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기업이 함께 제작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중소제작사는 제작비를 확보하고 플랫폼이나 채널에서는 작품성이 높은 콘텐츠를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콘텐츠 공동 제작 사례를 살펴본다.
지난 8월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킹더랜드>(JTBC)의 제작 크레디트(credit)에는 엔피오엔터테인먼트, 바이포엠스튜디오, SLL까지 3개의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 이뿐 아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셀러브리티>와 <퀸메이커>, SBS드라마 <꽃선비 열애사> 역시 각각 3개의 기업이 공동 제작에 참여했다. 심지어 2022년 tvN에서 방영한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은 4개의 회사가 함께했다.
드라마에서 크레디트는 매우 중요하다. 극본, 연기, 연출, 촬영 등 작품의 특정 분야에 어떤 개인과 기업이 참여했다는 증빙일 뿐 아니라 전문가에게는 자존심의 상징이다. 그중에서도 드라마 맨 끝에 등장하는 ‘제작’ 크레디트는 해당 기업이 콘텐츠에 지분이 있고, 따라서 수익을 분배받을 권리가 있음을 나타낸다. 콘텐츠 세계에서 어떠한 기업과 개인도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한, 자신의 크레디트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장 수익이 줄어들 뿐 아니라 미래에 행사할 권리를 제한받고, 때로는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갈등, 분쟁,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라마 제작사들은 왜 ‘공동 제작’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최근 증가하는 한국 드라마 공동 제작 현상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2022년 1월부터 2023년 8월 말까지 국내에서 방영·서비스한 지상파, 케이블TV, 종편채널의 미니시리즈와 넷플릭스를 비롯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 전송된 한국 드라마 193편의 제작사 수를 조사했다.1) 그 결과 1개 기업이 제작한 경우는 66편(34%), 2개 제작사 공동 제작 99편(51%), 3개 제작사 이상 참여는 28편(15%)으로 나타났다. 한국 드라마의 약 3분의 2가 공동 제작 형태를 띠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국내외 OTT 플랫폼 서비스가 본격화하고 이에 따라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 산업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 드라마 제작-유통 구조는 개별 독립제작사들이 지상파 3사와 일부 케이블TV, 종편채널 등 방송 사업자와 연계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이성민, 2022). 그러나 한국 드라마 산업 규모가 커지고,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 진입하면서 비즈니스 양상이 복잡해졌다.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한 대형 드라마 기획, 제작이 늘어나고 있고 총제작비가 수백억 원을 넘는 작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무빙>(650억 원)을 비롯해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300억 원), <수리남>(350억 원) 등 글로벌 OTT 플랫폼 콘텐츠뿐 아니라 JTBC <재벌집 막내아들>(350억 원),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0억 원) 등은 회당 제작비가 10억 원을 훌쩍 넘는 작품들이다. 2013년 드라마 편당 제작비가 3억 7,000만 원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년 사이 적게 서너 배, 많게는 열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정주원, 2023). 일부 글로벌 OTT 플랫폼을 제외하면 대부분 중소기업인 국내 드라마 제작사는 물론이고 대기업 계열 방송사, 스튜디오 또한 이렇게 큰 제작비를 한 기업이 모두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콘텐츠 비즈니스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 사업이다. 유명 작가가 집필하고 유명 배우가 출연한다 해도 성공을 보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제작비 투자와 콘텐츠 IP 권리2)를 둘러싸고 자연스럽게 위험을 분산하고 기회를 나눠 갖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이 드라마 공동 제작이 늘어나는 주요 배경 가운데 하나다. 한 예로 <재벌집 막내아들>은 드라마 제작사 ㈜래몽래인과 SLL스튜디오가 특수목적회사를 설립하고 전체 제작비를 50:50 비율로 투자했다. 이 드라마로 발생하는 수익을 계약 조건과 투자 비율에 따라 나누는 조건이다.
