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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point 1

한국형 슈퍼히어로는
‘내 동네’에서
‘내 자식’을 구한다

한창완(세종대학교 창의소프트학부 만화애니메이션텍전공 교수)

‘괴물’로 불리며 초능력을 감춘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디즈니플러스의 <무빙>은 기존의 히어로 공식을 깨고, 인간미와 가족애를 키워드로 내세워 흥행에 성공하며 한국형 슈퍼히어로의 새 가능성을 보여줬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의 역사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미국식 노블코믹스가 우리에게 익숙해진 경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소개된 <슈퍼맨>, <배트맨> 등의 영화 시리즈와 <원더우먼> 등의 미국 드라마 시리즈를 통해서다. ‘초능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은 할리우드가 만든 슈퍼히어로의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환호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팬덤으로 축적돼 팍스 아메리카나1)를 넘어 관련 캐릭터 산업과 원작의 확장을 견인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은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실업률을 기록하는 대공황 시기였고, 만화 출판사들은 당시 밀주(密酒), 도박, 마약 등 갱스터들의 불법 천지가 된 어두운 사회의 해결사로 슈퍼히어로를 부상시켰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영웅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그렇게 슈퍼히어로의 IP를 축적해온 DC코믹스는 워너브러더스에 합병됐고, 영화제작사가 꾸준히 기획·제작한 <슈퍼맨>과 <배트맨>은 개봉할 때마다 월스트리트의 나스닥 주가를 상승시키는 호재로 작동한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시리즈들이 매너리즘에 봉착했을 때, 만화책 출판사인 마블코믹스가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 시리즈를 통해 다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월트디즈니의 마블코믹스 합병과 함께 히어로 군단 <어벤져스>의 연이은 성공은 관객들로 하여금 마블 세계관(MCU, Marvel Cinematic Universe)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도록 고착화시켰고 세계 전역에 마블 마니아들을 양산한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연속된 흥행은 각각의 캐릭터를 오랜 시간 독점해온 영화배우들의 개런티 리스크(guarantee risk)를 현실화시키고, 결국 2019년 1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하면서 일부 세계관을 정리하게 된다. 이어서 시작된 여성 히어로 군단의 2기 시리즈로는 기존 세계관만큼의 팬덤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의 연속된 스토리텔링과 반복적인 세계관은 흥행 감소와 함께 새로운 비상구를 찾게됐다. 지상파, 케이블TV, IPTV 등의 레거시 미디어가 코로나19 시기를 횡단하며 넷플릭스 등의 OTT 미디어에 반격당하고 있기에 변화된 시스템에 맞는 다른 히어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마블 세계관 속 주요 캐릭터들

출처: https://www.marvel.com/characters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보여준 강풀

넷플릭스에 대항해 출범한 디즈니플러스도 슈퍼히어로 스토리를 업그레이드하며 반전을 보여줄 새로운 영웅들을 찾았고, OTT 콘텐츠의 아시아 테스트베드2)인 한국에서 ‘강풀’이라는 웹툰 작가의 IP를 입도선매(立稻先賣)3)하게 된다. 그리고 그 원작들의 대표 선수 격인 <무빙>은 한국식 히어로만의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으로 히어로의 새로운 세계관을 등장시킨다.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는 지구 너머 우주와 인류를 구한다. 그러나 강풀 세계관의 한국식 슈퍼히어로는 ‘내 동네’에서 ‘내 자식’을 구한다. 코로나19를 지나며 한국 웹툰 원작들이 넷플릭스 등의 OTT 플랫폼에서 오리지널 시리즈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익숙한 듯 보이는 주요 장르에서 비틀기와 차별화로 해당 장르 팬덤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매너리즘의 대안을 보여주는 대체재로서 가성비가 높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좀비 캐릭터를 한국에서 만들면 재난물(<부산행>), 역사물(<킹덤>)과 학원물(<지금 우리 학교는>)로도 확장되며 습성과 속도 등 좀비 캐릭터의 재해석도 시도된다. 슈퍼히어로 또한 비슷한 초능력을 발휘하지만, 초능력자들이 모이게 된 동기에는 분단국가라는 특징과 미국이 변인으로 등장하고, 가족과 부모라는 한국식 신파가 정교하게 플롯을 재배열한다.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에 직면한 한국의 만화산업은 만화 잡지사의 도산과 잡지 폐간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 닫히고, 원작의 확장은 상상할 수도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 세기말적 증후군과 디스토피아적 관념들은 일본 만화와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를 세계적으로 양산하며 한국 만화의 생존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대학 졸업 후 만화 작가로서의 시작을 준비하던 작가 강풀은 좁아진 취업문과 불가능해진 만화 연재 가능성을 나름 대체하고자, 개인 홈페이지에 엽기 일상 만화 <일쌍다반사>를 업로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외로운 작업은 2003년 미디어다음(다음웹툰)에 <순정만화>를 연재하며 ‘스크롤 웹툰’이라는 인터넷 만화의 새로운 연출과 편집 방식을 처음으로 선보인 계기가 된다. 그의 작품은 그림보다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30회 연재 분량이 마무리될 시기에는 연재된 원작의 대부분이 영화, 연극, 애니메이션 판권 계약을 통해 다른 미디어로 확장됐다.

