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불황과 미디어 산업
● 이양환 /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강사 (yanghwanlee@gmail.com)
전 세계가 경기 불황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가 상승과 미국의 경기 불안정으로 야기된 경기 한파는 여러 산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미국의 대표적인 산업인 자동차 업계는 대규모의 구제금융안이 통과되지 못하면서 파산의 위기에 몰려있고, 탄탄하기로 소문난 일본 경제도 자동차 및 전자제품 산업 등의 감산과 구조조정 문제로 시끄럽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동차, 전자, 조선, 금융, 그리고 제조업 등 거의 모든 경제 분야에서 IMF 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부정적인 분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미디어 산업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우선 보이는 모습으로는 기업들의 광고비 절감과 그로 인한 광고 수입의 축소로 인한 미디어 기업들의 경영악화, 이와 함께 방만하다고 질타 받아온 경영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미디어 기업들의 내부 개선작업의 진행, 그리고 소비자들의 소비심리 위축으로 인한 소비 감소로 인한 전자제품 판매의 위축들이 보인다. 또한,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처럼 일부 MC와 배우들의 지나친 개런티가 경기 불황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방송사의 프로그램 제작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논란도 경기 침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모바일 폰 모델은 여전히 계속 출시되고 있고 하반기 이동통신사의 광고비는 오히려 증가한데다, IPTV가 지상파 방송 실시간 전송이 가능해 짐과 동시에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벌이고 있는 등 경기침체를 무색하게 하는 모습도 보인다. 과연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기 불황이 미디어 산업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인가?
전 세계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력이 가장 큰 미국의 경우 경기 침체로 인한 불안감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지만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조금 상반되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미디어 기업 종사자들이나 투자자들, 그리고 미디어 산업 분석가들이 내놓고 있는 전망이나 태도들은 모두 경기 침체가 가져올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이미 미국의 대형 신문사인 Tribune이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New York Times는 광고매출이 14% 이상 감소와 함께 경영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을 감행했으며, 미국 광고시장의 침체는 2010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지난 12월 8-9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36회 글로벌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컨퍼런스에 참가한 거대 미디어 경영진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미디어 분석가들 역시 대체로 경기 침체가 경영 전반의 어려움으로 귀결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컨퍼런스 시작 전부터 이러한 모습은 예측되었었는데, 우선 컨퍼런스 참석자 어느 누구도 현재 경기 침체의 심각성과 광고 시장에의 악영향을 2008년 초와 같이 부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CNBC의 데이빗 파버는 ''어느 누구도 좋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단지 누가 덜 피해를 봤는지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고 컨퍼런스에 참석한 제프 주커 미국 NBC CEO도 미디어 산업도 방만한 경영 스타일과 비즈니스 모델의 개혁이 없다면 미국 자동차 산업처럼 파산할 수도 있음을 컨퍼런스에서 경고했다. Time Warner의 글렌 브릿 CEO는 Time Warner의 고객 증가율과 유료서비스 수요도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실토하기도 했다. 컨퍼런스 참가자들은 이러한 경기 침체로 인한 미디어 산업의 불황이 2009년 후반기에 가야 좀 풀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영 환경의 악화에 대한 우려는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경기 침체가 궁극적으로 미디어 산업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는 견해나 현장 지표 역시 나오고 있다. 그 증거로 우선 미디어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이 다른 생산물의 소비처럼 위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소비자 조사기관인 Amdocs의 최근 조사 결과는 경제 현실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미국의 소비자들은 인터넷이나 와이어리스, 케이블, 그리고 위성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줄일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약 66%의 미국 소비자들은 위와 관련한 서비스 이용에 드는 비용을 줄일 생각이 없다고 답했고, 67%는 더 좋은 서비스를 경험하기 위해 (소비자 경험 (customer experience)를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고 답했다.
즉, 인터넷, 와이어리스, 케이블, 그리고 위성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은 만약 그들이 이용하는 서비스 제공자들이 더 진보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기꺼이 이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조사를 담당한 Amdocs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경기 불황의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정보 (information)''이며, 인터넷과 케이블, 위성, 그리고 와이어리스 서비스들은 더 이상 사치 품목이 아니라 정보 습득을 위해 꼭 필요한 필수 품목으로 자리하게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대면 접촉이나 기존 전화에 의존했던 과거에서 인터넷이나 와이어리스로 정보를 주고받는 현대인을 감안해 보면 이러한 추측은 타당할 수 있다.
비슷한 견해로 통신산업 (telecommunications industry)이 전 세계적으로 각 국가의 경제 성장에 꼭 필요한 기간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와이어리스, 모바일 폰, 모바일 인터넷, VoIP, 그리고 기타 영상 산업들의 성장은 경기 침체와는 별도로 그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미디어 융합을 주도하고 있는 통신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세는 기존 미디어 산업의 경제적 타격 역시 줄이거나 혹은 그 성장세를 유지시켜 줄 수 있다.
