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조립식 가족>은 혈연이나 법적 관계를 넘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다루며, 상처받은 청춘들이 서로를 보듬고 성장하는 모습을 따뜻하게 그린다. 각자의 상처를 가진 세 아이와 그들을 품은 아빠 윤정재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며 만들어가는 관계를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글. 김교석(칼럼니스트)
칼국수집 가족의 사연
[그림 1,2] <조립식 가족> (자료: JTBC)
작은 마을,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소박한 마을의 한 칼국수집에 사연이 좀 있다. 사별하고 시골마을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하는 윤정재(최원영)는 씩씩하고 귀여운 딸 주원(정채연)과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윗집에 주원과 한 살 터울인 김산하(황인엽)의 가족이 이사를 왔다. 반갑게 건넨 인사는 화근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 집은 얼마 전 비극을 겪었다. 부모가 없는 사이 막내딸이 호두를 먹다 질식사했고, 이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아무 연고 없는 시골마을에 이사를 온 터였다. 하지만 산하의 엄마 정희(김혜은)는 나아지지 못했다. 당시 여덟 살이던 산하를 의심하며 심리적으로 학대하다 급기야 눈앞에서 버리고 떠났다. 이사 온 날부터 엄마의 눈치를 보며 끼니조차 스스로 대충 해결해야 했던 산하를 정재는 데려와 밥을 먹이기 시작했다. 정희가 떠난 이후 생활이 불규칙한 경찰인 산하 아빠 대욱(최무성)과 산하의 식사를 책임지는 친구이자 가족이 됐다.
어려서부터 해맑고 붙임성 좋은 강해준(배현성)은 원래 정재와 맞선을 본 강서현(백은혜)의 아들이었다. 주원만 반대하는 좋은 분위기 속에서 두 가족은 행복한 시간을 가졌지만 맞선 이후 연락을 끊었던 서현은 어느 날 급하게 돈을 꾸고 다시 잠적했다. 해준은 “돈 벌면 데리러 온다”는 엄마의 한마디 기약 없는 약속과 함께 당시 취업준비생이던 이모의 자취방에 급하게 맡겨졌다. 어느 날 해준을 보러 간 정재는 방치되듯 지내는 그를 보자마자 데려와 키우기로 결심한다. 오빠는 갖고 싶지만 새엄마는 싫었던 주원에게 이런 사연으로 오빠가 두 명이나 생겼다. 한 지붕 두 가구, 한 가족의 식구는 그렇게 함께 10년을 보냈다.
극의 중심을 이루는 삼남매는 함께할 때 가장 충만하다. 각자의 사유로 모성애의 상실을 겪은 세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하나면 마음이 풀리는 주원을 중심으로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다. “불쌍한 척 해도 소용없어. 딴 데 가서해. 우리한테 안 통하니까”라는 주원의 말은 매정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처와 불행을 담담히 인정하고 마주할 줄 아는 건강함을 잘 드러낸다. 어쩌다 한 번씩 엄마가 버린 아이들이라는 자기연민과 그 안에서 우열을 다투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고 이를 누구보다 해결해주고픈 사람들이다.
