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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point 3

불의에 맞서는 순수한 힘
<힘쎈여자 강남순>

조성경(칼럼니스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 영웅들은 타고난 능력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불의에 맞선다. 2023년 가을 우리 앞에 나타난 ‘강남순’은 모계 유전된 괴력을 마약 범죄 소탕에 활용하는 남다른 기개를 가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사랑스럽다.

누구나 영웅을 원한다

유치찬란한 맹렬함이 이렇게 신날 수가 없다. 괴력의 소유자들이 정의로우면서 웃기기까지 해 더 좋다. ‘쎈 언니’들이 무서운 주먹과 따발총 같은 입심으로 분위기를 압도하지만, 유머와 위트가 더해져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힘쎈여자 강남순> 얘기다.

<힘쎈여자 강남순>은 주인공 ‘강남순’을 비롯해 ‘황금주’, ‘길중간’ 등 집안 대대로 믿을 수 없는 괴력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들이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코믹 판타지 히어로물을 표방하며 요절복통으로 웃기기 여념이 없는 듯 시작하지만, 이 시대의 사회상을 뾰족하게 바라보는 백미경 작가의 진지한 메시지가 촘촘하게 담겨있다. 드라마는 신종 마약 범죄의 실체를 파헤치는 줄거리를 큰 축으로 한다. 그 외에도 3대에 걸친 ‘힘쎈 여자’들이 곳곳에서 씁쓸한 대한민국의 세태를 꼬집으며 백 작가의 통렬한 비판의식을 엿보게 한다.

드라마는 어린 시절 미아가 되는 바람에 성인이 될 때까지 몽골에서 자란 강남순이 “이런 게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야?”라고 되묻는 장면들을 몇 차례나 보여준다. 불평등하고 모순된 대한민국의 민낯을 들추는 순간들이다. 노숙자, 택배기사, 드라마 단역 등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전면에 내세우며 생각할 지점들을 무수히 던진다. 보이스피싱이나 사기 피해를 당해도 경찰이 범인을 잡기까지 너무 오랜 시일이 걸리고 범인을 잡아도 피해보상을 받기 어려운 사례 등의 에피소드도 외국에서 자란 주인공의 낯선 시선으로 담아낸다.

몽골에서 자란 남순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답답한 시스템에 대한 애석함은 ‘힘쎈 여자’들만의 방식으로 통쾌하게 해결되며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극 중 악당 ‘류시오’가 남순에게 한 말처럼 “힘이 세면 겁이 없어져”서일까, 삼대(三代) 모녀의 말과 행동은 거침이 없다. 틀린 걸 틀렸다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잘못된 걸 바로 잡는 데 자신들의 특별한 힘을 아끼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힘쎈 여자’들의 활약에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면서 실제로 현실에도 저런 영웅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드라마가 요즘 뉴스나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다루면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갈증도 해소해 주는 것이다. 사건·사고가 난무하고 점점 비열해지고 있는 이 사회를 구조할 진정한 영웅에 대한 욕구다.

백미경 작가는 2017년 흥행한 <힘쎈여자 도봉순>의 스핀오프로 이번 드라마를 내놓았다. 모계 혈통으로 이어져 오는 남다른 힘을 그릇되게 사용하면 그 힘이 사라져버린다는 ‘힘쎈 여자’ 세계관을 확장해 이번에는 특별한 힘을 가졌으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세상을 위해 써야 한다는 한층 더 진취적인 이야기를 선보인다.

한결 넓어진 이야기

<힘쎈여자 도봉순>은 ‘도봉순’이 가부장적 가치관에 갇혀서 자신의 힘을 억누르고 살다가 뒤늦게 그 힘을 제대로 써야겠다 다짐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봉순이 “내 힘을 숨기고 살면서 괴로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있다. 게다가 봉순에게 남성 중심의 차별적 가치관을 주입한 것은 다름 아닌 봉순의 엄마 ‘황진이’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봉순도, 엄마 진이도 자신을 가두던 생각의 틀을 깨고 성장한다.

이에 비해 <힘쎈여자 강남순>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강남순은 몽골에서 자란 남다른 호연지기로 극의 초반부터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는 능동적인 태도로 나선다. 순수하면서도 당찬 남순 앞에 놓인 허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힘으로 씩씩하게 넘는 모습이다. 나다움이 나를 더 빛나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다.

남순의 엄마 황금주는 자신의 천부적인 괴력은 물론 자신이 일군 부(富) 역시 좋은 일에 써야 한다는 신념으로 행동한다. 최상류층만 멤버로 받아주는 헤리티지 클럽에서 “돈 많은 사람들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하여”를 외친다. 금주는 딸 남순에게도 “특별한 힘이 있는 우리가 잘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모범을 보인다. 남순의 외할머니 길중간도 악을 응징하느라 경찰서 출입이 허다하고, 노년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적극성까지 갖췄다.

삼대 모녀의 관계성 또한 드라마의 감상 포인트다.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이렇듯 <힘쎈여자 강남순> 속 주인공들은 각자의 역할과 존재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다. <힘쎈여자 도봉순>이 내안의 진짜 나를 찾아 새롭게 일어서는 이야기였다면, <힘쎈여자 강남순>은 내가 나일 수 있는 일에 대한 확신으로 세상에 이바지하는 이야기다. <힘쎈여자 도봉순>이 여성 히어로 탄생기였다면, <힘쎈여자 강남순>은 본격 가족 히어로 활극으로서 의미가 있다.

