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Wave

라디오, 시간을 선사하다

장수연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PD 인터뷰



디지털 콘텐츠와 플랫폼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매체, 특히 라디오는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손쉽게 접근 가능한 영상과 소셜미디어가 대세로 자리 잡은 시대에, ‘귀로 듣는 매체’ 라디오는 과연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인 시점이다. 그러나 라디오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여전히 청취자와 깊은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 소리가 지닌 정서적 친밀감과 매일 반복되는 방송을 통해 청취자의 일상에 스며드는 라디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독특한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이 최근 청취율 조사에서 역대 최고 청취율을 기록했다. 이 성과는 단순히 숫자로 평가될 문제가 아닌, 균형 잡힌 시사 정보를 제공하며 공영방송의 본질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는 데서 라디오 매체의 가능성과 가치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어내고 있다.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장수연 PD를 만나 라디오가 위기 속에서도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매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또한 라디오와 공영방송이 디지털 시대 속에서 어떤 정체성을 지켜가야 할지, 또 어떻게 청취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 가치를 확장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김종배의 시선집중>이 역대 최고 성적의 청취율을 기록했다. 소감을 듣고 싶다.

사실 <김종배의 시선집중>을 맡게 된 지는 1달이 채 안됐다. 그래서 이번 청취율은 사실 내가 이룬 것은 아니다. 청취율 조사는 3개월에 1번씩 이루어지는데, 8번 연속 상승의 의미는 2년 동안 단 한번도 청취율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례적이고 특이한 기록이다. 앞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피디들과 김종배 진행자, 세 분의 작가들이 이룬 역사를 이어받은 것이라 부담이 크다. 바뀐 것은 나 하나인데(웃음), 만약 청취율이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배경 설명을 하자면, 손석희 전 앵커가 초대 진행자로 프로그램을 맡던 시절 <시선집중>은 알다시피 아주 높은 청취율을 자랑했다. 손 앵커가 프로그램을 떠나고 꽤 오래 청취율이 저조하다가 최저점일 때 김종배 진행자가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최근 2년 동안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상승해서, 이제는 손석희 진행자 시절의 청취율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래서 이 기록이 더욱 의미가 깊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피디는 이어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6개월 또는 1년 반 단위로 계속 교체되기 때문에, 앞서 온 피디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정말 기쁘고 뿌듯하다.

<김종배의 시선집중>의 시그니처 코너 JB TIMES, 김종배 진행자와 막내작가의 대화가 유쾌하다.

김종배 DJ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코너라고 생각한다. 처음 이 코너를 기획한 PD가 정말 훌륭한 것 같다. 김종배 진행자는 정말 다방면에서 뛰어난 진행자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능력과 저널리스트로서의 전문성이 탁월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매력을 느끼기 위해서는 ’진행능력‘ 외에 다른 면모가 필요하다. 친구 사이에서도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듯이 말이다.

김종배라는 진지한 저널리스트를 어떻게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그 답은 그를 적당히 흔들어주는 존재였을 거다. 그래서 약간은 건방지고 발칙한 막내 작가 캐릭터를 설정한 점이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 막내 작가의 존재 덕분에 김종배 진행자는 인터뷰에서는 날카로운 모습일지라도,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인간적인 입체적인 진행자로의 매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고 본다.

PD님이 쓴 글을 보면 라디오 PD라는 직업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장르가 아닌 라디오 PD를 꿈꾼 이유가 있다면?

내가 옛날 사람이기 때문이다.(웃음) 학창 시절에 라디오를 굉장히 많이 들었다. 여러 가지 매체 중의 하나로 라디오를 접한 것이 아니라, 학창 시절 문화적 소양이나 정보 등을 얻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라디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래서 꼭 라디오 PD가 아니더라도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동경이 있었다. 그렇게 신문방송학과에 가게 됐고, 라디오 PD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직업이 가진 가능성이나 실익보다도 단순히 동경과 낭만적인 마음으로 선택하는 MBTI ‘F성향’인 사람들이 있다. 내가 바로 극F인 사람이어서(웃음), 그냥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선택하게 된 직업이다.

라디오는 다른 영상 매체와 비교해서 마니아층이 탄탄한 매체인 것 같다. PD의 입장에서 라디오만이 가진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청취자가 마치 라디오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직접 말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라디오에 출연해서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 유명한 사람들이다. TV에서 그들이 똑같은 말을 해도 시청자는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사적인 공감대를 갖지는 않지만 라디오를 통하면 청취자는 그들을 친숙하고 특별한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팬심과는 다른, 마치 잘 아는 친구 같은 감정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DJ를 섭외할 때 “당신의 편이 생길 것이다. 이건 기존 팬덤과는 다른 새로운 응원군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실제로 ‘비호감’ 이미지를 가졌던 연예인이 라디오 DJ를 하면서 이미지를 변화시킨 경우가 꽤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매일 방송을 하는 라디오의 특성 때문일 거다. 청취자들은 매일 DJ와 만나면서 그의 내면을 더 잘 알게 되고,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된다.

또 라디오의 매력은 ‘수용자에게 시간을 주는 매체’라는 것이다. 라디오 PD로서 굉장히 뿌듯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OTT, SNS, 어떤 매체든 그 목표는 이용자의 시간을 점유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사업이 성공 하는 거다. 하지만 오디오 매체는 ‘듣기’와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실제로 설거지나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그래서 라디오는 시간을 선사해주는 매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매체 시대에 오디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무기이다.