청춘 코드 속 가족
JTBC <조립식 가족>을 보면 30년 전 드라마 <느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매력적인 대학생 삼형제가 사는 집에 엄마의 친구 딸이 들어와 가족처럼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디테일한 설정이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조립식 가족>과 다르지만, 남매로(처럼) 자란 이들이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설정의 원조 격인 드라마다. 손지창, 김민종, 이정재, 류시원, 이본, 우희진 등 당대 X세대를 대변한 캐스팅은 황인엽, 정채연, 배현성 등 20대 라이징 스타들로 채운 라인업의 패기로 견줄만하고, 미대 오빠, 수재 오빠, 체대 오빠와 개성 만점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로망 가득한 대학 생활은, 교내 최고 인기남들인 수재 오빠 김산하와 농구부 에이스 강해준과 함께 사는, 밝고도 맑은, 자기 혼자 예쁜 줄 모르는 하이틴 로맨스타입의 여주인공 판타지로 갈음한다. 그 외에도 여름의 바닷가, 교정 등등 청춘의 시절과 첫사랑의 풋풋함을 담은 ‘트렌디한’ 소재와 장면들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바닷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펼쳐지는 성장의 시간과 농구라는 소재는 90년대를 풍미한 <슬램덩크>를 생각나게 한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드넓은 세계, 푸르른 청춘의 꿈과 열정, 모든 것을 다 감싸 안아줄 것 같은 바다 풍경이 계속해서 세 청춘 앞에 펼쳐진다. 물론 그 자체로도 싱그러운 그림이지만, 한편으론 아련하게 다가온다.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에 증식하는 청춘의 에너지는 너무나 뜨겁고 아무리 찬란한 순간도 파도처럼 지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조립식 가족>이 언급한 두 콘텐츠처럼 청춘의 간질간질한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매력적인 배우들이 펼쳐내는 귀엽고 사랑스런 2024년 버전의 ‘트렌디’ 드라마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무게 중심이 일반적인 청춘물과 사뭇 다르다. 총 16부작 중 9화까지 멜로 코드가 본격적으로 발동되지 않는다. 예상한 삼각관계와도 다르다. 발랄하고 청초하고 코믹한 청춘 로맨스의 여러 클리셰 위에서 어느 순간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오는 ‘정상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세 청춘을 응원하고 사랑하게 되는 건 청춘물 특유의 풋풋하고 설레는 러브라인과 함께 이들이 쌓아온 따뜻한 가족 이야기와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개인으로 성장해나가는 순간들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르적으로나, 인물간의 관계나,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서사 방식이 서로 다른 두 가지가 결합해 다음 모습으로 나아가는 ‘조립식’이다. 중국 후난위성TV 드라마 〈이가인지명〉의 스토리라인에 충실하면서도, 해외 원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네 청춘의 정서와 생활 문화상 또한 잘 결합되어 있다.
가족의 구심점이 된 아빠
[그림 3,4] <조립식 가족> (자료: JTBC)
그런 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이 가족의 구심점인 아빠 정재다. 정재를 중심으로 모여든 인물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순수하고 무해한 가족의 이야기를 쌓아간다. 아빠 역할을 함께 맡은 정재와 대욱은 친구 관계로도 한 가족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남녀관계나 연인관계가 아니다 뿐이지, 살림과 생활비라는 영역을 분담하고, 반찬투정, 늦은 귀가와 잦은 술자리에 대한 잔소리, 아이들의 앞날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 등은 영락없는 부부다. 각자의 상처와 상황을 가진 이들이 함께하면서 이뤄내는 안온함은 우리가 가족이란 단어에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점에서 결합의 묘미가 있다.
<느낌>을 비롯해 여타 청춘물에서는 존재감이 없거나 옅기 마련인 부모의 존재가 이 드라마에서는 아름드리나무의 뿌리와 같이 굳건하다. 한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이 자상하고 다정한 아빠라는 설정도 신선하다. 10년간 키워준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해준에게 “어떤 부모가 자식을 키워줘. 키우는 거지.”라며 내본 적 없는 큰 역정을 내는 등 진정으로 행동하지 않은 적이 없고, 계산하는 법은 더더욱 없다.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품어주는 고향처럼, 굳건하고 안온한 가족이 모여살 수 있는 든든한 지붕이 되어준다. 이상적인 가족의 역할과 모습을 대변하는 정재의 캐릭터는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언제나 한결같이 너르고 어질고 따뜻하다. 해준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내어주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다.
가족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다
[그림 5] <조립식 가족> (자료: JTBC)
자기가 버리고 떠난 자식에게 어느 순간 나타나 책임감을 강요하는 산하의 엄마, 이복동생을 위해 자신의 10년을 포기한 산하, 자기의 필요로 인해 친권을 주장하다 필요가 없어지자 다시 돌아선 해준의 생부(이종혁). 어찌 보면 남에게 조카를 맡겨놓고, 그 신세를 꼭 갚으라는 말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모 등등 혈연의 부정적인 사례들이나,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 연인으로 발전한 ‘피 안 섞인’ 남매의 멜로 라인을 둘러싸고도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메시지는 계속 이어진다.