드라마 제작 산업을 논할 때 전통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작가, 감독, 배우 등 제작 요소다. 특히, 과거 성공 경험이 있는 A급 제작 요소를 확보하는 것이 드라마 투자, 편성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어 왔다(노동렬, 2018). 최근에는 웹툰, 웹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드라마가 늘어나면서 원작 IP 판권 역시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한국 드라마 산업 변화에 따라 이러한 제작 요소 비용 또한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데다 한 제작사가 A급 요소를 다 갖추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따라서 각자 보유한 제작 요소와 특장점을 결합하는 방식의 공동 제작 또한 증가하는 추세다. 2024년 공개 예정인 <폭싹 속았수다>(극본 임상춘, 연출 김원석)는 작가를 보유한 팬엔터테인먼트와 연출자가 소속된 바람픽쳐스가 공동으로 제작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은 웹툰 원작 IP를 보유한 네이버 계열 스튜디오N과 감독을 비롯한 제작 관리 역량을 갖춘 스튜디오드래곤이 공동 제작한 사례다. 웹툰 IP를 보유한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제작사 크로스픽쳐스가 함께 제작한 SBS 드라마 <사내맞선>도 같은 유형이다.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드라마화된 <스위트홈>
출처: 네이버 웹툰, 넷플릭스국내외 OTT 플랫폼이 영상콘텐츠 산업을 주도하는 환경에서 좀비, 액션 스릴러, SF,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 수요가 생기고, <오징어 게임>(넷플릭스), <D.P.>(넷플릭스) 등 이른바 ‘영화적 드라마(cinematic drama)’를 찾는 플랫폼의 경향도 공동 제작이 늘어난 또 하나의 배경이다. 실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영화산업이 멈췄을 때 많은 영화사가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면서 영화와 방송계 인력이 함께 콘텐츠를 만드는 사례가 늘어났다. 영화의 신선한 기획력과 방송의 자본, 제작 역량이 결합하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드라마가 등장한 것이다. 티빙 오리지널 <장미맨션>은 스튜디오SLL과 계열 제작사인 B.A엔터테인먼트, 필름몬스터가 공동 제작했고, 웨이브 시리즈 <위기의 X> 또한 영화사와 드라마 제작사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프로듀서, 작가 등 서너 명이 고정멤버인 기획 전문 제작사와 촬영, 조명, 음향 등 주요 스태프와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현장 제작 관리 역량을 강점으로 피지컬 프로덕션3)을 주로 담당하는 제작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드라마 공동 제작의 증가 현상은 한국형 스튜디오4)의 등장과도 관련이 깊다. 대부분 한국의 스튜디오는 계열 방송 채널과 OTT 플랫폼 등 매체 경쟁력을 근간으로 산업 내에서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이들은 방송사,플랫폼과 독립제작사 사이에서 콘텐츠의 기획개발은 물론, 국내외 유통, IP의 확장과 활용 등 IP 비즈니스 전략을 실행하는 핵심적인 주체로 떠올랐다(이성민, 2022). 앞선 조사에서 스튜디오가 제작한 사례를 보면 단독 제작 11편, 공동 제작 75편으로 전체 공동 제작의 약 60%를 차지할 만큼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들 스튜디오 대부분이 편성 권한과 유통 채널을 보유한 방송사, 플랫폼과 특수관계로 시장 내에서 우월적 지위와 권한을 행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스튜디오들은 <작은 아씨들>(스튜디오드래곤), <천원짜리 변호사>(스튜디오S)처럼 자기자본을 투자해 원작 확보, 기획개발, 제작, 국내외 유통까지 드라마 제작 가치사슬 전체를 담당하기도 하지만, 콘텐츠에 따라 기획개발, 제작, 투자, 유통, 해외 판매 등 영역별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자신들이 기획한 아이템의 제작 과정을 투자 인수한 계열 제작사에 맡기거나 역으로 소속 레이블 제작사가 준비한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형식으로 제작에 참여하는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5)
또한 중소 독립제작사가 개발한 프로젝트에 스튜디오의 제작 요소를 결합해 공동 제작하기도 한다. 드라마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스튜디오가 원작 IP, 작가, 연출, 배우 등 주요 제작 요소 투입에 관여하지 않은 채 중소제작사가 패키징을 모두 마치고 편성을 타진하는 경우에도 계열 방송사, 플랫폼 편성을 무기로 공동 제작 타이틀을 올린 뒤 해외 판매 권리 등을 챙기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일종의 통행료인 셈이다. 최근 불경기에 따른 광고시장 불황, 방송사의 드라마 편성 및 국내외 OTT 플랫폼의 제작 주문 축소와 맞물려 작품을 방영, 서비스하기 힘들어지면서 방송사, 플랫폼 계열 스튜디오의 우월적 지위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드물지만, 유명 배우 소속 매니지먼트 기업이 드라마의 공동 제작 타이틀을 갖는 경우도 있다. 해외 판매가 수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주연 배우의 지명도가 편성, 투자에 큰 영향을 끼치는 한국 드라마의 특수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복수의 중소 드라마 제작사 대표에 따르면 이런 경우 주연 배우에게 지급하는 거액의 출연료와 별도로 일정 지분을 할애하게 되는데, 그만큼 제작사 몫의 수익이 줄어들게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 공동 제작이 늘어나는 것은 국내외 OTT 플랫폼이 주도하는 한국 미디어 콘텐츠산업의 성장과 글로벌 시장 진입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시장 내에서 각자의 강점과 역량, 자본의 투입과 미래 발생 권리의 분할, 위험 분산을 중심으로 ‘중소제작사 – 스튜디오 – 방송사 – 플랫폼’ 간 합종연횡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꼭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의 제작위원회 방식이나 할리우드의 ‘제작사 – 스튜디오 – 네트워크’ 간 권리와 이익 분배 규칙처럼 산업 내 비즈니스 주체 간 합리적인 역할 분담, 이익 공유 방법이 정립된 것이라기보다 힘과 자본의 논리에 따른 울며 겨자 먹기식 관행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 산업이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고 지속가능한 성장,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소제작사, 매니지먼트 기업, 스튜디오, 방송사, 플랫폼 간에 일정한 합의와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마련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2023년 한국 드라마 산업에서 일어나는 공동 제작 증가 현상 이면에는 앞으로 풀어야 할 적지 않은 숙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