‘보이는 라디오’, ‘유튜브 스트리밍’ 등 라디오도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미디어 환경이 디지털화되면서 라디오 PD의 역할에도 변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에 대한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다면?

일상에서 유튜브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유튜브에서 정보를 찾지 못하면 마치 그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라디오 PD들도 유튜브에서 콘텐츠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며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 내가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TV 보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 자막 제작, 자료 화면 편집, 클립 업로드, 썸네일 제작 등 디지털 플랫폼에 맞춘 새로운 업무가 라디오 PD의 역할로 포함되었다. 이 과정에서 ‘썸네일’과 같은 디테일이 아이템 선정만큼 중요해진 현실은 매체 변화의 속도를 실감케 한다.

정말 어렵다. 단순히 업무량 증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업무를 학습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전적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앞 세대 선배들도 다른 방식의 변화를 겪었다. 엽서에서 팩스로, 실시간 문자메시지나 라디오앱으로, 청취자 사연을 받는 방법은 계속 바뀌었다. 이전에 비해 즉각적으로 반응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세대의 피디들에게는 낯선 일이었을 거다. 결국, 방송업계에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 않을까.

지난 여름 <故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 방송>을 통해 AI로 복원한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업계에서도 크게 관심을 받고 있는데 기획의도와 소회가 궁금하다.

정말 긴 시간이었고, 믾은 노력이 들어간 작업이었다. 처음부터 AI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고, 올해가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20주기라는 사실이 계기가 됐다. 故정은임 아나운서는 90-00년대에 라디오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겐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너무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 채 허망하게 떠난 DJ였다. 올해가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20주기라는 사실을 처음 알려주신 건 김세윤 작가님이었다. 의 현재 진행자이자 故정은임 아나운서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분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이 잊혀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김세윤 작가님과 함께 특집의 방향과 구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AI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송명석 CP님의 제안이었다. MBC 라디오가 아직 AI를 활용한 프로젝트를 시도한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故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이 당시의 다른 방송과 달리 전량 보존되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90년대는 릴테이프로 방송을 제작하던 시기였는데, 테이프의 가격이 고가여서 보통은 덮어쓰기를 반복하며 제작하곤 했다. 덕분에 당시의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아버님께서 모든 방송을 카세트 테이프로 매일 녹음해두셨고, 이를 전해 받은 IT업계에 계신 애청자 한 분이 2년 넘게 일일이 MP3로 변환해 팟캐스트에 업로드를 해둔 덕분에 자료가 남아 있는 거다.

오래전 그녀의 방송을 반복해서 들어왔던 청취자들에게 MBC 라디오가 새로운 방송을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AI로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구현해서 2024년의 그녀가 새롭게 방송을 진행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상상하며 특집 방송을 만든 것이다.

물론 작업은 매우 세심하게 진행됐다. 자칫하면 추억을 훼손하거나 청취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복원된 목소리의 유사성은 기본이었고, 기억 속 인물의 어투와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1인칭 표현은 최대한 배제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영화를 소개하면 좋을까 고민을 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잠깐 만나서 목소리만으로 교감을 하는 내용의 <그녀(Her)>라는 영화를 선정했다. 오랜 시간 많은 고민을 거쳐 완성한 프로젝트였다.

연출했던 프로그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최근에 맡았던 가수 이석훈 씨의 <브런치 카페(MBC FM4U)>이다. 오전 시간대 방송을 듣는 주 청취자층이 아이 엄마일수 있다고 생각해 이석훈 씨의 다정한 아빠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육아 관련 코너를 구성했던 경험이 기억에 남는다. 제작진, 진행자 그리고 청취층이 연령대도 비슷하고, 아이를 키운다는 공감대가 있어서 더 특별했다. 나와 비슷한 청취자를 상상하며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라디오는 소소한 일상 속에 스며들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매체이지 않나. 프로그램을 통해 ‘아빠 육아’라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하면서 아이와 함께하는 세상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뿌듯했다.

본업 외에도 작가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에너지가 넘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갈돼서 글을 쓰는 것에 가깝다. 본업을 하다보면 에너지가 소진되게 마련이다. 본업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요구도 있다 보니 나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에게는 글을 쓰는 일이었다. 첫 책을 쓸 때 ‘글이 마려웠다’고 표현을 했는데, 정말 솔직한 심정이었다.(웃음) 글을 쓰는 시간은 나를 위한 순수한 시간이고, 다른 요구 없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 너무 소중했다. 잠이 부족해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분명 거기서 차오르는 에너지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채워지는 기쁨을 느꼈다.

PD님에게 ‘라디오’는 어떤 존재인가?

십여 년간 청취자로, 또 16년간 제작자로 라디오와 함께해왔다. 내가 쓴 책 제목처럼 ‘사랑하는 지겨움’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때로는 깊은 애정을 느끼고, 때로는 지겨움을 느낀다. 오랫동안 같이 지내는 모든 관계가 사실 그런 것 같다. 부부든 가족이든 부모님이든 그런 면이 있는데, 라디오가 나에게는 그런 영역이지 않을까. 결국 오래된 관계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장수연 (MBC 라디오 PD)
MBC의 라디오PD. MBC 라디오 〈꿈꾸는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 〈이석훈의 브런치카페〉, 〈라디오 북클럽 김소영입니다〉 등을 거쳐 현재 <김종배의 시선집중>을 연출하고 있다. 엄마로서의 이야기로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를, 라디오PD로서의 이야기로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을 썼다.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에는 콘텐츠 제작자들의 창작 비하인드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