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춤했던 여행 예능이 부활하고 있다. 여행길이 막혔던 지난 3년여의 시간을 지나오며 여행 예능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힐링과 쉼을 주요 테마로 했던 기존의 형식을 탈피하여 새로움으로 무장한 여행 예능을 만나본다.
여행 예능 프로그램이 주목받고 있다. 여러 언론이 “다시 돌아온”이라는 표현으로 여행 예능의 ‘귀환’ 소식을 전한다. 사실 여행 예능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일 때도 이어졌다. 최근 여행 예능이 다시 조명받는 이유는 다음 요인들이 맞물리면서다. △팬데믹 이전 대표 여행 예능이었던 <배틀트립>(KBS2)이 종영 2년 만에 돌아온 점 △해외 촬영을 전면에 내세운 새 프로들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는 점 △엔데믹 시대를 앞두고 하늘길이 열리면서 언론이 ‘마음 편히’ 이러한 방송가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상황.
여행 예능의 ‘단절’이 아닌 ‘연속’을 이야기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여행이란 말이 지닌 의미가 넓어서다. 우리는 흔히 ‘여행 예능’이라고 부르지, ‘관광 예능’이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여행(트래블travel)과 관광(투어/투어리즘 tour/tourism)은 보통 구분 없이 쓰인다. 트래블(travel)의 라틴어 어원 트라바일(travail)은 ‘고통’, ‘고생’, ‘걱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일상을 벗어나는(=고생이 동반하는) 여정이면 무엇이나 여행이 될 수 있다. 투어(tour/tourism)는 라틴어의 어원 토르누스(tornus) 자체가 ‘돌아옴’, ‘원형’이란 의미다. 제자리에 돌아옴을 전제하는 여행이라고 볼수 있다.
여행은 꼭 국경을 넘지 않아도 된다. 팬데믹 시기 여행 예능은 ‘거리두기’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어졌다. <바퀴 달린 집>(tvN), <나는 차였어>(KBS Joy), <갬성 캠핑>(JTBC), <텐트 밖은 유럽>(tvN) 등은 야외에서 이뤄지는 ‘차박’과 캠핑을 활용했다. <요트원정대>(MBC every1), <바닷길 선발대>(tvN)는 요트를 이용했다.
팬데믹 시기의 여행 예능은 거리두기가 가능한
한적한 야외 캠핑이나 차박이 주요 테마였다.
이 시기 여행 예능은 거리두기를 지키기 위한 여행법을 적용했을 뿐, 팬데믹 이전 여행 예능과 차별화되지 않는다. 팬데믹 이전 여행 예능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여행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을 정착시킨 <1박 2일>(KBS2)처럼 여행은 거들뿐 버라이어티가 핵심인 유형, 버라이어티보다 리얼리티를 중시한 <꽃보다>(tvN) 시리즈, <삼시세끼>(tvN) 시리즈가 개척한 트래블 판타지 충족형, <짠내투어>(tvN)와 <배틀트립>이 대표하는 정보 중심 관광(투어)형이 있다. 다른 여행 예능은 이들 성공한 여행 예능 포맷을 변주한 것이다.
트래블 판타지 충족형은 셀럽 여행자들의 색다른 모습과 인생·자아 성찰 등을 부각하며 여행의 서사와 캐릭터에 집중했다. 이 서사의 단골 주제는 ‘힐링’이었고, 때로 오지 탐험과 모험이 주요했다. 관광보다 깊이 있는, 고난이 동반하는 여행을 통해 또 다른 나/동료를 발견, 성장하는 판타지를 자극했다. ‘가성비’를 챙긴 ‘소확행’을 꿈꾸는 시청자를 위한 정보 중심 관광형은 여행 설계자를 자임하며 실용성을 강조했다. 방향은 다르지만 기존 여행 예능은 무엇보다도 여행자(관광객) 관점과 욕망을 중심에 뒀다.
여행 예능이 곤경을 맞았던 건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다. 팬데믹 이전부터 여행 유튜버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들의 ‘리얼리티’와 ‘실용성’이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연예인 여행자들의 친목 도모, 지나치게 노골적인 PPL 등에 질린 시청자도 늘었다.