세계관을 확장한 만큼 이야기의 스케일도 커졌다. 드라마는 남순이 몽골에서 자랐다는 서사로 몽골의 이국적인 풍습을 소개하고, 신종 마약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마피아가 배후로 드러나며 글로벌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택배 회사를 통해 유통되는 마약이 자양강장제나 다이어트약으로 둔갑해 우리 일상으로 퍼진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해결하는 사건의 스케일이 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세계관의 확장을 통해 일면 변했지만, 완벽하게 탈피하지 못한 모습도 있다. 바로 가부장적인 가족 구도다.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봉순을 가로막던 엄마의 가부장적인 가치관은 <힘쎈여자 강남순>에서는 타파되지만, 집안의 패권을 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위계가 달라지고 서열이 갈리는 듯한 가족의 모습은 두 드라마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힘쎈여자 강남순>만의 절묘한 가부장제 비틀기가 돋보인다. 금주가 집안을 이끄는데, 그 집안의 힘 없는 남자들에게는 금주가 독단적인 가장이다. 심지어 금주의 아들 ‘강남인’은 금주를 독재자로 여긴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를 여성 위주로 전복한 모습으로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힘의 불균형이 촉발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돌이켜 보면 그간 강력한 남성성으로 상징된 가부장제가 비판돼왔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쪽으로든 힘이 치우치면 구도가 기울어지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는 것을 드라마가 상기해주는 것이다.

결국 큰 힘에는 불평등과 불균형이 수반될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힘쎈여자 강남순>의 ‘쎈 언니’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힘을 더더욱 좋은 일에 써야 한다는 다짐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얻어낸다.

<힘쎈여자 강남순> 포스터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할머니부터 손녀까지, 남다른 캐릭터

그러나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어도 입에 쓰면 삼키기 싫은 법이다. 백미경 작가는 <힘쎈여자 강남순>을 목 넘김 좋은 당의정(糖衣錠)1)처럼 만들어 시청자들을 완벽하게 무장해제 했다. 시청자들이 거부감 없이 메시지를 삼킬 수 있도록 가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모계 혈통으로 유전되는 어마어마한 괴력의 존재들이라는 만화 같은 설정에서 출발하는 만큼 시청자들이 만화를 보듯 아무 생각 없이 웃게 한다. 작정한 듯 캐릭터부터 스토리 전개, 하다못해 영상미까지 ‘어쩜 저렇게 유치할까’ 싶게 구성했다. 그러고는 유치하다는 첫인상으로 큰 기대 없이 화면 앞에 모인 시청자들을 금세 휘어잡는다.

또 중요한 메시지를 언급할 때는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순명료하게 전달해 단번에 수긍하게 한다. 고급스러운척 젠체하며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직관적이고 선명하게 이야기해 머리에 쏙쏙 박히게 한다. 이러한 화법이 시청자에게 통한 데에는 작가의 필력도 한몫했지만, 배우들의 남다른 연기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정은을 필두로 이유미, 김해숙 등 3대 ‘힘쎈 여자’들이 각종 사회 문제를 고발하듯 쏘아내는 지적들은 그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가 덧입혀지면서 더욱 힘을 발휘한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김정은이다. 김정은의 과장된 듯한 코믹 연기가 드라마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김정은이 정색하며 연기하는 황금주는 극 중 전남편 ‘강봉고’가 말했듯 늘 “투 머치(too much)”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패션부터 뮤지컬의 한 장면일까 싶게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상 속 현란한 쇼맨십 등 매사가 과하게 넘친다. 그런 모습은 웃기지만, 우습지는 않다. 김정은만의 ‘코믹 카리스마’다. 2000년대 초반 코믹 연기로 스크린을 풍미했던 김정은이 녹슬지 않은 코믹 펀치로 시청자들을 녹아웃 시키고 있다.

신예 이유미의 활약도 볼 만하다. 이유미는 몽골에서 한국말을 반말로 배워 위아래 구분 없이 반말로 대화하는 남순을 능청스럽게 잘 소화해냈다. 참신한 마스크에서 나오는 청량한 매력도 남순의 캐릭터와 딱 어울린다. 상대역인 ‘강희석’과의 케미스트리도 흐뭇한 미소를 자아낸다. 첫 만남부터 강희석에게 “내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등 강희석을 향한 직진 로맨스로 팬들을 더없이 행복하게 한다.

이렇듯 의미와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힘쎈여자 강남순>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신종 마약 범죄 의혹을 파헤치는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초반의 재기발랄함이 좀 덜하긴 하다. 하지만 답답한 현실에 찾아와 시청자들의 꽉 막힌 속을 뻥 뚫어준 ‘힘쎈 여자’들의 존재만으로도 특별한 드라마다. 이번 드라마의 성공에 힘입어 백미경 작가가 새로운 ‘힘쎈 여자’ 시리즈로 찾아와주길 기대해본다.

  • 조성경

    대중문화 평론가. 웹 매거진 IZE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기자. 드라마와 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츠를 보고 쓰는 일을 한다. 콘텐츠 외연의 산업들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영역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