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종류의 콘텐츠로 확장할 수 있는 ‘멀티 유저블 IP(Multi-Usable IP)’는 콘텐츠 산업에서 아주 중요하다. 마블(Marvel)의 세계관처럼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등 다방면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슈퍼 IP가 우리나라에서도 탄생할 수 있을까? ‘디오리진’은 IP 확장에 있어 중요한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기획·개발하여 콘텐츠 간 유기성을 확보하는 전략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IP 사업은 ‘철저히’ 사후적이고 결과론적이었다. 하나의 상품이 성공하면, 그 성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IP 활용 방안에 대해서 고민했을 뿐, 시작부터 IP의 활용 방안을 구체적으로 기획하면서 진행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원천 IP의 성공 여부도 보장할 수 없는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당대의 스타 프로듀서였던 김종학 감독의 드라마 <태왕사신기>(MBC)는 미리 준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걸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태왕사신기>를 기획하면서 테마파크등 IP 활용 방안을 염두에 둠은 물론 구체적인 실행 계획까지 동시에 진행했었지만, 원천 IP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의 실패로 전체 프로젝트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디어 사업에서 시작했던 IP는 대부분이 냉엄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전에 기획해서 IP 사업을 해야 한다는 당위는 번번이 현실적인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디오리진의 정재식 대표가 주창하는 “멀티 유저블 IP를 설계 및 기획 단계에서부터 동시 기획해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파괴적이다. 당위로서는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질문만을 던지는 상황에서, 마치 해답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주장이 133억 원 상당의 시드(seed) 투자로 이어졌고, 게임, 웹툰 등에서 활약한 인재들이 속속 모여드는 모습을 보면 궁금증은 더 커진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얼굴을 뵙고 말씀을 듣고 싶다고 청했다.
“기존의 문법이죠. IP의 명가 디즈니조차도 변화하는 세상에서 IP에 대한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걸요. 창작자를 규격화할 수 없으니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다수의 작가군을 보유하고 그들 중 누군가가 새로운 걸 가져오는 걸 기대하는, 우연적인 상황에 맞추어 작업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미디어 작법이었죠. 모든 영역은 아니더라도 창작의 일정 영역은 분명히 규격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산업화 수준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고요.”
디오리진 정재식 대표
창작이 규격화되고 모듈화될 수 있다는 발언에 무게가 담겨 있다. 창작의 ‘가치’가 기계화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 기반의 창작 활동이 집단 기반의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 IP는 작품의 기획 혹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다른 매체로 전환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진행해야 하며, 가급적 동시에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정 대표의 생각이다.
“게임이 나오는 시점에 큰돈을 들여서 웹툰을 제작하기도 하죠. 근데 이런 방식으론 고객을 설득하기 힘들어요. 애초에 게임을 만들 때 웹툰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고 만들어진 것인데, 억지로 웹툰으로 만든다고 사람들이 환호하고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게임 업계도 최근에는 동시 출시를 염두에 둬요. ‘사이버펑크 2077’이란 게임이 나왔을 때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넷플릭스)란 애니메이션을 동시에 기획했거든요.”
물론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사이버펑크가 세상에 출현하고 나서 2년 뒤에 출시되었다. 게임은 초기 버그 등의 문제로 논란이 되었지만, 애니메이션의 출시 이후 다시 고객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게임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았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넷플릭스에서 유통되었고, 전체 순위는 대략 15위권으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대목에서 정 대표가 중점을 두는 것은 ‘동시 기획’이다. 하나의 IP가 등장하고 난 뒤에 다시 다른 POC1)를 염두에 두고 다시 기획한다면 가장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특정 매체에 적합하게 탄생한 콘텐츠를 다른 매체로 이전 시키려면 이것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야 하는데 여기에 통상 2~3년이 걸려요. 첫 콘텐츠가 인기를 얻어서 올라가고 있는 PLC2) 구간에서 파생 콘텐츠가 나오질 못하고, 주기가 꺾여서 내려갈 때쯤에 나오는 건 좋지 못하거든요. ‘포켓몬스터’가 좋은 예죠.”
포켓몬스터는 탄생부터 미디어 믹스를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포켓몬스터 게임은 타지리 사토시가 만들었지만, 미디어 믹스를 추진한 것은 바로 지금의 주식회사 포켓몬(The Pokémon Company) CEO인 이시하라 츠네카즈다. 애초부터 ‘게임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츠네카즈는 사토시의 기획안을 보자마자 MD 상품이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게임이 출시되고 몇 년이 지나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긴 했지만, 구상과 기획 자체는 게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고민했었다. 결과적으로 애니메이션은 포켓몬스터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켓몬스터는 게임으로 시작했지만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각종 캐릭터 상품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여기서 정 대표가 지목하는 것은 동시 기획이다. 같은 내용과 상품을 매체만 달리해서 제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되 각 매체의 속성에 맞게 변형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동시 기획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포켓몬의 육성과 전투 승리가 게임의 주목적이라고 한다면,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포켓몬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사랑 등 일상의 삶이 중심이다. 게임의 판은 포켓몬 육성과 모험을 전제로 체육관 관장을 이기고 챔피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된다. 그와 동시에 악의 조직을 처단하거나 전설의 포켓몬과 대면하고 싸우는 중요한 일에 휘말리는 등의 스토리가 짜여 있다. 반면에 한 시즌당 최소 3년 이상을 지속해야 하는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중요한 이벤트 간의 기간이 길어진다. 따라서 게임의 핵심 이벤트 외에 주로 일상 위주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게임 원작에는 없던 대회나 마을을 추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순히 스토리와 캐릭터의 특성뿐만 아니라 그림체 등을 정리하는데도 동시 기획이 필수적이다.