실제로 Insignt Research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전 세계 통신 시장은 향후 5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통신산업의 성장은 와이어리스와 브로드밴드 서비스를 위주로 이루어질 것이며 기존의 전화사업의 성장은 더딜 것으로 예측해 경기 침체의 시기에 유전 전화가 와이어리스 혹은 모바일 폰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가능하게 하고 있다. Fitch Ratings의 조사결과는 이러한 예측을 뒷받침 하고 있는데, 현재 유선전화 회사들은 지난 3분기동안 약 2백8십만에 이르는 접속라인 손실을 봤으며, 이는 일 년 전에 비해 53%, 2분기에 비해 10% 이상 늘어난 수치이다. 반면, 17%에 이르는 미국 가정이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 이동했고 올해 말에 이르면 무선전화만을 사용하는 가정이 5집에 1집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다. 즉, 경기 침체에 따라 손실을 입는 쪽은 전통적 미디어인 유선 전화시장이고 와이어리스나 모바일 폰 시장은 현상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기가 어려우니 통신비는 줄이게 되지만 이는 그동안 유/무선으로 나뉘어졌던 통신서비스 이용 통로가 무선으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신시장의 변화는 케이블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유선전화 사업자들의 손실이 고스란히 케이블 업자들에게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Comcast를 비롯한 케이블 회사들의 전화서비스 가입자는 3분기에 약 78만명 이상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유선전화 회사들의 손실에서 약 28%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유선전화 서비스 이용자들이 무선 서비스 시장으로도 이동했지만 오히려 케이블 업체가 제공하는 전화 서비스, 즉 VoIP 서비스로 이동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경기 불황의 전조들이 이미 2007년부터 나타났음을 감안할 때 2007년 케이블 업체들이 기존 유선전화 사업자 고객의 약 50% 이상을 이동시켰다는 결과를 함께 고려한다면, 통신시장의 움직임은 소비 심리가 얼어붙는 경기 불황의 영향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손해를 보는 것으로 나타난 유선전화 회사들의 미래는 어두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경기 침체와 유선 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AT&T나 Verizon과 같이 옛 Baby Bell 회사를 계승한 회사들의 경우 난국의 타개책으로 영상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고 이러한 서비스가 유선 시장에서의 손실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Verizon의 경우 광섬유 (fiber optic)를 기반으로 한 FiOS TV가 수익을 올리고 있고 AT&T의 경우는 U-verse가 영상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유선 시장에서의 손실을 만회하려 하고 있다. 종합해 본다면 통신산업은 경기 침체기에 오리려 산업의 구조조정 효과를 내고 있는데, 유선전화 가입자의 이탈이 오히려 와이어리스 및 모바일 폰 산업의 활력소가 되고 있고, 또한 케이블에 까지 영향을 미쳐 전체 산업이 경기 불황에 동요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기 불화에 밖에서 지출하는 소비패턴이 줄어들고 집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 오히려 미디어 소비를 촉진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Verizon에 의해 실시된 조사에서 약 57%의 조사대상자들은 올 연말 밖에서 여가를 즐기던 생활 패턴을 바꿔 집에서 TV를 시청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응답했다. 홈 엔터데인먼트 (home entertainment)와 스테이 (stay: 머무르다)의 합성어인 ''home enterstayment''로 대변되는 이러한 생활 패턴의 변화는 홀리데이 기간에 매우 저렴하게 판매되는 HDTV나 기타 영상기기의 가격 하락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자의 약 62%가 현재 HDTV를 소유하고 있었다).
즉, 밖에서 쓰는 지출을 줄이는 대신 값싼 고화질 TV나 기타 가정에서 즐길 수 있는 오락기기를 구매하여 집에서 품질 좋은 영상 서비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Verizon의 FiOS TV VOD 서비스가 지난 10월과 11월 크게 증가할 것이 조사 결과를 또한 증명하고 있다. 디지털 케이블이나 위성, IPTV의 등장으로 (한국의 경우) 집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이러한 생활 패턴은 경기 침체기가 지나도 계속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며 비단 미국의 경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의견을 낼 수 있다.
경기가 나빠졌지만 오히려 TV 시청은 늘어나 디지털 셋톱박스 판매가 늘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밖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여가시간을 소비하던 기존의 소비자들의 생활패턴이 IPTV나 디지털 케이블을 이용한 집에서의 여가시간 소비로 돌아서거나, PMP (Personal Multimedia Player)나 DMB 폰을 이용하여 밖이지만 홀로 영상기기를 이용하여 시간을 보내는 등의 미디어 소비는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더욱 일반화 될 것이고, 경기 침체기에 이러한 패턴이 더욱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물론 미디어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광고시장의 침체로 미디어 기업들의 활동이 과감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장기적인 경기 불황에 대한 예측으로 인해 앞으로 계속 미디어 산업의 호황이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기 침제로 인해 소비자들이 그동안 주변에 있던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 기기들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새로운 미디어의 채택과 확산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여 구 미디어가 신 미디어로 대체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경기 불황으로 인한 미디어 산업의 지형이 내년 말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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