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소비 패턴의 변화로 인해 미디어 기업들은 시간, 공간, 자원을 고려한 전략적 편성이 중요해졌으며, 이를 통해 시청자의 다양한 플랫폼 접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미래 미디어 경쟁력은 이러한 편성의 고도화와 효율적 자원 활용에 달려 있다.
‘편성’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전 신문 지면에서 접하던 편성표를, 또 일부는 TV를 켰을 때 뜨는 화면 메뉴의 프로그램 방송 시간대를 보여주는 전자 프로그램 가이드(Electronic Program Guide; 이하 EPG)를 떠올릴 것이다. 신문 지면에서 편성표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전이고 EPG 역시 전 시간대의 채널별 프로그램 배치를 ‘온전히’ 보여주는 편성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튜브나 OTT 등이 동영상 콘텐츠 시청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하고 TV 실시간 시청이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편성표는 접하기도 쉽지 않고, 이를 찾아보는 사람은 더 드물다. 그럼에도 ‘편성’이라는 용어는 미디어 현장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사용되며 용어에 담긴 의미와 범주는 예전보다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편성이라는 용어의 쓰임새를 따라가다 보면 현재 미디어 산업 현장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앞으로 콘텐츠 미디어 영역의 변화까지 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플랫폼 미디어 환경의 도래와 TV 편성 변화
지상파를 비롯한 TV 방송 영역에서는 시청자 일상의 흐름과 TV의 흐름의 상관성을 높임으로써 시청자들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구조화시키고 또 예측하는 행위를 가르켜 ‘편성’이라고 불러왔다. 당시 방송사업자가 TV 방송 플랫폼 상에서 운용해야 할 변수는 바로 ‘시간’이었다. 특유의 형식과 장르의 모습을 띤 프로그램들을 시간대를 기준 삼아 배열하고 이를 구조화시킬 수 있다면 시청자 일상의 흐름 예측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수익 창출 역시 시청자의 심리적 저항이 최소화되는 지점(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광고를 배치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능했다. 이러한 시간 변수의 운용은 개편, 주간 단위의 프로그램 편성과 일간 단위의 프로그램 시간대 조정을 의미하는 가장 좁은 의미의 편성, SB(Station Break)의 관리를 의미하는 운행 행위로 구체화되었고, 귀에 익은 줄띠 편성, 장기판 편성, 구획 편성, 텐트폴링 편성은 시간 변수의 활용을 통해 TV 시청패턴을 유지시키고 견인하기 위한 기법들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미디어 이용방식의 변화는 기존의 ‘시간’에 ‘공간’을 중요한 변수로 등장시켰고 이 변인들의 접합은 혼직(混織)의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TV가 방송의 전부이던 시기에도 공간은 미디어 활용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TV가 위치한 공간이 집으로 제한되어 있어 ‘변수’로서의 의미가 최소화되었을 뿐, ‘TV와 일체화된’ 집은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와 일상의 틀을 공고히 해주는 틀이자 공간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미디어 기업은 편성이라는 전략적 의사결정행위에서 ‘공간’ 변인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프로그램 내용에 있어서 고려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다중적 미디어 이용의 확산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교직(交織) 혹은 혼직(混織)은, 영상 콘텐츠 이용의 양적 변화 정도가 아닌, 영상 정보나 콘텐츠 소비 방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다양한 플랫폼과 이들이 구축해내는 네트워크는 미디어 기업에서 중요하게 고려하고 다루어야 할 공간의 장치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콘텐츠 소비 트렌드의 변화
동영상 콘텐츠에 대한 이용자의 인식과 소비 방식의 실질적 변화는 미디어 기업들의 전략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이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접점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평소 동영상 콘텐츠 시청을 위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기기는 스마트폰(65%)이며, TV는 27%로 스마트폰의 절반가량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한국리서치, 2024). 이는 비단 30대 이하 젊은 층에 국한된 특징이 아니라 전 연령대에서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18-29세의 경우 스마트폰이 83%, TV가 7%로 스마트폰과 TV의 격차가 한층 커지지만, 60대 이상에서도 동영상 콘텐츠의 시청을 위해 스마트폰을 이용한다는 응답률은 59%에 달해 40대(63%)나 50대(60%)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동영상 콘텐츠 시청 기기
