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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point 2

<닥터 차정숙>
공감과 공분의 판타지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드라마 <닥터 차정숙>(JTBC)은 오랜 기간 경력이 단절된 채 지내던 여성이 의사로 복귀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드라마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다. 3050 여성의 공감대를 자극하는 설정과 극 중 남편의 외도를 처단한다는 통쾌한 내용이 결합하며 큰 호응을 얻은 <닥터 차정숙>을 리뷰해본다.

시청자의 욕망 담아낸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지금 이곳’ 시청자들의 욕망을 모아서 영리하게 구현함으로써 성공한 드라마다. 제작진도 ‘메디컬드라마의 탈을 쓴 아줌마 성장기’라고 했지만 실제 드라마 전개를 따라가 보면 다양한 장르적 특성이 즐길만한 형태로 조합되어 있다. 드라마는 태생적으로 시청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보고 싶은 이야기, 이루고 싶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구현함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유도하는 장르다. 따라서 드라마를 읽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통해 충족하고자하는 시청자의 욕망을 읽는 것이다.

<닥터 차정숙>은 ‘50대 경력단절 주부의 레지던트 도전기’라는 표면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 종합검진, 지금 시작합니다’라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50대 경력단절 주부의 자기 찾기에 가깝다. 자신의 꿈과 맞바꾸면서까지 일구어 온 가정이 행복의 전부라고 믿어온 50대 경력단절 주부, 영원히 남일 수밖에 없는 시어머니, 첫사랑과 바람을 피우는 남편, 그리고 당당한 혼외자, 자기만 아는 자식들. 이 작품의 설정은 식상하다.

<닥터 차정숙> 포스터

출처: JTBC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 경력단절 여성의 전형적 요소(가족을 위한 자기희생, 잃어버린 꿈에 대한 회한, 삶의 내공에 대한 낙관적 기대 등)를 전면화함으로써 식상함을 오히려 익숙한 것과 함께 소환하여 공감하고 공분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50대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나이라는 사실, 더구나 경력단절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꿈을 찾아서 자기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고 행동한다는 것, 따듯한 마음과 올곧은 인성 그리고 삶의 연륜으로 그 어렵다는 레지던트 과정을 해낼 수 있다는 기대, 거기에 키다리 아저씨 ‘로이킴’의 각종 후원과 로맨스, 공감할 수 있거나 바보 같은 악역이지만 마지막에 회개한다는 전개가 그 낙관적 판타지의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낙관적 판타지가 얼마나 개연성 있고 실현 가능한 것이냐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왜 욕망하느냐에 있다.

차정숙의 자기 발명과 주도적 태도

‘차정숙’이라는 주인공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것은 이 작품이 ‘자기 찾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찾기는 외부로부터의 호명(interpellation)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만들거나 찾아내는 과정을 말한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말처럼 종교, 교육, 가족, 문화, 정치, 법의 형태를 띠고 사적 영역에 은밀히 개입하여 수동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들로부터 탈주하여 스스로 자신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욕망’의 발명을 전제로 한다. 발견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는 까닭에 기존 질서 중심의 현실 순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발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도전적이고 혁명적이다. 발견이 아닌 발명을 요구할 정도로 호명의 구조는 집요하고 견고해서 차정숙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어렵고 많기만 하다. 차정숙의 자기 찾기는 의사지만 응급환자에게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급성간염 발병, 남편의 외도라는 비자발적 동기를 통해 각성한다. 그리고 극이 진행될수록 자발성을 전제로 자기 주도적인 욕망을 갈구한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가족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증명하고 주장하는 과정은 발견에서 발명으로 진화해가며 공감과 공분을 넘어 ‘사이다’ 효과를 발휘한다. 간 이식에서 깨어난 차정숙이 남편에게 “개새끼”라며 분노한다거나, 가족들에게 자기도 자신만의 꿈과 삶의 의미가 있다고 선언한다거나, 로맨스를 꿈꿔도 좋을 만큼 훅 치고 들어오는 로이킴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일정 거리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 설정은 이 작품의 중심이 가족, 불륜, 멜로에 있지 않고 차정숙의 ‘자기 찾기’, 좀 더 정확히는 ‘자기 발명’에 있기 때문이다.

<닥터 차정숙>은 외도한 남편에게 복수하는 통쾌한 전개로 시청자의 공감을 자아냈다.

