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이야기와 새로운 상품화: UCC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
1. 서론
‘이용자 제작 콘텐츠’ 또는 ‘(사용자) 손수 제작물’이라는 뜻의 UCC(user created contents)란 말은 이제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언론은 UCC가 새로운 미디어 시대를 열고 있다고 다소 과장 섞인 평가를 연일 쏟아내고 있으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지하철 객차 안에서조차 UCC를 알리는 광고 문구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은 4월 22일 ‘세계는 UCC 혁명 중 U! 당신은 누구십니까?’란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다.
이러한 UCC 열풍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현상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지난 2006년 미국의 <타임(Time)>지는 올해의 발명품으로 동영상 UCC 전문 사이트 ‘유튜(youtube)’를 선정했고, 올해의 인물로는 ‘당신(U, you)’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그러나 UCC가 기존 매스미디어의 정보 장악력에 맞서서 세상을 바꾸고 평범한 개인들이 정보 생산의 주체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대중적 환상을 불러 모으고 있는 반면, 2006년 10월 거대 포털 기업 구글(Google)이 16억 달러로 유튜브를 인수했다는 사실에 대한 대중적 주목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구글이 지불한 16억 달러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글은 수용자의 능동성, 새로운 문화 콘텐츠의 공급 통로, 인터넷 공론장(public sphere)의 활성화 등으로 부풀려져 있는 UCC에 대한 지배 담론의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의 접근법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먼저 지난 1년여 동안 ‘제4의 물결’, ‘UCC 혁명’ 등의 다양한 수식어를 동반하면서 마치 질적으로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창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UCC가 사실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앞질러 말하자면, UCC는 낡은 이야기의 새로운 포장(packaging)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포장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서서 때때로 실질적인 변화의 힘을 가진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맥루언(McLuhan, 1964; 1997)의 경구처럼 포장의 힘은 충분히 위력적이다. 따라서 낡은 이야기의 포장이 몰고 온, 그리고 몰고 올 변화의 모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그러한 작업은 두 가지 갈래로 진행될 것이다. 첫 번째는, UCC의 무대인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이와 일상의 성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이는 인터넷 공간이 광장에서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지적(강남훈, 2003)을 이론적 배경으로 한다. 두 번째는, UCC가 미디어 수용자의 참여와 능동성을 확장시키는 이면에서 수용자 상품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을 스마이드 (Smythe, 1977; 2001)의 이론을 빌려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또한 UCC가 보여 주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수용자 상품화는 인터넷 공간의 공론장으로의 역할에 대해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아울러 논의할 것이다.
2. 낡은 이야기, 새로운 포장
우리 사회에서 UCC라는 말의 공식적 첫 등장은 2000년 12월 26일자 <매일경제>의 ‘뜨는 콘텐츠 지는 콘텐츠’라는 콘텐츠 분야에 대한 연말 분석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사는 “비주얼과 오디오적 요소가 결합되는 멀티미디어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사용자가 콘텐츠 창조에 참여하는 ‘UCC(User-created Contents)’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이화행, 2007, 63쪽에서 재인용). 따라서 이 용어를 미디어 업계, 특히 인터넷 기업 내부에서는 20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대중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2005년 무렵부터다(황지연․성지연, 2006). 사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만든다는 UCC의 뜻 자체에 충실하자면, UCC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터넷의 대중화 이전인 1990년대 초반의 PC통신 시절부터 사용자들은 스스로 정보와 의견을 생산하고 교환했다. 그러나 오늘날 UCC는 주로 사용자가 직접 만든 동영상 제작물을 가리키는 제한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UCC는 예전부터 존재하던 것의 일부를 새롭게 강조하는 일종의 신조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낡은 것을 새롭게 포장할 필요가 있었는가? 왜 그러한 포장이 마치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민경배(2007)는, UCC라는 말이 갑자기 크게 유행하게 된 배경을 이용자들의 ‘인지 절약’ 전략과 인터넷 기업들의 상업적 계산이 적절히 들어맞은 결과라고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다.