[그림 1] 가장 많이 이용가는 기기
[그림 2] 연령대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시청기기(1순위)
또 동영상 콘텐츠 시청방식에 있어서도 유튜브를 비롯한 무료 온라인 동영상 시청비율(84%)이 TV방송 시청방식(60%) 선택 비율을 크게 앞질렀고, 유료 OTT 서비스를 통한 시청은 56%로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특히 유튜브 등 무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이용비율은 연령대별 차이가 크지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도 18-29세는 TV방송채널을 통한 동영상 콘텐츠 시청비율(37%)이 유튜브 등 무료 온라인동영상 서비스나 OTT 등 유료 온라인동영상 서비스 이용에 비해 크게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영상 콘텐츠 시청방식
[그림 3] 동영상 콘텐츠 시청방식
이처럼 이용자가 가용할 수 있는 미디어와 플랫폼의 확장은 단순한 양적 변화를 넘어 이용자들이 지금 점유하고 있는 현실의 공간은 물론 플랫폼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공간에도 동시에 머물 수 있으며, 플랫폼이라는 물적 장치를 다중적으로 접속하여 여러 겹의 공간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 또한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여러 플랫폼과 미디어가 펼쳐내는 공간의 확장과 중첩은 이미 현실이 되어 이용자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시간의 구속에서도 자유로워짐을 의미하는데, 미디어 기업으로서는 넓어지고 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운용하고 확장되는 시간과 공간에서 어떻게 사업 영역을 재설정하여 이용자에 효율적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집중하고 핵심 과제로 올릴 수밖에 없다.
미디어기업 경쟁력과 시간/공간/자원 변수의 활용 그리고 편성
이쯤에서 ‘편성’ 개념의 요체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편성은 무엇보다 콘텐츠와 관련된 행위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콘텐츠와 관련한 모든 행위에 있어서 활용 가능한 변수들의 조합을 통해 최대의 효과와 수익을 창출하려는 미디어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행위가 바로 ‘편성’이다. 이러한 편성 행위를 통해 방송사업자를 비롯해 모든 미디어 기업은 자신들의 지향과 가치를 이용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이를 통해 경쟁자 대비 비교 우위를 확보한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편성 행위는 어떻게 세부적으로 구성되며 이를 구체화시키는 대상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는 콘텐츠 창작 전후에 걸쳐진 단계별 (조직 내외부의) 협의체들의 의사결정이며, 해당 콘텐츠에 최적화된 플랫폼의 결정, 이를 중심으로 한 해당 콘텐츠의 플랫폼 레퍼토리 구축, 그리고 최적화 과정을 거친 콘텐츠의 (이용자) 제공, 이용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에까지 그 범주는 확장된다. 최우선적으로 어떤 시간과 공간적 접합 ‘시점이자 지점’에서 콘텐츠를 이용자에게 노출시킬 것인가라는 플랫폼 전략 없이 이루어지는 콘텐츠 제작은 이제 상상하기 어려우며, 콘텐츠라는 레버리지를 전략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플랫폼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미디어 기업이라면 콘텐츠 관련 행위인 ‘편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의 확장과 함께 편성의 영역 역시 넓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편, 편성 행위는 시간과 공간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조합에 대한 상상을 필요로 하고 이를 현실화시키지만 이 구상은 미디어 기업의 보유 자원(resources)의 제한을 받는다. 재원, 인력, IP(intellectual propoerty) 등 경쟁력 있는 각종 자원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으며 외부의 자원에 대한 접근 가능성과 수월성에 따라 미디어 기업의 편성 영역과 대상의 경계는 달라진다. 편성의 전 과정은 기업의 예산 및 재무 상황에 대한 고려와 판단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음 그림은 미디어 기업들이 시간, 공간, 그리고 보유 자원 등 주요 변인들을 어떻게 조합하는가에 따라 사업 영역이 어떻게 획정되고 사업 내용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원이라는 축은 서로 다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TV 실시간 편성만 존재하던 시절보다 새로운 구조적 틀을 만들어낸다. 이 구조 속에는 서로 다른 시간 x 공간 x 자원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구조적 영역을 미디어기업은 자신들의 사업영역으로 만들어간다.