강풀의 작품들은 <아파트>, <타이밍>, <26년>, <이웃사람>, <어게인>, <조명가게>, <무빙>, <브릿지>, <히든> 등 미스터리와 슈퍼히어로 등이 결합된 ‘미스터리 심리 썰렁물’ 장르와 <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 <마녀> 등의 ‘로맨스 신파물’ 장르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특히, ‘ <아파트>- <타이밍>- <어게인>- <무빙>- <브릿지>- <히든>’으로 이어지는 슈퍼히어로 계보는 모두 강동구에서 거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서로 연결된다. 유사한 시기에 동일한 지역에서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새로운 원작을 통해 등장하고 그 이야기들이 다시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며, 빌런(악당)에 대응하는 그룹을 형성한다.

강풀의 스토리텔링은 휴머니즘에 기반한 약자의 반격이며, 평범한 일상에서 제기하는 권력의 재해석이다. 강풀의 원작은 거대한 주제에 대한 반전을 극대화하기 위해 빌드업 과정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영화보다는 시리즈 드라마가 어울린다. <아파트>, <타이밍>, <순정만화>, <바보> 등 영화화된 작품의 흥행 성과가 기대보다 저조했던 것 또한 섬세하게 전개되는 정서적 서사를 제한된 시간 내에 풀어내야 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기에는 부족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다른 인기 웹툰 작가들처럼 뛰어난 연출과 화려한 작화 요소가 부족한 것도 스토리텔링에 더 집중하게 하는 단점이자, 장점일 수 있다.

<무빙> 원작과 드라마 포스터

출처: 위즈덤하우스, 디즈니플러스

한국형 슈퍼히어로의 가능성

강풀의 첫 드라마 시리즈 <무빙>은 강풀의 시나리오가 일정한 구성과 시간이 전제된다면, 관객들을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고 캐릭터들의 공감대가 회차가 거듭될수록 더 강력해질 수 있음을 반증해 보였다. 강풀은 대학 때부터 사회적 문제의식과 비뚤어진 기득권에 거침없이 저항하기보다는 찬찬히 단계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그림과 스토리를 만들어 왔다. 어쩌면, 강풀의 로맨스 신파물 또한 그러한 서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세대와 나이를 아우르며 어떤 캐릭터도 간단히 쳐내거나 단순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의 고집이다. 빌런이 등장하면 그 빌런의 존재 이유와 과정도 설명하고, 당위성에 대해 관객들의 이해를 끌어냄과 동시에 빌런을 끝까지 챙기는 끈질김을 보인다. 그래서 강풀의 이야기는 마지막까지도 지켜보게 만드는 집중력이 있다.

대부분의 관객은 초능력의 긍정적인 면과 사회적 역할에 환호한다. 그러한 공감대와 응원이 캐릭터 팬덤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 슈퍼히어로의 경제적 후방효과였다. 그러나 강풀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 힘은 비극이며, 과시할 게 아니라 책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히어로가 느끼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세상을 구하지 못한 후회가 아니라 내 자식과 내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 한계와 답답함이라고 토로한다. 슈퍼히어로는 맞는데, 그동안 익숙하게 인지해온 캐릭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호기심과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할리우드가 아닌 한국에서 시작된 색다른 히어로의 이야기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 <무빙>의 등장은 스마트폰과 코로나19 시대가 가져온 탈(脫) 국경과 문화 공감대를 딛고, 일반적 서사가 지역과 국가를 넘어서 이제는 모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디즈니플러스는 OTT 후발주자로서 과감한 도전을 해야 하는 위치다. 강풀 세계관의 실험은 첫 시도부터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앞으로 계속해서 등장할 원작들의 시도 또한 그러한 응전의 네트워크로 기능할 것이다.

  • 한창완

    세종대학교 창의소프트학부 만화애니메이션텍전공 교수. (사)한국캐릭터학회 회장, 애니메이션진흥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고, 1995년 『한국만화산업연구』(글논그림밭) 이후 『애니메이션경제학』, 『게임 플랫폼과 콘텐츠 진화』, 『슈퍼히어로』, 『웹툰 비즈니스 딜레마』(커뮤니케이션북스) 등의 저서를 냈다. 만화 웹툰, 애니메이션, 캐릭터, 게임 등의 콘텐츠 산업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