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산업의 ‘굿 파트너’ 생성형 AI Vol. 32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으로 AI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AI와 인간의 대결’이란 가십 정도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 AI는 흥밋거리가 아니라 우리 삶에 깊이 관여하는 존재가 돼버렸다. 생성형 AI라는 큰 파도를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IT, 게임 업계다.
<더 파이널스> 게임
©넥슨
2022년 11월, 오픈 AI가 GPT-3.5를 기반으로 한 ‘챗 GPT’를 발표했다. 이른바 생성형 AI를 전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챗 GPT는 2개월 만에 이용자 1억 명을 달성했고, 생성형 AI 광풍은 전 세계에 몰아쳤다. 괴물로 불리며 업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GPT-3.5가 출시된 지 불과 4개월 만이다. 오픈 AI는 그보다 상위 버전인 GPT-4를 내놓았다. 이후 GPT-4o로 이어지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능의 슈퍼 AI가 탄생하게 됐다.
생성형 AI는 이야기, 동영상, 음악,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인공지능의 일종이다. 기존 데이터를 단순히 분석하고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 사고, 창의성 등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이용해 새롭고 독창적인 콘텐츠를 재생산하는 수준의 AI다. 이전 알파고는 기존 데이터베이스를 활용·분석하는 수준이었지만, 생성형 AI는 새로운 데이터를 창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쉽게 말해 알파고가 ‘네안데르탈인’이라면, 생성형 AI는 그보다 진화된 ‘호모사피엔스’ 정도 될까 싶다.
©Shutterstock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 혁명에 이어 인터넷의 등장은 다시 한번 인류의 도약을 가져왔다. 전문가들은 인터넷 이후 또 한 번의 혁명적 변화는 생성형 AI의 등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게임 역시 생성형 AI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분야다. 일단 시장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글로벌 게임 플랫폼 ‘스팀’에는 AI가 만든 게임이 넘쳐나고 있다. 처음에는 저작권 등의 문제를 구실 삼아 AI 게임의 스팀 입점을 막았다. 물론 저작권은 부분적인 문제이고, AI 게임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을 의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AI 게임의 물결을 무조건 막기에도 한계가 있다. 스팀도 저작권 문제가 해결된 AI 게임은 입점을 허락하는 방향으로 틀었다. 물론 심의 등급처럼 ‘이 게임은 AI가 만든 게임’이라고 표시해야 판매할 수 있다. 최소한 사람이 만든 게임인지 AI가 만든 게임인지 구분은 해줘야 한다는 게 스팀 쪽 입장이다. 그만큼 AI 게임의 수준이 사람이 만든 게임 못지않다는 것이다.
놀라운 건 입점이 허가된 지 3개월 만에 1천여 개의 생성형 AI 게임이 스팀에 올라왔다는 사실. 그만큼 게임 개발에 AI 사용이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처럼 AI 게임 또한 엄청난 기세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이 투입된 <트라이브스 3: 라이벌스> 게임
출처 | 스팀
게임은 종합 예술이다. 아이디어를 내고, 스토리를 짜고, 프로그램도 해야 하고, 그래픽도 그려야 한다. 여기에는 스토리 작가, 서버 프로그래머,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중소 게임사가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어떤 회사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개발력이 부족하고, 어떤 회사는 그래픽은 잘하는데 프로그램 능력이 부족해 매일 서버가 다운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부족한 능력을 보완해 주는 존재가 AI다.
예를 들어 게임을 기획할 때 많이 하는 작업이 엑셀인데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이럴 때 AI를 시켜 엑셀 함수를 사용해 시트를 제작해주면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다. 또한 자료를 많이 찾아야 하는 캐릭터 설정이나 시놉시스 등을 생성하는 데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프로그래머에게 알고리즘을 추천해준다든가, 해당 프로그래머의 코딩 스타일에 맞춰 여러 제안을 해주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개발자를 완전히 대체해 게임을 만드는 수준은 아니고, 작업을 더욱 수월하게 해주는 도우미 역할로 AI가 쓰이는 것이다.
