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 휴먼이 광고에 나오거나 화보를 찍는 것이 더는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됐다. 그중에서도 K-Pop 분야에서 활약하는 버추얼 아이돌들은 팬덤을 형성하며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다. 이들에 열광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한 여성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배경이 야외에서 실내를 오가며 바뀌는 동안 화려한 동작은 계속된다. 광고는 높은 구조물 위에 앉아있는 여성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대부분의 사람이 광고가 끝날 때까지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 독특한 양갈래 머리의 이 매력적인 여성은 이렇게 단숨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다. 버추얼 휴먼 ‘로지(Rozy)’의 첫 등장이었다.
이후 로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대중은 감탄했다. ‘인간이 아니라고?’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누군가는 기술의 발전에 순수한 경이를 표했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우려와 두려움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연예 기획사나 콘텐츠 제작사는 대체로 환영의 제스처를 취했다. 버추얼 휴먼은 늙지도, 병들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구설수나 스캔들에 휘말릴 리스크도 현저히 낮았고, 초기 투자비용 대비 기대 수익도 높을 터였다. 여전히 실연권1), 인권, 저작권 등과 관련한 법적 이슈가 남아있었지만 버추얼 휴먼은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만으로도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슈퍼 휴먼’이 될 수 있는 카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버추얼 휴먼이 엔터 산업의 궤도에 본격적으로 올라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먼저, 버추얼 휴먼은 크게 2D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캐릭터형’과 3D 아바타로 구현된 ‘실사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기술 고도화에 따라 전자에서 후자 순으로 발전해 왔는데, 2018년 무렵 산업 전반이 한 차례 급성장하는 경향이 도래한다. 팬데믹 심화에 따라 메타버스 및 VR 산업이 부상하면서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활동 중인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무려 200명이 넘는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릴 미켈라(Lil Miquela)’, 일본의 ‘이마(Imma)’, 중국의 ‘아야이(Ayayi)’ 등은 각각 인스타그램 277만과 39.8만, 웨이보 90.2만 명이라는 엄청난 팔로워 수를 자랑하며 대중들과 활발한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에서도 로지를 비롯해 ‘한유아(YuA)’, ‘루시(Lucy)’, ‘이솔(SORI)’ 등이 다방면으로 활동 중이다. 이들은 유명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나서는가 하면 음원을 발매하고 실시간 방송이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성형 AI와의 결합을 시도하여 문학 및 미술 등 예술의 영역으로도 진출하고 있다.
웹드라마에 출연한 버추얼 휴먼 '제인'
출처: CBRE 공식 유트브 채널물론, 아직도 일부 표정이나 동작 연출에 있어서는 기술적 결함이나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2) 현상이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놀라운 수준까지 발전했으며 우리의 실생활까지 침투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이제 대중이 버추얼 존재라는 새로운 유전자의 출현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버추얼 휴먼에 대한 논의를 빼놓을 수 없는 산업 분야는 단연 K-Pop일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K-Pop의 유구한 역사 한자락에 이미 버추얼이 존재했었다. 바로 1998년 1월에 데뷔한 사이버 가수 ‘아담’이다. 아담은 당시에 음반을 정규 2집까지 발매하고 음료 광고에 단독으로 출연하는 등 흥행가도를 달렸던 바 있다.
시간이 지나 K-Pop에 버추얼이 다시금 등장한 것은 그룹 ‘에스파(aespa)’와 함께였다. 에스파는 4세대 아이돌답게 탄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획된 그룹으로, 눈에 띄게 미래적인 스토리텔링을 차용하고 있다. 이는 세계관에 등장하는 ‘아이(ae)’라는 존재 때문인데, 그들은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각 멤버들의 아바타로 실제 멤버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자아라는 설정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버추얼 휴먼만으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도 출현했다. 대표적으로 2021년 12월에 데뷔한 6인조 걸그룹 ‘이세계 아이돌’이 있다. 이들은 트위치 스트리머 ‘우왁굳’이 기획한 프로젝트를 통해 결성되었는데, 모든 멤버가 시청자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각 멤버는 독립적으로 개인 방송을 하면서도 ‘왁타버스’라고 불리는 세계관 속에서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주목할 점은 바로 이 세계관을 뒷받침하고 있는 거대한 팬덤이다. 우왁굳은 활동 초기인 2009년 무렵부터 적극적인 시청자 참여 문화를 장려해 왔고 이를 기반으로 콘텐츠에 활발히 참여하는 팬덤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이세계 아이돌은 자연스럽게 팬덤과 함께 성장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오로지 팬심으로 모인 능력자들이 아낌없는 지원사격을 해준 덕분이다. 가령, 데뷔곡 ‘RE:WIND’는 우왁굳의 오랜 팬이었던 작곡가 영바이브가 작곡했으며, 이외에도 이른바 ‘금손’들이 수많은 팬아트를 생성해 내면서 새로운 팬들의 유입을 견인한 것이다.
버추얼 아이돌 ‘이세계 아이돌’
출처: 왁 엔터테인먼트한편, 올해 1월에는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 소속의 4인조 여성 그룹 ‘메이브(MAVE:)’가 데뷔했다. 언리얼 엔진과 메타휴먼크리에이터를 활용해 제작된 이들은 완벽에 가까운 실사형 외모와 퀄리티 높은 음악으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엇보다도 올해 3월 <쇼! 음악중심>>(MBC) 무대를 통해 데뷔한 5인조 남성 그룹 ‘플레이브(PLAVE)’ 야말로 K-Pop 신(scene)에서 버추얼 아이돌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만화를 찢고 나온 아이돌’이라는 콘셉트에 걸맞게 이들 멤버는 모두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구현된 아바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플레이브가 데뷔 6개월 만에 이미 약 43만 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모았으며, 각종 소셜미디어 활동과 라이브 소통을 기반으로 팬덤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 중이라는 사실이다.
버추얼은 이제 하나의 문화 패러다임이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사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존재. 흥미로운 점은 모든 버추얼 아이돌의 뒤에는 필연적으로 ‘본체’로 표상되는 실연자가 존재하지만 그 어떤 팬도 본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독특한 대상에게 팬들은 왜 열광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정확히 누구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그 답은 다름 아닌 ‘캐릭터’다. 아이돌 팬들이 소비하는 것은 각 멤버들의 ‘씹덕 포인트’라고 불리는 매력 요소와 각 멤버 간 ‘케미(케미스트리)’라 불리는 관계성, 또한 그들의 세계관을 해석해 나가는 ‘떡밥’ 회수의 과정과 멤버들이 보여주는 성장 드라마, 나아가서는 그들과의 상호작용 과정 그 자체다.
더욱이 버추얼만의 특장점도 분명히 있다. 일례로, 그 어떤 판타지 설정이라도 비주얼로 현실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예상치 못한 기술 결함마저 팬들에게는 재미 요소이자 새로운 2차 창작으로 연결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소비된다.
라이브 중 기술 결함이 나타나는 순간도 버추얼 아이돌 팬들에게는 재미 요소가 된다.
출처: 유튜브기술의 발전은 늘 새로운 예술의 출현으로 이어져 왔다. 결국 버추얼 아이돌은 동시대 기술 기반 예술의 정점에 있는 콘텐츠라고 봐야 할 것이다. 기술의 고도화와 함께 버추얼 아이돌은 그 존재 양식 및 형태도 점차 다각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예를 들면, 언젠가는 AI 브레인을 탑재한 나만의 버추얼 아이돌을 육성해서 데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캐릭터고 스토리다. 아무리 압도적인 기술이 새로 등장한다고 한들, 그 안에 자리한 핵심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가 본질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