첫째, 오늘날의 웹(web) 환경을 일컬어 ‘웹 2.0’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인터넷의 진화를 설명하는 기술적 원리와 용어들이 전문가나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복잡하고 까다롭다. 따라서 사람들이 복잡한 사회적 환경을 평가해야 하는 경우, 흔히 압축적이고 활용하기 쉬운 측면을 따로 떼어내어 인식하게 된다는 뜻의 심리학 용어인 ‘인지적 절약가(cognitive miser)’ 개념이 UCC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만든다는 의미의 UCC는 웹 2.0의 핵심적 특징을 담고 있으면서도 일반인이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둘째, UCC가 인터넷 기업들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폭넓게 이루어지 고 있던 이용자 생산 정보에 인터넷 기업들이 UCC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덧씌워 상품화하기 시작하면서 이 개념이 마치 아주 새로운 인터넷 트렌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인데, 인터넷 기업 입장에서 보면 UCC라는 포장으로 재가공된 이용자 생산 정보는 콘텐츠의 생산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주며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아주 매력적인 자원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UCC 유행의 원인을 설명하는 두 가지 차원 중에서 보다 근본적인 것은 후자, 즉 인터넷 기업들의 상업적 계산이다. UCC는 말 그대로 ‘이용자가 만든 콘텐츠’를 뜻한다.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네티즌들이 직접 만들었거나 옮겨온 콘텐츠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용자가 만든 콘텐츠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표현이다. 오직 새로운 점은 인터넷 기업이 이미 존재하는 UCC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성공 모델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UCC의 기술적 배경으로 여겨지는 웹 2.0도 웹의 사회․문화적 진화 자체를 가리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웹 2.0은 2000년대 초의 닷컴 버블이 붕괴한 이후에도 살아남아 거대 기업이 된 구글, 이베이 등의 비즈니스 성공 요인을 총칭하기 위해 미국 오라일리의 부사장 데일 도허티 가 고안해 낸 말이다 (민경배, 2007).
오늘날 UCC는 곧 동영상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지만, 사실 이용자가 만든 콘텐츠를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례는 동영상 UCC 이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 폐인’이란 유행어를 만들어 낸 디지털 카메라 정보교환 사이트 ‘디시인사이드(DC Inside)’, 시민기자 제도를 통해 새로운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보여 준 ‘오마이뉴스(OhMyNews)’ 등이 모두 사용자가 직접 만든 콘텐츠를 핵심적인 비즈니스 아이템으로 삼은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포털 사이트 네이버(naver.com)의 ‘지식인’ 서비스 성공은 네이버를 한국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웹 사이트로, 실질적인 인터넷 공간의 ‘방송 미디어’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는 이용자들이 제공한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다. 네티즌들이 특정 질문을 던지면, 다른 네티즌들이 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포털 사이트 네이버는 단지 그러한 게시물이 기록될 수 있는 서버 컴퓨터를 비롯하여 적당한 플랫폼(platform)만 제공하면 된다. 그런데 많은 네티즌 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거대한 양의 질문과 답변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됨으로써, 일종의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가 발생했다. ‘모르는 것은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면 된다’라는 상식 아닌 상식이 인터넷 이용자들 사이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네이버의 놀라운 상업적 성공은 다른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아예 동영상 UCC만으로 인터넷 콘텐츠 제공 사업을 벌이려는 많은 시도들을 낳고 있다. 판도라TV(www.pandora.tv), 엠엔캐스트 (www.mncast.com), 엠군(www.mgoon.com) 등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기업들이 UCC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daum.net)은 물론이고 IPTV 시범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 KT를 비롯하여 CJ그룹, 오리온그룹 등이 UCC 사업 부문을 강화하거나 대규모 투자 확대 및 전략적 제휴를 시도하고 있다. 2007년 4월 현재 가장 많은 수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동영상 UCC 서비스는 판도라TV, 엠엔캐스트, 다음TV팟으로 나타나고 있다(김민수, 2007).
