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서바이벌 예능은 TV, OTT,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여러 모습으로 선보여 왔다.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리얼리티 서바이벌 예능은 트렌드에 민감한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시장에 빠른 속도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제작자들은 영민하게 장르의 특징은 살리고 내용은 로컬화하며 시행착오 끝에 ‘한국형 서바이벌 예능’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넷플릭스의 자본력과 한국 예능 시장의 젊고 참신한 인재가 만나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사이렌: 불의 섬>(넷플릭스)은 소방관, 경찰, 군인, 스턴트 배우, 경호원, 운동선수 여섯 분야의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여성 출연자들이 모여 경쟁하는 생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지난 5월 대중에게 공개된 이후 넷플릭스 대한민국 시청 순위 2위에 오르며 치열한 경쟁과 직업별 특성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고 평가받았고 7월에 열린 <2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최우수 예능작품상까지 거머쥐었다.
필자 역시 퇴근 후 시청을 시작해 새벽 5시가 넘어 엔딩을 볼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을 만큼 콘텐츠의 은혜를 톡톡히 입은 사람이다. 재미있는데 잘 만들기까지 한 콘텐츠를 만나는 건 대단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그래, 그건 정말 볼만하지’라고 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기는 어렵다. 이런 박리다매 시장에 보석처럼 나타나 작품성을 인정받은 <사이렌: 불의 섬>. 왜 이 작품은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밖에 없는지 세 가지 이유로 분석해 보았다.
<사이렌: 불의 섬> 포스터
출처: 넷플릭스많은 이들이 <사이렌: 불의 섬>을 <피지컬 100>(넷플릭스)과 비교한다. <피지컬 100>은 성별 구분 없이 선발된 대한민국 최고의 피지컬 100인이 모여 펼치는 힘과 기술의 서바이벌이다. 다양한 종목을 통해 성역 없이 공정한 서바이벌 게임을 치러냈다곤 하지만 결국 최종 5명에 오른 이 중 여성은 없었다. 생물학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체력 차이 때문이다. <피지컬 100>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함께 출연하는 모든 서바이벌은 성별의 어젠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올해 웨이브를 통해 공개된 <피의 게임> 시즌 2를 보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별 대립이 시작될 정도이니, 대결 구도의 프로그램에서 ‘성별의 차이’는 중요한 선정 기준이 되었을 정도로 지금의 시대는 성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사이렌: 불의 섬>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사이렌: 불의 섬>은 ‘성별’ 대결이 아닌 ‘직업군’의 대결이다. 콘텐츠의 로그라인(한 문장으로 설명된 줄거리)을 읽고 들어간 초반부까지 그들은 각기 다른 직업군에서 선출된 ‘여성들’로 인식된다. 하지만 갯벌 위에서, 아레나에서, 숲속에서 그들은 성별을 뛰어넘어 ‘사람’의 서바이벌을 만들어 낸다. 특히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그 자부심이 만들어 내는 자신감과 사명감이 스스로를 성별의 어젠다에서 해방시킨다.
출연진의 직업군별 특징이 드러나는 장면. 왼쪽부터 군인팀, 소방팀의 말
출처: 넷플릭스필자가 처음 <사이렌: 불의 섬>을 보고 <피지컬 100>이 아닌 알래스카에서 펼쳐진 생존 서바이벌 <끝까지 살아남아라>(넷플릭스)가 생각났던 이유도 그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아라>는 올해 3월 공개된 미국의 서바이벌 생존 게임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재미 면에서는 <사이렌: 불의 섬>에 비해 한참 뒤처진다. 알래스카라는 대자연이 눈길을 끌긴 하지만 매력 없는 등장인물이나 지루한 인터뷰 편집 등이 한국형 리얼리티 서바이벌에 맞서기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이 콘텐츠가 떠오른 이유는 힘과 성별의 상관관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존 기술에 집중했다는 특징 때문이리라.
필자는 먼저 여성 PD가 성별의 논리를 깨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많은 변화 속에서 다양한 파고를 겪어야 했다. 변화를 위한 거센 저항에도 부딪혀야 했다. 하지만 저항의 바람 덕분에 더욱 성숙한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별의 논리를 넘어 여성이 단독으로 써 내려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볼 수 있다. <사이렌: 불의 섬>은 방송시장에서 그 적절한 예시를 보여준 것이다. 처음으로, 불편한 성별의 대결 구도에서 해방된 판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그들을 보며 낯선 쾌감을 느꼈다. 그만큼 나도 방송시장 안에 존재한 성별의 대립 구도에 큰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프로그램의 운명은 기획 단계에서 70%는 결정 난다’고 할 정도로 기획은 정말 중요한 단계다. 기획은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설계하는 단계이니 그 설계가 잘못된다면 아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렌: 불의 섬>은 치밀한 기획과 완벽한 사전작업이 돋보였으며 촬영 이후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음이 엿보인다. 특히 출연자의 캐릭터가 중요한 장르다 보니 인물 선정을 비롯한 섭외와 후반 캐릭터라이징에 제작진이 큰 공력을 쏟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캐릭터라이징은 연출자의 몫이다. 현장에서 보여준 출연자의 캐릭터를 후반에서 500% 이상 살려내고 각인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본인의 매력에 연출자의 메이킹을 더해 자신만의 색깔로 된 옷을 입는다. 누군가는 절대 악인의 옷을 입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희생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그것이 너무 지나쳐 ‘악마의 편집’만 되지 않는다면 그런 확실한 캐릭터라이징은 성공 사례가 될 수 있다.
