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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wave 2

지역적이면서 보편적인
한국 이야기의 힘

박진희(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해외 통신원)

K-콘텐츠는 더 이상 한국에서 제작돼 수출된 작품만 의미하지 않는다. <파친코>(애플TV플러스) 등의 드라마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한국계 제작진이 참여하고 한국만의 이야기를 담아내 주목받았다. 지역성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세계의 공감을 끌어낸 K-콘텐츠를 들여다본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한국계 작가와 감독들

할리우드는 캘리포니아의 한 동네이지만 미국의 미디어 산업을 대표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배우나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은 늘 국내에서 반갑게 다뤄지는 소식이다. 할리우드 액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같은 표현이 있을 정도로 굳은 이미지를 가진 미국 콘텐츠 산업은 지난 몇 년간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다. 팬데믹 동안 스트리밍 플랫폼이 빠르게 성장했고 이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하며 미디어 산업에 새로운 지형을 만들고 있다. 또 콘텐츠 제작에 있어 국가와 문화 간의 경계가 점차 낮아지며 할리우드는 전례 없이 빠르게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2019년 <기생충>으로 시작돼 팬데믹 중 이어진 <오징어 게임>(넷플릭스)의 흥행까지 한국발 영상콘텐츠들의 성공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에서 제작된’ 영상콘텐츠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미국 현지의 한국계 배우, 감독 그리고 작가의 참여로 제작된 콘텐츠들 역시 높은 관심과 기대를 받고 있다.

한국계 캐나다인 최인섭(Ins Choi) 작가의 원작 연극을 바탕으로 한 캐나다 CBC 방송국의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에 최 작가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계 이민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한국계 작가와 감독이 제작에 참여한 드라마와 영화는 북미에서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2020년 개봉한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Lee Isaac Chung) 감독의 <미나리>에 이어 올해 개봉한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Celine Song) 감독의 <전생(Past Lives)>까지, 한국계 감독의 영화는 여러 영화제와 미디어, 대중의 호평을 받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상을 받으며 얘기했던 ‘1인치의 벽’1)이 무색하게 지금 뉴욕의 영화관에는 자막을 익숙하게 읽는 관객들이 <전생>을 관람하고 있다.

<전생>은 뉴욕타임스의 영화 평론가 제시카 키앙(Jessica Kiang)으로부터 2023 베를린국제영화제 직후에 영화제에서 가장 빛났던 작품 중 하나라는 평을 받았다. 2023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 평가(Jury Grid)에서 가장 높은 점수인 3.6점을 받았으며 로튼 토마토에서 역시 97%의 높은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전생>은 대사의 절반 이상 많은 부분이 한국어임에도 작은 독립 영화관뿐만 아니라 AMC 시어터스와 같은 미국의 대형 상업 영화관에서도 상영을 시작했고, 6월 2일 개봉 후 4주 연속 박스오피스 순위 10위를 유지하며 6월 23일부터는 미국 전역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한편, 한국계 작가의 소설도 꾸준히 관심을 받고 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총 3편의 영화로 제작된 넷플릭스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와 2022년 공개되어 호평받은 애플TV플러스의 <파친코>는 각각 한국계 미국인 제니 한(Jenny Han)과 이민진 작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제니 한 작가는 지난 5월 공개된 후속작인 <엑스오, 키티(XO, Kitty)>에 직접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첫 시리즈는 당시 넷플릭스 오리지널 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파친코>는 애플이 유튜브를 통해 무료 공개한 첫 회가 일주일 만에 6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스트리밍 플랫폼의 후발 주자인 애플TV플러스를 대중에게 제대로 알린 작품이 되었다.

한국인 엄마의 고향으로 떠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하이틴 드라마 <엑스오, 키티>

출처: 넷플릭스

2021년 출간과 동시에 많은 미디어와 평론가의 호평을 받은 한국계 미국인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 <H 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 역시 영화화가 확정되었다.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은 최근 디즈니플러스 <만달로리안> 시즌 3에 감독으로 참여했고, 이성진 감독은 넷플릭스의 <성난 사람들(BEEF)>을 통해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신작 <썬더볼츠(Thunderbolts)>에 작가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성난 사람들>은 조연배우 데이비드 최(David Choi)와 관련된 논란이 있었음에도 공개와 동시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삶을 사실적이며 현실적으로 반영했다는 긍정적인 평을 받으며 5주간 넷플릭스 북미 드라마 TOP 10 목록에서 자리를 지켰다. 더 나아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최근 공개한 <엘리멘탈(Elemental)>은 픽사의 유일한 한국계 감독인 피터 손(Peter Sohn) 감독의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장면마다 반영된 한국의 문화적 요소들이 관심을 받았다. 비록 <엘리멘탈>은 이전의 흥행에 성공한 다른 애니메이션들에 비하면 박스오피스 성과는 뒤떨어지지만, 픽사 작품에 이민 가정과 다문화적 요소가 점차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을 받고 있다.

