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미국 법무부 반독점 분과(Antitrust Division)는 연방통신위원회의 네트워크 중립성 폐지에 관한 논평을 발표하여, 브로드밴드 서비스 사업자들이 인터넷상의 정보 흐름에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가격 차별화 서비스를 구현하는 행위는 적절하다는 의견을 내놓아 치열한 논쟁이 예상된다. 그러는 와중에, 얼마 전 미국의 대중문화 공연 현장에서 지난 몇 해에 걸쳐 미국 신경제 디지털 문화산업의 근간을 좌지 하게 될 ''네트워크 중립성'' 논쟁을 되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 사건 자체 하나로만 현재 거대 미디어 재벌 지배구조에 대한 평가나 비판을 가하는 것이 섣부른 짓이라고 말 하지만, 하나의 사건을 지나침으로써 커다란 사회적 문제와 도전에 직면했던 상황을 정치‧경제‧문화 등등 사회 곳곳에서 보아왔던 점을 감안한다면, 아래에서 토론할 사건을 단순한 ''우발적인 기술적 사고''라고 만 폄하할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해석은 단순하게 네트워크 중립성 문제를 단일 사회적 논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그 포괄적인 정치경제적인 의미를 축소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에도 충분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함도 분명하다. 다른 한편, 보다 큰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이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아래에서 다룰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은, 현재 디지털 문화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인터넷의 근간이 대부분 거대 기업의 투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때, 어떻게 ''독립적인'' 디지털 문화 생산을 이끌어 갈지에 관한 문제이다. 대중문화 연구의 필독서 중 하나인 독일 철학자 호르크하이 머와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비판적으로 바라본 ''관료화되어 문화 생산에서 그 자율성의 의미를 박탈해 버린'' 현대의 초상업화된 문화산업은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록 밴드들 중 하나였다는 평가를 받는 ''펄잼(Pearl Jam)''이 얼마 전 8월 3일 미국 시카고에서 있었던 ''롤라팔루자 페스티벌(Lollapalooza festival)''에 초대되었다. 이 콘서트는 미국 최대 전화 및 통신 거대 기업인 ''에이티엔티(AT & T)''의 후원으로 웹 캐스팅되었다. 당시 콘서트에서 ''펄잼''의 리드보컬 에디 베더(Eddie Vedder)는 또 다른 유명 록 밴드 ''핑크플로이드''의 곡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부르고 있었다. 베더는 기존의 노래 가사 대신에 즉흥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새로운 가사를 붙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현 미국 대통령)조지 부시는 이 세계를 홀로 떠나야 한다(George Bush leave this world alone)"였다. 그러고 나서 계속된 노래의 끝자락에서 베더는 다시 새로운 가사를 붙였다: "조지 부시는 스스로 다른 집을 찾아야 한다(George Bush find yourself another home)."
콘서트 직후 웹 캐스팅을 통해 ''펄잼''의 음악을 시청했던 많은 팬들은 ''펄잼''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가사가 ''검열(censorship)''되었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베더가 새로 붙였던 가사는 모두 사운드가 제거된 채 영상만 보여졌다. ''펄잼''은 자신의 웹 사이트를 통해서, "이번 ''에이티엔티''의 행동은 어떤 기업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대중들이 무엇을 볼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데 해당 기업의 힘을 감지 하게 하며, 이는 대중들의 깊은 우려를 자아내는 것"이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아트 브로드스키(Art Brodsky)가 인용하고 있는 미국의 유명 네트워크 매거진 <와이어드(Wired)>에 따르면,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특히 대중문화가들의 조지 부시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정치적 발언과 관련하여 발생해 왔다는 점도 흥미로운(하지만 유쾌하지만은 않은) 사실이다.
물론 ''에이티엔티''는 이번 사건이 "심각한 기술적인 과오"라는 사과문을 발표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자유로운 문화 생산의 공간이라는 칭호를 줄기차게 부여해 온 것이 네트워크의 기간망을 이끌어 오고 있는 거대 미디어 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미디어 기업이 기술적 결함을 넘어서 문화 생산 과정 전반에 심각한 개입 수준을 만들 수 있다는 문제가 사회적인 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브로드스키는 비록 미국 연방통신위원회가 현재 네트워크 중립성에 관해 상당히 미온적이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견지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기업적 혹은 기업적 이해관계와 결합된 정치적 목적과 연결된 검열에 대한 어떠한 시도에도 단호해야 함을 사회적으로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로드스키가 논평하고 있는 <피시월드(PC World)> 매거진의 마크 설리번(Mark Sullivan)은, 이번 사건으로 네트워크 중립성 논쟁을 과장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네트워크 중립성의 문제는 정치적‧문화적 표현의 자유 문제와는 별개로서 미국 신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서비스 개선과 향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점이 바로 특히 최근 2년 동안 네트워크 중립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문화적 창조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이다. 네트워크 중립성이 근본적으로 이윤창출을 위한 소비자 서비스 방식에 근거하고 있는 현재의 인터넷 서비스에서 소비자들의 서비스 선택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콘텐츠에 대한 접근을 보호하는 장치라는 인식이 다시 한 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즉, 가격차별에 따라 인터넷 접속 서비스가 구별되지만,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의 시점 부터는 어느 소비자이든 네트워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다양한 콘텐츠에 점근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트워크 중립성의 철폐는 인터넷 서비스 소비자들에게 이러한 기본적인 의미를 박탈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기업이나 이와 연결된 정치적‧문화적 견해와 다른 사회적 의견에 대한 접근을 ''서비스 차별화라는 명목 아래''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 한다.
