
2024년 BTS 정국 생일 카페 포스터. 생일 카페는 주최자에 따라 각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일본 만화 <동인녀 츠즈이씨>는 한 개인의 극단적 덕질 경험을 통해 ‘과연 덕질이란 무엇인가’, ‘덕질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츠즈이 씨는 좋아하는 작품의 캐릭터들을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 벽면에 최애들의 신장을 표시하다 밤을 지새운다. 또 작품 속의 축구부 매니저에 자체적으로 빙의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멤버들을 위한 마스코트를 만든 적도 있다. 19금 오디오 드라마의 음성을 직접 자기 입으로 내뱉고 싶다며 이어폰을 코에 박는 모습까지 보고 있자면, 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놀랍게도 츠즈이 씨에게는 소중한 오타쿠 동지들이 있다. 이런 기행을 벌이는 이가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감명받은 가사를 프린트해 분석을 즐기거나 상대의 최애 생일을 축하하는 한편, 때로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최애의 죽음(만화 캐릭터)을 위로하기도 한다.
최애를 기뻐하고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벌이는 동시에 그 과정을 언제나 다른 이와 함께 하는 츠즈이 씨의 모습은, 덕질의 재미에 ‘물리적 실감’과 ‘공유를 위한 커뮤니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화면으로 시청할 수 있음에도 경기장을 방문하는 축구와 야구처럼, 같은 음식이어도 친구와 함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먹을 때 더 맛있는 식사처럼, 덕질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더 체감하기 위해 구태여 수고를 감당하고, 비슷한 시선을 가진 이와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눌 때 덕질의 재미는 한층 더 생생하게 부풀어 오른다. 최애의 유형이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최애는 화면에 갇혀 있거나 무대의 단차를 두고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다. 그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토록 실감과 공유에 진심인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대체 덕질이 무엇인가? ‘최애’를 생각하며 하는 모든 일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그것이 우리 삶을 더욱 들뜨게 하기 때문이다. 덕질이 대중화된 만큼 평균의 행복지수가 좀 더 올라갔으리라 믿는다.
글. 최윤주(웹툰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