최근엔 생성형 AI를 활용한 전문 게임 제작 도구도 나왔다. ‘빌드 박스’는 개발자가 코딩을 하거나 그래픽 리소스를 제작하는 작업 없이 텍스트 프롬프트만으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노코드 게임 제작 도구다. 코딩을 할 줄 몰라도 설명만으로 원하는 콘셉트의 게임을 맞춰주는 것이다.
넥슨의 <더 파이널스>는 내레이션과 캐릭터 음성 일부를 AI로 생성했다.
©넥슨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메이저 게임사들도 AI 게임 개발에 적극적이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8월 업계 최초 자체 AI 대규모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 ‘바르코(VARCO) LLM’을 공개했다. 엔씨는 바르코 LLM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인 바르코 아트(이미지 생성 툴)와 바르코 텍스트(텍스트 생성 및 관리 툴), 바르코 휴먼(디지털 휴먼 생성 및 편집, 운영 툴)을 활용해 게임 기획과 아트 등의 분야에서 효율성을 끌어올릴 계획이다.
엔씨소프트가 지난해 공개한 AI 디지털 휴먼, TJ Kim
©엔씨소프트
넥슨은 다른 방식으로 AI를 활용하고 있다. AI 연구소 인텔리전스랩을 통해 AI 게임 중계, AI NPC 서비스 등을 개발 중이다. 특히 게임 운영 면에서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4월 플랫폼·데이터 기반 솔루션 ‘게임 스케일’을 공개하며 인 게임 결제, 쿠폰, 데이터, UX 분석 등 게임 운영과 관련해 AI를 활용할 것이라 밝혔다. 또한 자사 게임 <더 파이널스>에 텍스트 음성 변환 AI를 사용해 게임 내 내레이션과 캐릭터 음성 일부를 AI로 생성했다.
크래프톤은 아예 AI로 게임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크래프톤 산하 딥러닝/AI 전문 스튜디오 렐루게임즈는 <마법 소녀 루루핑>과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을 출시했다. 개발자 3명이 AI의 도움을 받아 불과 세 달 만에 만든 게임들이다. <마법 소녀 루루핑>은 주어진 주문을 읽으면 AI가 문장을 분석해 점수를 매기는 방식의 게임이다. 추리 게임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은 심문 과정에서 AI 기반 채팅 기능을 사용해 유저가 자유롭게 추리한 내용을 입력하고 이를 AI가 판단해 이후 스토리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두 게임 모두 유저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며 AI 게임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크래프톤의 AI 게임 <마법 소녀 루루핑>
©렐루게임즈
생성형 AI로 인해 분명 게임 개발 문턱은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코딩을 못해도, 그래픽디자이너가 따로 없어도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다만 이로 인해 발생할 여러 부작용은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 고용은 더욱 경직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개발에 활용되고 있는 생성형 AI는 훌륭한 보조 수단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입이 해야 할 일을 AI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 부족한 중소 개발사라면 굳이 주니어 개발자를 채용할 이유가 없다. 앞서 크래프톤처럼 개발자 3명이 3개월 만에 게임 2개를 만들 수 있는데 누가 돈과 시간을 들여 사람을 뽑겠는가?
저작권과 보안 문제 역시 해결해야 될 과제다. AI가 내놓는 결과물은 다른 데이터를 학습하면서 나온 것이다. 태생적으로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문제가 터지고 나서 ‘AI가 만들었다’고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책임은 게임을 만든 AI가 아니라, 만들라고 시킨 사람이 져야 한다. 무엇보다 보안이 문제다. 많은 게임사들이 챗 GPT 같은 생성형 AI 사용을 금지시키는 이유는 보안 때문이다. 생성형 AI는 전 세계 수많은 데이터를 활용하기 때문에 자칫 회사의 자산이 외부에 빠져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Shutterstock
아직은 생성형 AI가 게임 개발에 백 퍼센트 활용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술 발전 속도가 그 어떤 분야보다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보니 지금의 언리얼, 유니티 엔진처럼 AI가 게임 개발의 필수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생성형 AI는 분명 게임에 또 다른 혁신을 불러올 것이다. 그것이 재앙이 될지 축복이 될지는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3명이 3개월 만에 게임 2개를 뚝딱하고 내놓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글. 이덕규(<게임 어바웃>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