이런 까닭에 UCC에 대한 지배 담론은 산업적 담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인터넷 기업을 비롯한 미디어 업계는 지난 2006년에 UCC를 정면으로 내건 공개적인 논의를 두 차례 개최했다. 첫 번째는 2006년 6월에 플루토미디어와 코리아인터넷닷컴이 주최했는데, ‘웹 2.0 시대의 사용자 참여형 비즈니스 패러다임 혁명’이라는 부제로 인터넷 서비스의 UCC 활용 전략과 기업 마케팅 및 비즈니스 모델 개발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국내 최초의 UCC 컨퍼런스라는 점에서 담론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2006년 9월에 K모바일이 개최한 두 번째 컨퍼런스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 되었다. 16편의 주제발표 모두가 기본적으로 산업적 담론의 범주 안에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3편의 발표문은 각각 동영상 저작권‧인터넷 문화‧저널리즘 차원의 접근을 시도했으나, 역시 UCC의 비즈니스 성공 모델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산업적 담론이 주도하고 있는 UCC 지배 담론은 또 다른 포장을 시도하고 있는데, UCC를 통한 수용자 주권의 획기적 신장과 인터넷 공론장 형성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그것이다. UCC를 통해 미디어 생산자와 분배자와 소비자 사이의 구별이 근본적으로 무의미해졌으며, 이는 기존의 매스미디어 중심적인 불평등한 수직적 커뮤니케이션 권력 관계를 평등한 수평적 권력 관계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UCC 혁명’은 네티즌으로 대표되는 미디어 수용자의 능동성에 힘입어 문화 다양성을 활짝 꽃피우고 인터넷 공론장을 활성화하여 민주주의의 질적 성숙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또 다른 익숙한 낡은 이야기다. 가깝게는 1990년대 말 인터넷의 대중화 시기에 쏟아졌던 전자민주주의의 장밋빛 미래에서부터 멀게는 20세기 초의 라디오 등장도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거대한 사회변동의 힘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McChesney, 1996;1997). 인터넷과 라디오만이 아니다. 전신, 전기, 전화, 텔레비전까지도 새로운 미디어가 소비자의 권한강화와 사회변동을 약속해 왔으나 결국은 ‘신화(myth)’의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Mosco, 2004). 신화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사실(reality)이 아니고 진리(truth)도 아니다. 그러나 신화를 단순히 ‘진실의 날조(fabrication of truth)’라고 기각하는 것은 불충분하다(Mosco, 2004, pp. 22~31). 신화는 때때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정치철학자 매킨타이어(A. MacIntyre)의 지적처럼 신화는 진리 또는 거짓이 아니라 살아 있거나 죽은 것(living or dead)이다. 만약 신화가 인간의 삶에 계속해서 의미를 주고 있다면, 만약 신화가 주어진 시대의 집단적 정신상태(collective mentality)의 중요한 부분을 표상한다면, 만약 신화가 내적 모순(incoherence)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때문에 UCC는 낡은 이야기를 새롭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단순하게 결론내릴 수 없다. 우리는 ‘UCC 혁명’이라는 지배담론이 품고 있는 신화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화를 이해하고 밝혀낸다는 것은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3. 일상의 상품화, 능동적인 지배의 수용
1) 광장과 시장 이 부분은 이남표(2006)의 논의 일부를 수정‧요약한 것이다. UCC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공간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은 여러 가지의 정의가 가능하지만, 레식(Lessig, 2002)이 제안한 3계층 모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강남훈, 2003, 212쪽). 첫 번째 계층은 물리적 계층(physical layer)이다. 이는 가장 바닥에 있는 계층으로, 인터넷을 구성하는 컴퓨터‧전화‧광케이블‧라우터 등의 하드웨어를 의미한다. 두 번째 계층은 코드 계층(code layer)이다. 코드 계층은 물리적 계층을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를 말하며, 인터넷의 가장 중요한 코드인 TCP/IP 프로토콜도 여기에 포함된다. 세 번째 계층은 콘텐츠 계층(contents layer)이다. 이는 말 그대로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와 서비스를 가리킨다. 레식은 3계층 모델이 인터넷뿐만 아니라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자유로운 접근 허용 여부를 기준으로 하여 연설 공간, 공원, 전화, 케이블 TV를 이 모델로 설명한다.
여기에서 매디슨스퀘어 가든이나 전화에서의 코드 계층은 소프트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강남훈(2003)은 대신에 규칙 계층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터넷의 코드가 접속을 허락하고 콘텐츠를 전달하는 규칙을 프로그램 한 것이기에 법, 규범, 정책 등을 총칭하여 규칙 계층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수정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광장‧시장 모델을 제시한다.