<사이렌: 불의 섬> 역시 직업군별로 팬덤이 생길 정도로 캐릭터라이징에 성공한 사례다. 많은 이들이 소방팀의 의리 있는 카리스마에, 군인팀의 전략 전술에, 운동팀의 우직한 결기에 팬이 되었다. 타고난 매력에 연출자의 캐릭터라이징이 더해지며 이들은 시작부터 엔딩까지 시청자들을 ‘멱살 잡고’ 끌고 간다.
<사이렌: 불의 섬> 직업군별 특징 소개
출처: 넷플릭스 공식 인스타그램보통의 경우 촬영이 끝나면 제작진은 결과를 알기 때문에 캐릭터라이징에 힘쓸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하지만 <사이렌: 불의 섬>을 연출한 이은경 PD는 그런 우위를 두지 않은 듯하다. 이은경 PD는 <2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직업에 명예를 걸고 사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걸 보여준 출연자들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PD가 얼마나 출연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몇몇 캐릭터만 편애(?)하는 비겁한 편집은 하지 않았다. (때에 따라서는 비겁한 편집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정정당당히 승부했다. 보는 내내 모든 직업군에, 모든 개개인의 출연자들에게 상당한 공력을 쏟아 그 형평성을 최대한 맞추고자 한 그의 노력이 엿보였다. 이은경 PD는 한 인터뷰에서 이 프로그램을 만들게 한 키워드가 ‘우정+노력+승리’ 세 가지라고 밝혔다. 그의 마음이 참 한결같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래전, 무심코 찾아간 한 선배의 편집실에서 선배가 모니터 앞에 자신이 연출하던 프로그램 MC의 사진을 붙여 놓고 한참 바라보는 걸 봤다. 뭐하냐는 내 물음에 “MC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선배의 대답을 듣고 크게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출연자에 대한 애정 그리고 끝없는 관심은 그렇게 프로그램 성공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여섯팀 중 살아남은 소방팀과 군인팀 그리고 운동팀은 팽팽한 대결 구도 속에 마치 레이싱 대회에 출전한 고성능 스포츠카처럼 미친 듯이 폭주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새로운 구도로 마주 서게 된다. 중후반에서 느낀 질주의 쾌감에 중독돼 엔딩에 이르러서는 내심 기대한 게 나올까 생각했지만, 오히려 결승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시원한 쾌감이 아닌 낯선 메시지였다.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얻어가는 메시지가 모두 다르듯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일 터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메시지보다는 웃음과 쾌감 그리고 감동의 여운을 남기는 경우가 많으며 해석이 다양한 모호한 엔딩을 맺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서바이벌 예능의 경우는 완전한 승자가 정해지기 때문에 모호한 결말은 없다. <사이렌: 불의 섬> 역시 명백한 승자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쾌감을 안겨주는 서바이벌의 일반적인 엔딩과 크게 다름없다. 하지만 <사이렌: 불의 섬>을 제대로 정주행한 사람이라면 여섯팀의 우정과 의리 속에 탄생한 보석 같은 엔딩을 봤을 것이다.
때로는 적으로 대립하고 때로는 연합으로 뭉치면서 올라온 소방팀과 운동팀이 최종 기지전에서 마주 섰을 때 우리가 예상한 전형적인 최종대결은 그 자리에 없었다. 고백하자면 9화까지 다 보고 나서 ‘드디어 최종 대결이다’라는 기대보다는 ‘한때는 연합하던 저 두 팀이 이제는 서로 맞서야 하나?’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소방팀이 “우리답게 공격하고 멋지게 전사하자”라고 외칠 때 그들의 결말을 예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들의 대결은 정정당당했고 카리스마 넘쳤으나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달랐다. 승리의 제물이 될 먹잇감을 앞에 둔 악에 받친 눈빛이 아닌, 마지막까지 달려온 서로에 대한 존경 그리고 끝까지 정정당당했던 서로에 대한 신뢰의 눈빛이었다. ‘너는 그걸 당연히 가질 자격이 있어’라는 존중의 눈빛이기도 했다. 짧은 순간 최종 우승팀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두 팀은 그간의 여정을 되새기며 서로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승패에 의미를 둔 지금까지의 서바이벌 트렌드 안에서는 낯선 그림이다. 혹자는 힘 빠지는 엔딩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그 안에 담긴 깊은 메시지를 이해한 누군가에겐 승리의 쾌감 외에 낯선 희열을 준 안겨준 감동의 선물이었다.
힘자랑은 이제 그만. 획일화된 서바이벌 예능에 <사이렌: 불의 섬> 같은 신선한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이 장르도 도태되고 말테니. 영원한 탐구 대상인 ‘인간’을 다각도로 분석해 그들의 다양한 본능과 본성을 서바이벌의 소재로 활용하는 창작자들이 늘어가길! 모두의 부지런한 연구가 계속되어 이런 놀라운 예능 콘텐츠가 계속해서 등장해 주길 시청자로서, 그리고 창작자로서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