편성의 주요 변수와 영역
[그림 4] 자료(필자제공)
이러한 변화는 방송사업자 내부의 업무 내용과 프로세스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채널 이미지와 재무 성과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드라마의 기획과 선정은 제작본부만이 아닌 전사적 협의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실시간/비실시간 편성, 유통을 비롯한 미디어 플랫폼 전략, 수익성을 판단하는 예산·재무 전략 담당자들의 긴밀한 협의 속에서 다양한 가상의 실험을 거쳐 결정은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해당 콘텐츠만이 아니라 다른 콘텐츠와의 관계(전체 라인업, 복수 콘텐츠의 패키지 가능성, 비용과 인력의 안배)에 대한 의사결정 역시 중요한 부분이 된다. 제작비 규모 증가와 제작비 투자/배급으로 인한 손익 구조 관리가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당연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줄띠편성이나 변칙편성과 같은 편성 기법에서 자유로워지면서 훨씬 다양한 변수의 조합을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이 편성의 주요 영역이자 기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편 방송사업자들은 조직의 구조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우선 각 미디어 기업에서 편성을 담당하는 조직의 이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KBS, MBC, SBS가 내놓은 최근 조직도를 살펴보면 기존 ‘편성’을 담당하던 조직명이나 하위 조직명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각 사업자가 편성이라는 의사결정행위를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는가를 보여준다. 또 기존의 편성 영역은 어떤 직군과 영역이 근거리에 놓여(실제 업무공간으로도) 연결성을 높이는지를 통해 편성행위는 각 조직에서 어떻게 확장하고 진화하는지도 알 수 있다.
KBS
[그림 5] KBS 조직도 (자료: KBS, 2024.)KBS는 편성본부라는 명칭을 유지하고 ‘멀티플랫폼’이라는 표현을 편성 기능을 담당하는 하위 조직명으로 쓰고 있다.
MBC
[그림 6] MBC 조직도 (자료: MBC, 2024.)MBC는 ‘콘텐츠사업본부’ 내에 콘텐츠전략국(舊 편성국), 미디어전략사업국, 마케팅솔루션국 등을 함께 두어 콘텐츠와 미디어 전략 협업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SBS
[그림 7] SBS 조직도 (자료: SBS, 2024.)SBS는 편성실, 편성국의 체제 안에 콘텐츠전략, 편성, 브랜드디자인의 3개 팀을 두고 있다.
앞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원의 압력을 견디며 나아가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고 활용해내는 ‘편성’의 고도화에 따라 미디어 기업의 경쟁력은 판가름날 것이다.
참고자료
- 한국리서치, 동영상 콘텐츠 이용행태 및 인식: 세대별 비교를 중심으로, 2024https://hrcopinion.co.kr/archives/29053
- Eastman, S. & Ferguson, D. Media Programming: Strategies and Practices 9th Edition. Boston, MA: Wadsworth, 2013
- 김유정 (MBC 전문위원)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MBC 전문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미디어 이용, 편성 및 콘텐츠 전략, 방송법·정책 연구를 진행하고 있음, 저서로는 『미디어와 공동체』(공저), 『방송의 진화』(공저), 『뉴스를 묻다』(역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