시장의 콘텐츠는 상품들로 구성된다. 이는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것이고 통제된 것이다. 반면에 광장의 콘텐츠는 자유롭다. 광장에서 연설을 하든, 달리기를 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반면에 규칙 계층의 경우에는 시장과 광장이 모두 자유롭다. 시장의 규칙이 자유롭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의 규칙은 여러 가지가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강남훈(2003, 214쪽)은 그러한 사례로 모든 상품에 가격이 매겨져 있고, 그 가격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판매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규칙으로 본다. 그런데 그 밖에도 다른 규칙을 나름대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또 시장에서는 지정된 사람만 판매할 수 있다든지, 특정한 사람만 구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장은 자유로운 상태이다. 전통적인 시장에서는 인터넷과는 달리 코드가 아니라 주로 법과 규범이 규칙 계층을 구성한다.
이를 인터넷에도 적용할 수 있다(강남훈, 2003, 215~217쪽). 첫째, 인터넷의 물리적 계층의 핵심을 이루는 네트워크 설비는 인터넷 기업과 망 사업자의 사유물이기에 통제된 상태다. 둘째, 콘텐츠 계층은 자유로운 것으로 시작했다. 원래 인터넷은 상업적 용도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상품화를 통해서 통제된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셋째, 인터넷의 규칙 계층은 기본적으로 자유롭다. 가장 핵심적인 규칙인 TCP/IP 프로토콜이 원칙적으로 접근을 통제하도록 프로그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의 규칙 계층이나 시장의 규칙 계층이 모두 자유롭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매우 다르다. 인터넷의 규칙은 선물교환(gift exchange)이다. 특별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서로 무엇인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으레 답례를 한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내게 무엇인가를 제공해 주면, 나도 그것에 대해 답례를 하는 것이 규칙이다. 물론, 꼭 받은 사람에게 되돌려 줄 필요는 없다. 인터넷은 다대다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장의 규칙은 화폐를 통한 등가교환이다. 따라서 인터넷과 시장은 모두 자유로운 규칙 계층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유의 실질적 의미는 크게 다르다.
시장자유주의(market liberalism) 시장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전통 중에서 민주주의보다 시장 제도를 우선시하는 입장을 말한다. 이는 시장이 자생적이고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바라본다. 시장자유주의는 시장뿐만 아니라 사적 소유도 자생적이고 자연스러운 질서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간주한다.
반대로 광장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을 낳기 때문에 자생적 질서라고 간주하기 어렵다고 본다. 시장자유주의는 광장이 자연스러운 질서가 될 수 없는 까닭을 경합적이면서 배제가 불가능한 공유지가 남용되는 현상에서 찾는다. 그런데 인터넷은 자생적으로 ‘공유지의 희극’을 창출했다 (강남훈, 2003, 220~222쪽). 인터넷이라는 광장은 비록 설계자가 존재하는 코드의 형태로 규칙이 만들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쟁과 협력을 통하여 최선의 지식을 발견하는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관습법의 형성 과정과 유사한 길을 밟아 왔다. 따라서 인터넷은 자생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생적 질서가 무소유나 공유를 토대로 하는 광장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시장자유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공적 소유나 무소유는 마땅히 인위적 질서의 결과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광장이 창출한 ‘공유지의 희극’은 시장의 힘에 의해서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다. 점차 늘어나고 있는 인터넷 공간의 상업적 영역은 콘텐츠 계층을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상품과 서비스로 채워 나가고 있으며, 규칙 계층에서는 선물교환을 등가교환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물론 선물교환에 익숙한 인터넷 이용자들을 등가교환의 규칙으로 통제하는 일은 쉽지 않다. 흔히 볼 수 있듯이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던 인터넷 기업이 유료로 전환한 후에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네티즌의 발길이 끊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UCC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선물교환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실은 등가교환의 규칙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상품이 아니었던 것을 상품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이 다.
2) 자발적 상품화 UCC는 무엇을 상품으로 전환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인터넷 이용자의 ‘일상과 놀이’이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지하철 동영상 UCC 서비스 광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분은 요즘 클럽에서 잘 나가는 춤을 너무 잘 추십니다. --> 이런 분은 UCC를 만드셔야 합니다. 이 분은 살 안 찌는 저칼로리 야식 조리법을 압니다. --> 이런 분은 UCC를 만드셔야 합니다. 이 분은 어젯밤 6개월간의 인도 배낭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 이런 분은 UCC를 만드셔야 합니다. 이 분은 서울 근교의 모든 야생화 사진들을 갖고 있습니다. --> 이런 분은 UCC를 만드셔야 합니다.