네트워크 중립성과 풀뿌리 디지털 문화 생산 네트워크
인터넷 공룡 ''구글(Google)''의 사장 에릭 슈미트(Eric Schmidt)는 8월 21일, 자사의 700메가헤르츠 브로드밴드 전파경매 참여를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인터넷의 미래에 관한 구글의 원칙들을 설명하였다. 슈미트는 구글은 분명하게 네트워크 중립성을 옹호하며 이것이 어떤 기업적 이해관계에 따른 거래의 대상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첫째,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며, 둘째, 보편적인 브로드밴드 접근을 촉진하며, 셋째, 네트워크 중립성을 보호하고, 넷째, 정부(의 인터넷 시장 개입에 대한) 투명성을 촉구한다고 슈미트는 밝혔다.
기본적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구글의 이러한 움직임에 환호를 보냈다. 특히, 슈미트는 현재 미국의 디지털 네트워크 산업이 거대 미디어 재벌의 전횡에 휘둘리고 있는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이티 엔티와 제2위 텔레컴 기업인 ''버라이즌(Verizon)''뿐만 아니라 케이블 산업의 듀오폴리(duopoly)를 구성 하고 있는 ''컴캐스트(Comcast)''와 ''타임워너(Time- warner)'' 등 굴지의 미국 미디어 재벌들로부터 매년 300만 달러를 후원받고 있는 ''진보와 자유 재단(Progress and Freedom Foundation)''의 ''씽크탱크''에 의해 미국의 미디어 산업이 친기업가적 환경만을 중시하는 토양으로 변질되었다고 슈미트는 주장 하였다. 구글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일까?
먼저, 슈미트가 1990년대 이후 시작한 미국 신경제에서 기업적 파워가 과대 성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디지털 정보 산업을 부가가치 생산의 원천으로 삼고 이에 따른 소비재와 서비스 산업의 개발에 주안점을 두었던 미국의 신경제 모델은 그 근본적인 효율성 향상을 위해 시장에서 기업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최소 정부 개입''의 원칙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1980년대부터 진행되어 온 미국 미디어 산업의 (그리고 미국 경제정책 전반에 걸친) 신자유주의화와 핵심적 맥락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그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근본원칙인 ''작은 정부''의 원칙을 위반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미디어 기업들은 미국 연방 통신위원회의 다양한 개입 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방안들을 찾았고, 그 주요한 통로는 미 의회였다. 미디어 산업을 포함하여 연간 2억 달러의 자금이 로비라는 명목으로 지출되고 있으며, 이로써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로비 산업과 더불어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미디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작은 정부가 아닌 ''큰 정부'' 혹은 ''강력한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슈미트가 지적 하는 것처럼, 기존 미디어 거대 기업들은 자신들의 시장 독점을 보호하기 위해, 미디어 산업에서 새로운 사업자들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터넷을 통한 콘텐츠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활용해 왔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거대 미디어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중립성 철폐의 핵심 논지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슈미트의 문제제기에서 ''문제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구글이 말하는 ''정부적 투명성''의 확보가 의미하는 바이다. 지난해 구글의 미 법무부의 테러 위험 조사와 관련한 이용자들의 서치 데이터 제출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런 점에서 구글의 정부적 투명성 요청은 이용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네트워크 중립성의 의미를 기업가적 이해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 자신의 기업 활동의 투명성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여기서 필자가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단지 기업재무제표나 노사관계,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기여 활동 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구글 서비스 이용자들의 정보를 활용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본지의 여러 호의 글에서 필자가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구글이 말하는 ''자유와 무료 서비스의 공간 으로서 인터넷''의 실현은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소비자들이 인터넷 서비스에 대해 보편적 접근을 얻는 방식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보를 이윤창출의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구글은 분명한 이슈로 다루기를 꺼린다. 구글(물론 구글만이 그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은 소비자 정보를 제공하기만 하면, 가령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공원에서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이것이 나아가 보편적 서비스의 기반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구글의 이러한 주장은 소비자 정보제공 활동이 정보 자체가 상품화와 이윤창출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소비자들로 하여금 미국의 신경제가 야기한 다양한 심각한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실리콘 밸리의 고소득 연구원들과 맥도널드 체인점의 시간제 근무 종사자들 사이의 간극으로 대표되는 서비스 산업 고용구조의 양극화와 불안정성 등 역시 신경제에 대한 비판가라면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더불어 구글의 비디오 서비스와 ''유투브''가 방송영상 문화산업에서 일반인들의 진입 폭을 넓혀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이용 되는 정보 상품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소비자 사생활 문제 등은 그리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문화 생산을 가능케 할 수 있을까? 