출처: JTBC Drama 유튜브 채널

바로 이 지점이 <닥터 차정숙>의 가장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아쉬운 지점이다. ‘어떤 계기로 각성한 여성이 제2의 인생을 꿈꾼다’는 클리셰를 바탕으로 키다리 아저씨, 어긋난 첫사랑, 새로운 로맨스, 메디컬 드라마의 익숙한 요소들을 활용하면서 50대 여성의 주체적인 시선과 실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반면 남편의 간을 이식받는다거나, 이혼은 했지만 가족이라는 질서를 포기하지 못하며, 사회적으로 건강한 활동을 통해 자기를 찾는다는 결말은 다소 아쉽다.

5.5%에서 출발한 시청률이 19.4%까지 치솟으며 시청자의 지지를 얻었지만 결말의 아쉬움에 대한 거센 저항을 받은 것은 차정숙의 욕망이 온전한 발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이식을 통해 남편을 용서한다든가, 혼외자를 낳고 오랜 불륜관계를 유지해온 최승희가 뚜렷한 동기 없이 차정숙을 이해한다든가, 이혼은 했지만 남편, 아이들과의 관계는 유지한다든가, 이미 성인이 된 자식들이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설정은 이 작품이 평범한 주말 드라마의 질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차정숙이 필요한 이유

<닥터 차정숙>과 같이 여성 캐릭터를 전면화하면서 여성의 욕망이나 여성을 둘러싼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콘텐츠가 최근 몇 년간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 경제력, 사회적 지위 등이 이미 남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콘텐츠의 중심 향유자층이 20~50대 여성이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여성을 전면화한 작품들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나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볼 수 있듯이 나이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에놀라 홈즈>, <아가씨>, <채털리 부인의 연인>, <길복순>에서처럼 다양한 욕망을 다채로운 관점에서 그려냄으로써 그 스펙트럼을 무한 확장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 안에서 여성은 인구분포나 영향력 혹은 중요성에 비해 늘 주변부, 소수자 취급을 당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주 시청자층이 여성인 드라마의 경우에도 여성이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캐릭터로 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픈 부분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발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등장과 그들에 의한 다양한 여성 서사의 전면화는 환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왜 여성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부족하다는 점, 여성 문제에 대한 진정성과 깊이 있는 천착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닥터 차정숙>에서도 50대 경력단절 여성의 문제를 다양하게 다루고는 있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천착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며,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아직 다소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터 차정숙>을 비롯한 최근 여성 서사의 다양한 관점과 탈주는 소중하다. 그것은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극복하려는 현재적 관점의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50대 여성 배우가 이 작품을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엄정화뿐만 아니라 최근 전도연, 김희애, 김혜수 등이 캐릭터 스펙트럼을 확장하면서 여전히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것은 그만큼 여성 향유자의 욕망이 연령의 제한을 넘어서고 있고 세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인 나이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넘어서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찬사를 받을만한데, 그것이 성공적인 필모그래피의 전개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더욱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키워준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스타들의 자기관리나 노력이 이러한 변화의 중심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팬들의 기대와 성원이 지속적으로 전개된 결과이기도 하다.

드라마 종영 이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엄정화는 기억에 남는 대사로 스스로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는 주인공의 말을 꼽았다.

출처: tvN D EN 유튜브 채널

분명한 것은 여성 시청자의 욕망은 동일하거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극히 복잡하고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본격적인 여성 서사는 출발할 수 있다. 동일시와 감정이입의 매개로서 여성 캐릭터를 전면화하거나 여성 욕망을 ‘캔디렐라’의 형식으로 단순화하여 판타지로만 그려내는 것은 위험하다. 여성 캐릭터만 나온다고 해서 여성 서사가 아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겠다는 캐릭터 ‘캔디’와 같은 설정이나 남성에 의한 신분 상승 혹은 현실 타개의 캐릭터로 대표되는 ‘신데렐라’가 결합한 캔디렐라는 남성 중심 질서의 또 다른 판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할 여성들의 자기 주도적 욕망의 발명과 감정적 공유, 소통적 연대의 다양한 시도가 드라마를 통해 그려져야 한다.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닥터 차정숙>에서 발견한 여성 서사의 도전이 반가운 이유다.

  • 박기수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스토리텔링 전문가로서 향유, 팬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등을 중심으로 실천 중심의 연구에 힘쓰고 있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구조와 전략』(논형),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 전략』(논형) 등 10권의 단독저서와 『アニメは 越境する』(岩波書店) 등 20권의 공저가 있으며 8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