광고가 보여 주듯이 동영상 UCC의 중요한 자원은 인터넷 이용자의 일상이다. 물론, 현재 UCC의 대부분 은 사용자가 직접 제작한 순수창작물이라기보다는 기존 방송 콘텐츠의 편집과 패러디를 통한 재가공이 다. 실제로 전체 동영상 UCC의 90% 가까이가 방송 콘텐츠의 재가공물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UCC의 주 수용자가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이며(김선진, 2007), UCC 수용자의 62.2%가 향후 자신이 제작하거나 타인이 제작한 콘텐츠를 공유할 의사가 있으며, UCC 경험이 없는 경우도 46.5%가 공유 의사가 있다고 밝혀, UCC의 생산과 공유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평가받는다(민경배, 2007). 따라서 개인의 일상을 중심으로 하는 동영상 UCC의 생산이 서서히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개인의 일상과 놀이는 상품이 ‘아니었다.’ 인도 배낭여행 상품을 여행사에서 구매할 수 있지만, 여행자의 경험과 감동은 상품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여행의 경험과 감동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은 전적으로 선물교환의 규칙에 따르는 자발적인 행위다. 마찬가지로 아마추어 사진가의 야생화 사진은 상품화된 사진기로 찍지만, 그 사진이 곧 상품은 아니다. 그러나 UCC 동영상 사이트에 올린 인도 배낭여행기와 야생화 사진은 상품이 ‘될 수 있다’. 광고주가 간접적으로 UCC 동영상 사이트에 돈을 지불하든, 아니면 UCC 동영상 서비스 업체가 직접적으로 UCC 제작자에게 돈을 지불하든, 양자 모두 선물교환이 아니라 등가교환의 규칙을 따른다.
UCC에 있어서 선물교환의 규칙이 등가교환으로 바뀌는 과정, 인터넷 이용자의 일상과 놀이가 상품으로 바뀌는 과정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보인다. 네티즌들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인터넷 콘텐츠와 서비스의 유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등가교환의 규칙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기존의 매스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작동한다. 그것은 수용자들의 ‘표현 욕구의 획기적인 기회 제공’이다(이희은, 2007). 아울러 표현 욕구는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와도 연결되어 있다. UCC를 만들어 웹 사이트에 올리는 까닭은 자기 스스로 표현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타인들이 그것에 주목하고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전통적 매스미디어들은 그러한 표현 욕구를 충분하게 제공하지 못하는 반면, 인터넷 공간의 UCC는 그 어떤 매체보다 효과적으로 널리 표현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
그런데 UCC를 통한 표현 욕구의 과잉은 문화연구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일상을 상품으로 만들고, 수용자들은 놀이 형태의 자발적인 노동을 통해서 그 상품의 생산과 소비에 스스로 기여하게 된다 (이희은, 2007). 이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일상의 단편을 기록하여 표현하고 남들이 이를 봐 주기를 기대하는 욕망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재미’라는 오락적 가치에 집착한다. 포스트만 (Postman)은 1980년대 미국 사회의 텔레비전 문화가 몰고 온 공공의 이슈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오락의 형태로 변해 버린 세태를 비판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UCC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뉴스마저도 오락적 가치를 추구하고 재미난 형태로 전달되는 상황, 재미가 가장 큰 이데올로기로 둔갑한 상황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웃기려 애를 쓴다. 생각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주고받는다. 입장의 차이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잘생겼는지 더 유명한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런데 옹달샘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고 만족하는 신화 속의 나르키소스와는 달리 현대의 네티즌들은 이미 가상의 수용자를 상상한 다. 즉, “옹달샘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나르키소스는 사랑할 뿐이었지만, UCC 제작자는 자신이 아끼는 직접 만든 동영상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도 사랑받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댓글과 조회 수와 추천 수는 그러한 ‘사랑’과 노동의 결과를 측정하는 지표가 된다.”