‘한국 콘텐츠’와 ‘한국계 콘텐츠’

한국 문화가 반영된 영상콘텐츠들이 연이어 성공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다문화의 반영이 콘텐츠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기생충>, <오징어 게임>, 그리고 연이은 <미나리>와 <전생>의 흥행에 대한 미디어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한국 콘텐츠, 혹은 한국 문화가 등장하는 콘텐츠이면서 동시에 충분히 다양한 배경의 관객들에게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지역적이면서 보편적인’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 <기생충>의 세계적인 성공은 한국 영화의 매력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속 양극화와 갈등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국 사회를 통해 보여줬기에 가능했다고 평가받았다.

<오징어 게임>과 <지금 우리 학교는>(넷플릭스)은 북미에서 많은 관심을 받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이후로 많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K-드라마들이 북미에서 성공하겠다고 생각했으나, 모든 K-드라마가 현지에서 관심을 받지는 않았다. <더 글로리>(넷플릭스)처럼 다른 문화권에서는 크게 성공했지만, 북미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시리즈들도 있다. <더 글로리>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를 ‘지역적으로’ 잘 담아내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북미에서는 ‘보편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제작된 콘텐츠들은 다양한 문화권을 겨냥한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는 한국의 사회 문제와 현지의 보편성을 동시에 얘기하는 한국계 창작자들의 작품이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올해 많은 관심을 받는 <전생>에 대해 뉴욕타임스의 영화 평론가 제시카 키앙은 “이 영화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배경의 관객들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매력적이고 빛나는, 한편으로 가슴 아린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영화 속 사랑과 우정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관찰이 담긴 이야기는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라고 평했다. <미나리> 역시 더뉴요커, 더가디언 등 다수의 매체에서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이야기를 담담하고 따듯한 영상을 통해 풀어냈다고 평가받았다. 또 <미나리>는 이민자의 정착 이야기인 동시에 모두가 어린 시절 한 번쯤 비슷하게 경험했을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가족 사이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2022년 한국계 아이리스 심(Iris Shim) 감독과 한국계 산드라 오(Sandra Oh) 배우의 주연으로 제작된 <엄마(Umma)>는 한국어 대사와 한복 등 한국적인 요소를 영화 전반에 담아냈지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할리우드식 호러 장르에 한국식 제사 문화를 어설프게 더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 문화와 사람, 보편성을 갖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최근 할리우드의 관심을 받는 크리에이터들이 한국계 주인공과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리즈는 하이틴 로맨스의 주인공이 백인 십대 여자아이가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었다는 점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미나리>와 <전생>, 넷플릭스의 <우리 사이 어쩌면(Always Be My Maybe)>과 <성난 사람들>, 그리고 픽사의 애니메이션 <엘리멘탈>까지 모두 한국계 주인공,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다.

이 현상은 단순히 한국 문화에 대한 현지의 관심이 다문화를 배경으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콘텐츠는 한국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이민자 등 미국 사회에서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 소수자의 삶이 보편성을 가지고 대중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22년 미국 인구조사국(U.S. Census)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2050년부터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 인구가 백인 인구보다 많아진다. 그렇기에 미국 사회에서는 점점 다양한 소수자의 삶을 다루는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동시에 소수자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창작자에 대한 할리우드의 수요 역시 높아지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하는 한국 콘텐츠와 한국계 콘텐츠는 모두 지역적이며 보편적인 이야기를 잘 다루는 창작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잘 담아내서 매력을 갖게 된 콘텐츠와 ‘한국 이민자’, 디아스포라(diaspora, 이주민)의 이야기를 잘 담아낸 콘텐츠 모두 다양한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 박진희

    뉴욕의 비영리재단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의 해외 통신원으로 뉴욕 현지의 여러 문화 소식과 현상을 짧은 글을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