정재가 가족의 울타리를 만들었다면, 그의 딸 주원은 이를 다지고 넓히는 역할이다. 가족 간의 오해나 속상함은 특유의 해맑음으로 풀어주고, 어긋난 마음을 이어주는 가교가 된다. 너무 사랑해서 나타날 수 없었던 해준의 엄마를 진정성 있게 설득하고, 함께하면서 아들을 갉아먹던 산하 엄마의 가스라이팅을 끊어낸다. 그렇게 불편함을 덮어두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고, 나서서 해결해 나가면서 한 걸음씩 성장한다. 그러면서 혈연이나 어떤 제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고 이롭게 하는 가족이 되기 위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가족 구성원의 행복을 가꿔나간다.
그리고 이런 장면, 에피소드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반복적으로 되묻는다. “서류상 가족이 뭐가 중요해요? 서로 가족이라 생각하면 가족이지. 그걸 뭐 꼭 종이쪼가리로 확인받아야 해요? 이게 다 같은 쌀 먹고 만든 살이고, 뼈거든요!…어디까지가 가족인데요? 사촌까지? 피 섞였으니까? 그럼 재혼해서 새로 생긴 형제는요? 입양아면요? 이래저래 피 안 섞인 가족들도 많잖아요.”
그런가 하면 등장인물 중 가장 현실에서 봄직한 캐릭터는 주원의 고등학교 시절 반장이자 단짝 친구이면서, 해준을 짝사랑했던 모범생 박달(서지혜)의 엄마다. 흔히 말하는 헬리콥터맘으로 학교와 학원 라이딩은 기본이며, 입시 컨설팅에서 결혼까지 이어지는 자녀의 인생을 꽉 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전교 1등 선배와 딸이 친해질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자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무안을 줄 정도로 딸을 소유물로 여긴다. 이를 지켜본 삼남매는 박달을 위로하기 위해 바닷가로 데려가고, 산하는 “내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보면 고통이 덜할 거라 조언한다.
가족생활의 현실 판타지
이처럼 이 색다른 가족은 혈연도 법적 관계도 아니지만 그 어떤 가족보다도 안온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립식 가족>은 흥미롭게도 기존 가족의 대안으로 유사가족 판타지를 내놓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과 판타지를 결합한다. 연애나 혈연과의 만남과 같은 기존 가족의 구성 요소나, 변화를 가족 구성의 한 요소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블록 장난감처럼 그 모양이 달라질 수도, 나아가 확장할 수도 있다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주원은 해준에게 다시 엄마를 만났으니 엄마와 살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묻는다. 상실이나 배신의 감정이 아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를 부정하거나 가족의 규격을 배타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역시나 마주한다.
가족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유사가족 판타지 위에 풋풋한 청춘들의 설렘이 번져나가면서 정은 더욱 깊어지고, 판타지의 순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 드라마에 쏟아지는 열렬한 공감과 애정은 바로 이런 ‘가족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청춘들이 스스로 찾아내고, 나아가는 청춘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데 있다. 로맨틱코미디의 가볍고 경쾌한 터치 아래로, 상실한 모성애라는 상처와 설레는 청춘의 러브라인이 결합해 감정적으로 큰 진폭을 만든다. 내 곁을 지켜주고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아스라하고 때로는 마음 아린 풋풋한 청춘의 한 시절에 만나는 가족 이야기는 러브라인만큼이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청춘물은 언제나 한때를 다룬다. 하지만, 가족 이야기와 결합한 이 드라마에는 한 시절이 지나고서도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함께 있을 때 행복과 위로와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건네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 김교석 (칼럼니스트)
- TV콘텐츠 및 대중문화 관련 칼럼니스트로 2007년부터 지금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엔터미디어 등 다수의 매체에 기고 하고 있다. 백상예술대상, 한국방송대상, 서울드라마어워즈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