결국 ‘UCC 혁명’이 내세우는 수용자 참여 또는 수용자의 능동성이라는 찬사의 이면에 존재하는 현실은 수용자들의 자발적인 노동이다. 생비자(prosumer)라는 말뜻 그대로 생산하고 소비한다. 그리고 그 노동의 결과물은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서 등가교환된다. 따라서 수용자의 능동성은 UCC 지배담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커뮤니케이션 권력을 미디어 이용자의 손에 온전하게 가져다주는 민주적 힘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간햄(Garnham, 2000)이 지적했듯이, 중요한 문제는 수용자가 능동적인 가 아니면 수동적인가를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데 있지 않다. 수용자의 능동성이 곧 모든 억압으로부터 의 해방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일찍이 헤겔(Hegel)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간파했듯이 지배와 능동적 동의는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 진정한 문제는 어떻게 ‘비강제적이고 능동적인 지배의 수용(non-coercive but active acceptance of domination)’이 달성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남표․김재영, 2006).
UCC 지배 담론의 또 다른 낙관적 전망, 즉 사람들의 일상의 경험이 다양한 정도만큼 UCC의 내용물도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제 미디어 영역에 있어서 문화 다양성은 자연스럽게 보장될 수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의심스럽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UCC를 지배하는 것은 ‘재미’라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모든 담론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공간에 는 다양한 담론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동영상 UCC 사이트에도 진지한 사회․정치적 이슈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맥체스니(McChesney, 2000, pp. 182~183)의 지적처럼 다양한 담론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어느 누군가가 인터넷 공간이 상업적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고 지적하면, 그러한 문제제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인터넷에서는 얼마든지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내용을 담은 블로그를 직접 만들거나 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웹 사이트를 찾아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문제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포털 사이트의 여론 지배력을 문제 삼을 때, 그렇다면 포털 사이트를 방문하지 말고 당신이 좋아하는 웹 사이트를 찾아가서 마음껏 즐기면 되지 않겠느냐는 답변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4. 길들여지는 공론장, 또 다른 낡은 이야기의 새로운 발견
1) UCC와 수용자 상품론 낡은 것의 새로운 포장인 UCC는 공교롭게도 또 다른 낡은 이야기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해 준다. 그것은 스마이드가 1977년에 제안한 수용자 상품론(audience commodity theory)이다(Smythe, 1977; 2001).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은 수용자 상품론으로 미디어 콘텐츠 생산과 소비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시장자유주의의 논리를 비판해 왔다. 수용자 상품론에 따르면, 미디어는 자신의 메시지를 상품으로 수용자에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미끼로 수용자를 광고주에게 판매한다(이효성, 1989, 24쪽). 결국 미디어의 진정한 소비자는 광고비를 지불하는 광고주이지 수용자가 아니다. 미디어의 진정한 상품은 메시지가 아니라 수용자가 되며, 메시지는 수용자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한 것이다. 미디어 기업들은 보다 많은 수용자(양), 보다 구매력이 높은 수용자(질)를 생산하여 광고주에게 판매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신문과 방송 같은 전통적 매스미디어의 주 수입원은 광고다. 이 광고의 힘은 미디어의 수용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미디어 시장에서 선택할 수 없게 만들며, 문화 다양성을 질식시킨다. 광고주가 원하는 것이 보다 많은 수용자의 주목과 관심이기 때문에 미디어 기업은 소수의 독특한 취향이나 논쟁적인 이슈를 다루기보다는 어느 누구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는 탈정치적이고 말랑말랑한 오락적 콘텐츠의 생산에 주력하게 된다. 또한 광고주가 더욱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자신이 광고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수용자의 관심이다. 때문에 구매력이 낮은 수용자 계층의 취향과 이해관계는 무시 받거나 소외당한다. 대개 구매력이 높은 계층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기 때문에 기존 질서(status quo)의 변화를 원치 않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기 쉽다. 따라서 매스미디어의 메시지가 일반적으로 현상 유지적이고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하는 데 인색하도록 구조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용자 상품론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다매체 다채널 환경의 도래, 특히 수용자 주문형 콘텐츠 (contents on demand) 같은 유료 미디어의 등장과 활성화 속에서 곧잘 낡은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방송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광고나 시청료 같은 간접적 또는 무차별적 요금을 부과하던 전통적 서비스 제공 방식”에서 “차별적 요금에 차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감으로써 “수용자들이 보다 세분화되고 차별화된 정체성에 부합하는 방송 내용을 선별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 그러하다(윤석민, 2005, 139쪽).