나의 개인 신상 정보를 상품화의 수단으로 제공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심각한 논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피하고자 한다면, 특히 디지털 방송영상 네트워크가 그 주된 통로가 된 현 시점에서, 우리의 문화 생산은 어떤 쟁점을 안고 있는가? 물론 모든 문화생산이 디지털화되어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거치고 있거나 또는 거쳐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함이 아니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인터넷이 일반인들의 문화 생산을 위한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가장 낮고[최근 미국에서 이런 점에서 또 다른 매체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저주파(low- power)'' FM 라디오 방송이다], 수용 과정에서도 접근의 정도가 가장 ''대중적''이며(물론 여전히 미국 에서 넘버원 매체는 텔레비전이다) 그리고 가장 ''포괄적''이라는 것이다(음성, 영상, 텍스트 등 거의 모든 미디어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인터넷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구글의 사장 슈미트의 말을 활용하자면, 디지털 방송영상 문화 생산 역시 기업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실험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 문화 활동가들과 단체들을 위한 자금 확보와 활용에 관해 많은 저술을 해오고 있는 킴 클라인(Kim Klein)의 제안들을 살펴본다면, 몇 가지 흥미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클라인은 먼저 자신의 문화 활동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먼저, 주류(상업주의 혹은 고급) 문화 밖의 사람들의 문화적‧예술적 표현과 자신의 문화적 생산 활동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살펴야 하고, 그들의 문화적 표현 작업을 사회 전반의 문화적 다양성을 촉진시키는 계기로 활용해야 하며, 이것이 정치적 분석으로 나아가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클라인은 말한다. 이러한 대중적인 문화 생산 활동 내연에 대한 정의와 분석이 없다면, 정부로부터의 지원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기업적 인 이해관계와 충돌할 경우 등 문화 생산의 외연을 위한 다양한 사회적 연대의 틀에 맞게 대처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UCC'' 문화 생산을 위한 조건
최근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다양하고 굵직한 문화‧정치 행사들에서 풀뿌리 문화생산의 새로운 아이콘으로서 ''유시시(UCC)'' 문화혁명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실재 그 파급력이 미디어 기업 활동의 영향력 아래에만 놓여 있다면, 풀뿌리 문화 생산의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힘 있는 물질 자원을 활용하는 초상업적인 미디어 환경에 맞서 미국의 풀뿌리 디지털 문화 생산가들은 거대 자본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개발하기 위한 실험에 있다.
대안적인 문화 생산 통로의 계발은 언제나 대중주의와 상업주의의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 주의를 만들어내는 문화산업의 생산물들을 마주 대할 기회가 없어진다면 그것은 더욱더 비극이다. 그 비극은 초상업 문화를 즐기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비극이 아니라, 대안적인 문화 생산이 그 실험성과 도전성을 평가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비극이다. 이로부터 미국의 풀뿌리 문화 생산자들이 바라는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현재 자신들의 문화가 얼마나 큰 문화적‧물질적 파워 앞에 놓여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 참고 - Eliot Van Buskirk, "Has AT&T Censored Artists Before?" August 10, 2007, http://blog.wired.com/music/2007/08/has-att-censore.html - Art Brodsky, "Pearl Jam''s Brick In The Wall", August 10, 2007, http://www.publicknowledge.org/node/1162 - US Department of Justice, "Department of Justice Comments on ''Network Neutrality'' in 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Proceed- ing", September 6, 2007, http://www.usdoj.gov/opa/pr/2007/September/07_at_682.html - Kim Klein(2000), "Raising Money for Progressive Arts and Culture Organizations", , 1-2, http://www.namac.org/docs_upload/RMM_arts.pdf - The Save The Internet.com, "Google''s call to Action: Net Neutrality, Free Speech, and Universal Access", http://www.savetheinternet.com/blog/2007/08/23/googles-call-to-action- net-neutrality-free-speech-and-universal-access/ - Mark Sullivan, "AT & T Censors Pearl Jam: Nothing to do with Net Neutrality", August 9, 2007, http://blogs.pcworld.com/staffblog/archives/005124.html
● 작성 : 성민규(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스터디즈학과 박사과정, MinkyuSung@gmail.com)
출처 :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동향과분석 2007년 제14호(통권 2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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