“콘텐츠 사업의 전략은 세계관에서 나와요. 이 세계관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건 인물의 스토리입니다. 세계관과 인물의 스토리가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끝은 아니에요. 최종적으로 돈을 버는 건 그림(art)이거든요. 사람들이 스토리를 몸에 붙이고 다닐 수는 없으니 결국 캐릭터의 성격이 투영된 그림을 살 수밖에요. 개성 있는 그림체로 표현되어야 하죠.”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캐릭터 ‘뽀로로’의 경우 그림이 너무 영유아에 맞추어 있다 보니 확장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애당초 여러 매체를 염두에 둔 기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잔망 루피’라는 캐릭터가 최근에 인기를 끌면서 상품으로 팔릴 수 있게는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제는 주요캐릭터인 뽀로로를 기반으로 게임을 만들기는 어렵겠죠. 캐주얼 게임을 만들 수는 있는데 기대할 수 있는 매출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고요.”
스타트업 CEO는 대부분 사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정 대표의 경우에는 조민수 감독을 만나는 순간이 그랬다. 조민수 감독은 <괴물>, <설국열차> 등에서 콘셉트 아티스트로 활약했고, EA사의 게임 <반지의 제왕: 컨퀘스트>의 총괄 아트 디렉터였다. 정 대표가 넷마블 IP 사업팀장으로서 일하며 가지고 있었던 갈증이 조 감독을 만나게 되면서 스타트업이란 결실로 이어진 셈이다. 두 사람의 결합은 시장의 관심을 받았다. 벤처 투자가 곤궁한 현시점에 10여 곳이 총 133억 원의 시드 투자를 결정했다. 사업의 구체성이 있다고 봐준 셈이다.
디오리진의 사업이 머리로는 이해됐지만,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기획 중인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정 대표는 곧 공개 예정인 사례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개발 중인지라 중간에 내용이 변경될 수도 있다는 전제를 붙였다. 아마도 그들이 이미 확보한 8개의 멀티 유저블 IP보다는 현재 기획 중인 것이 나 같은 초보자에게 설명하기가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갓트웰브(GOD12)’는 라인게임즈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라인게임즈의 요청은 간단했다. 12개 세력이 있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고 싶으니 세계관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디오리진은 여기에 살을 보탰다. 단순히 게임이 아닌 웹툰, 웹소설로 확장할 수 있는 세계관을 IP 기획 단계에서부터 구상하자고 역으로 제안했고, 받아들여졌다. 투자 위험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게임 시장에서도 홍보 관점에서 웹툰이나 영상 작업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고 있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합의가 된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세계관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12개 세력을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라인게임즈에서는 올림포스 신을 접목시키자고 했죠. 근데 사전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보니 올림포스 신을 기반으로 하는 게임이 너무 많고, 신마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미친 것이 12지신이었어요.”
세력군이 정해졌다. 다만 12지신은 동양적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게임으로서는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12지신의 각 동물을 국가별로 재구성했다. 예를 들어 뱀을 이집트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삼는 식이다. 고대 12개 문명국가를 중심으로 12지신을 재배치해서 동양과 서양에서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게임 캐릭터와 세계관은 완성돼도 웹툰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웹툰의 주 소비층은 젊은 세대다. 이들에게 세계의 위기와 세력의 다툼을 이야기하면 공감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지만, 게임의 세계관을 느낄 수 있도록 스토리를 설계해야 했다.
디오리진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갓트웰브’
여기서 말이 끊겼다. 더 이야기할 법도 하지만 곧 공개될 예정이기에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개략적이지만 디오리진이 멀티 유저블 IP를 확보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정 대표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0년 전부터 직접 창작을 해왔던 사람의 입장으로서 창작의 일정한 영역들은 분명히 규격화될 수 있고 반복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근데 현실은 창작자 개개인의 작업에 의존하는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죠. 작가 개개인의 역량에 의존하고, 이들이 작품을 가져오길 앉아서 기다리는 형태가 기존 창작 시장의 흐름이었어요. 창작의 영역을 블랙박스처럼 두고 랜덤에 기반한 걸로 생각해야 한다는 게 항상 의문이었어요. 저희가 멀티 유저블 IP를 염두에 두고 기획 단계에서 집단 지성을 활용해보니 충분히 모듈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규모 투자가 가능할 정도로 산업적인 숙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창작의 산업화란 말은 이 바닥 사업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리고 산업화된 창작으로 1에 그칠 수 있는 결과물을 적어도 3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더더욱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렇다고 창작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디오리진의 구석구석에는 창작자를 위한 배려가 곳곳에 놓여 있다. 산업화란 단어가 가진 메마름이 거기에는 없었다.
“회의는 낮은 테이블에서 해요. 그래야 자연스럽고 창의적인 것들이 나오더라고요.”
창작자들의 독창성에 대한 믿음과, 이를 시스템화할 수 있다는 착상이 디오리진의 시작과 133억 원이라는 시드머니 투자를 끌어낸 것 같았다. 어쩌면 디오리진이 만든 창작 IP를 두고 게임, 웹툰, 드라마, MD, 테마파크 등 관계자들이 원탁에 모여 투자 지분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게임 회사가 앞장서고, 디오리진이 살을 붙여 협업 기반의 슈퍼 IP 공동 창작이 결실을 거두는 그때가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