하지만 UCC의 현실은 수용자 상품론의 가치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UCC 플랫폼을 제공하는 미디어 기업의 주 수입원은 여전히 광고다. 사실 유료 미디어 콘텐츠 시장도 완전히 광고로부터 단절된 공간이라고 볼 수 없다. 이를테면, PPL(제품노출, Product Placement)이라는 새로운 광고 형식의 등장과 활성화가 미디어 시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려할 때, 광고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포털 사이트이든 아니면 동영상 UCC 전문 사이트든 간에 이들이 제공하는 이메일, 블로그, UCC 등의 서비스 유지에 필요한 비용은 인터넷 이용자의 주목과 관심을 구매하기 위해 광고주가 지불하는 광고비에서 나온다. 따라서 포털 사이트와 동영상 UCC 사이트를 비롯한 상업적 웹 사이트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방송 미디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용자를 상품화한다. 따라서 수용자 상품론의 현실 설명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욱이 UCC는 수용자 상품론이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이론적 공백을 실증적으로 채워 줌으로써 그 현실 설명력을 더욱 높여 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미디어 기업이 콘텐츠뿐만 아니라 수용자의 주목과 관심을 상품으로 생산한다는 수용자 상품론의 과감한 주장은 미디어 생산․소비 과정의 이중적 성격을 설명해 준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논란의 핵심은 수용자 노동의 개념, 그리고 광고와 마케팅의 생산적 성격의 평가에서 비롯한다(이남표․김재영, 2006). 스마이드의 접근 방식은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작업장과 기업의 범위를 벗어나 자본의 생산‧순환‧소비 과정이라는 서로 연관된 큰 흐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임영호, 2000). 그러나 수용자 상품론이 담고 있는 수용자 노동 개념은 획기적이지만 커다란 논란을 자아냈다. 과연 수용자가 어떠한 성격의 노동을 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서 어떠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용자의 텔레비전 시청행위가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며, 따라서 소비 행위 역시 때때로 생산적일 수 있다는 스마이드의 주장’은 마르크스(K. Marx)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론과 양립하기 어렵다.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소비행위를 생산적 노동의 범주로 포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UCC는 이러한 난점을 깨끗하게 해결해 준다. UCC를 만드는 미디어 수용자는 실제로 생산적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수용자 상품론의 가치는 재발견된다. 인터넷 이용자는 이중적으로 상품화된다. 첫 번째는 스마이드가 명확하게 제시한 바로 그 수용자 상품화다. 특정 웹 사이트나 UCC 사이트를 클릭하고, 그곳의 정보와 메시지를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광고주에게 자신의 관심과 주목을 판매하게 된다. 두 번째는 UCC를 통해 새롭게 나타나는 상품화다. 수용자가 자신의 일상과 놀이를 생산적 노동으로 전환함으로써 그 결과물 또한 방송 콘텐츠 상품으로 둔갑한다.
2) 생활세계의 식민화 하버마스(Habermas, 1981; 1987)에 따르면,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는 하나의 사회적 총체가 아닌 서로 분리되어 있는 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활세계는 언어에 기반을 둔 주체적 인간 사이의 인격적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고, 체계(system)는 화폐와 권력이라는 두 매체에 의해 작동하는 영역이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발전과 그에 따른 모순의 심화는 생활세계의 영역에 끊임없이 체계의 논리가 침투하도록 만든다. 이는 하버마스의 핵심적인 이론적 관심사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을 악화시켜,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발전한다.
이러한 체계의 침탈로부터 생활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하버마스는 ‘자율적인 공론 영역의 활성화’라는 대항권력에서 찾는다(Habermas, 1992). 정치체계나 경제체계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이비 공론장이 아닌 자율적인 시민들에 의한 수많은 작은 부분 공론 영역들의 힘으로 체계를 제어하는 것, 목적합리성의 과도한 발달로 인해 질식되었던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복원하는 것, 이것이 하버마스 사회비판 이론의 해방전략이다(이남표, 2006).
그런데 UCC가 창출한 수용자의 일상과 놀이의 상품화는 공론장의 토대이자 자원인 생활세계(lifeworld) 의 상품화를 초래한다. 이는 낙관적인 기대와는 달리 인터넷 공간을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인터넷 대중화의 초기에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새롭고 긍정적 인 관계를 전망했다(강미은, 2001; 박선희, 2001). 사적 영역, 다시 말해서 생활세계의 건강한 문제제기가 인터넷을 통해서 공적 영역 속으로 진입하여 여론 형성에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개인의 명예퇴직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적 영역의 이슈가 공론장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오마이뉴스>의 기자가 되어서 글을 올리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회의 의제 설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존의 게이트키핑에 토대를 둔 언론 시스템 안에서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묵살되었던 많은 사안들이 공론장의 가시권에 들어오게 된다는 긍정적 평가를 낳았던 것이다(강미은, 2001).
그러나 UCC는 사적 영역의 사안을 공론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품화한다. 인터넷 같은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공간은 부정할 수 없는 21세기의 새로운 생활세계다. 그런데 이 생활세계가 체계의 논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 대한 진정한 신화의 하나는 그 공간이 수직적 권력 관계로 세워진 사회로부터 개인적인 정체성 선택에 토대를 둔 수평적 사회로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것이다(Mosco, 2004). 이러한 신화는 사이버 공간의 정치학에 관해 많은 것들을 감춘다. 따라서 이 점의 중요성을 정당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와 상품화 사이의 정치경제학적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스코(2004, pp. 155~156)는 디지털화가 일차적으로는 말‧이미지‧동영상‧ 사운드 등을 포함하여 커뮤니케이션을 공통의 언어로 전환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나아가 상품화 과정을 수반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나 시장가치(exchange or market value)로 전환하는 과정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디지털화는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보와 오락물의 상품을 확장시키는 데, 수용자의 시장을 확대하는 데, 커뮤니케이션의 생산‧분배‧교환과 관련된 노동의 상품화를 심화시키는 데 쓰였다. 신화적 관점에서 보면, 사이버 공간은 역사, 지리, 정치의 종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사이버 공간은 디지털화와 상품화의 상호 구성으로 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예전 어린이들이 하던 자치기는 생활세계의 놀이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체계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유희왕 카드놀이’는 철저하게 체계의 규칙을 따른다. 일본 애니메이션 <유희왕>의 상업적 성공은 애니메이션 그 자체가 아니라 관련 캐릭터 산업의 상업적 성공을 동반했다. 애니메이션 속의 등장인물들은 카드놀이를 통해서 승패를 가리는데, 그 카드는 어린이들이 즐겨 구매하는 매력적인 상품이 되었다. 게다가 예전의 딱지놀이와는 달리 유희왕 카드에는 다른 모든 패를 압도하여 놀이의 승패를 단번에 결정짓는 이른바 ‘신의 카드’라는 것이 있다. 그 특별한 카드는 낱개로도 판매되는데, 한 장의 가격이 몇 만 원에 이른다. 결국 놀이의 승패는 강력한 패를 구매할 경제적 능력, 즉 화폐라는 매체에 의한 체계 논리에 좌우되는 셈이다. UCC를 보면서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가 체계에 의해 식민화되는 과정이 확대되고 강화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UCC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과연 올바른지, 아니면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생활세계 자체의 구조변동을 가져오고 있는 것인지를 결론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헤겔(Hegel)이 《법철학》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지혜의 상징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비로소 날개를 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리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갈 수 없으며, 숨 가쁘게 전개되는 현실이 마무리될 무렵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과장된 UCC 지배 담론의 약속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을 것이며, UCC 신화의 양지만큼이나 그 그늘도 깊을 것이다. 그리고 일상과 놀이의 노동으로의 전환, 선물교환의 등가교환으로의 대체는 우리네 삶의 중요한 부분을 시장이란 이름의 공간에 가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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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남표 성균관대 언론학 박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강사, 성균관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동국대․성공회대 강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현 충남대․홍익대 강사
주요 저서 및 논문 : “방송통신 융합 시대의 정치경제학”, “시장개방과 수용자”, “미디어 융합 환경의 시장자유주의 비판” 등
출처 :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프로그램/텍스트 2007년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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