여행 크리에이터들이 인기를 끈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지인들과의 소통 에피소드다. 텔레비전 여행 예능 출연진은 대부분 유명인이라서 현지인들과 소통을 하더라도 제한적이다. 반면 여행 크리에이터들의 콘텐츠는 여행자와 현지인이 모두 주인공인 콘텐츠의 매력을 보여줬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텔레비전 여행 예능 역시 현지(인)를 중시하는 관점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영균 아이즈(ize) 칼럼니스트는 11월 7일 머니투데이에 쓴 글1)에서 올해 등장한 여행 예능 <톡파원 25시>(JTBC)와 팬데믹 시기 론칭한 유호진 피디의 <어쩌다 사장>(tvN) 시리즈 등을 리뷰하며 “‘나’에게서 ‘그들’로” 현지화하는 특성을 보인다고 짚었다. <어쩌다 사장> 시리즈는 차태현·조인성이 지역 상점을 맡아 운영해보는 과정을 담는다. <윤식당>(tvN)과 비슷해 보이지만, 지역민들과의 교류가 더 중시된다. ‘주민처럼 살아보기’를 실천하는 트래블 판타지 충족형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여행 예능의 ‘진화’는 팬데믹에서 엔데믹 시대로 이행해가는 2022년에 이뤄졌다. <톡파원 25시>는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한국계 현지인이나 배낭여행 중인 한국인들이 현지의 관광할 만한 곳을 직접 찾은 영상으로 소개해준다. 현지에 머무는 여행 특파원인 ‘톡파원’들은 한국 스튜디오에 있는 진행자, 패널들과 화상으로 대화를 나눈다. 코로나 대유행 속에서 온라인 화상 회의·수업 등 비대면 모임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친숙한 모습이다. 비대면/언택트 여행 예능, 랜선 여행 예능 포맷이 등장한 것이다.
현지에 거주하는 ‘톡파원’을 비대면으로 연결하는 포맷의
<톡파원 25시>
톡파원들은 실제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시청자를 위한 대리 여행자를 자임하지만, ‘현지인 포스’를 숨길 수 없다. 비슷한 비대면 대리 여행 예능 포맷을 쓰는 <다시 갈 지도>(채널S)와 달리, <톡파원 25시>는 대리 여행자들의 정체성을 십분 활용한다. 톡파원들은 관광 가이드를 넘어 세계 각지 문화를 비교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라오스 초등학교의 체육수업, 프랑스 반려동물들의 ‘횡단보도 건너기’ 안전 교육 등 관광객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현장이 중계된다. 한국 문화와 현지 문화를 넘나드는 톡파원들의 혼종성과 다양성, 일상성이 <톡파원 25시>의 차별점이다. <비정상회담>(JTBC)의 흥행 포인트를 랜선 여행과 영리하게 접목했다.
지난 6월 시작한 <세계 다크투어>(JTBC)의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다크 투어리즘’은 1996년 관광학자 존 레넌(John Lennon) 과 맬컴 폴리(Malcolm Foley)가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죽음이나 재난과 관련된 장소를 회상하며 교육, 엔터테인먼트의 목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뜻한다. <세계 다크투어>는 <톡파원 25시> 같은 비대면 랜선여행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SBS) 같은 스토리텔링 예능을 결합한 모양새다. 각종 스토리텔링 예능과 범죄 예능 출연으로 친숙한 전문가들이 ‘다크 가이드’로 이야기를 이끈다.
<세계 다크투어>의 매력은 ‘썰’만 푸는 스토리텔링 예능과 달리 ‘장소감(sense of place)’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 순간 특정 장소와 관계 맺는다. 장소감은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장소와 상호작용하며 느끼는 소속감, 애착 등 다양한 정서적 감정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세계 다크투어>는 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를 관광객 시선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2001년 9·11 테러가 벌어진 재난 현장으로 중첩시킨다. 역사적 참상이 일어난 공간과 그 주변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교차시키며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을 함께 일으킨다.
역사적 장소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여 보여주는
<세계 다크투어>
다크 투어리즘은 그리프(grief) 투어리즘이라고도 불린다. 희생자들의 슬픔을 망각하지 않고 승계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다크투어>는 유가족이나 생존자, 주민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며, 현지인의 장소감까지 담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에게 지금까지의 성장과 일상을 되돌아볼 필요성을 일깨웠다. 관광은 대중사회, 소비사회 출현과 맞물린 대표적인 ‘근대적 기획’ 가운데 하나다. 특히 우리 시대 관광산업은 국경을 넘는 관광객 증가와 함께 성장했다. 세계관광기구에 따르면 국제관광객은 1970년대 2억 명에서 2019년까지 16억 명으로 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하늘길이 닫히기 전까지, 세계 각국의 관광 수입은 세계 경제 성장률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팬데믹이 세계를 휩쓴 2020년, 국제관광객 숫자는 2019년에 견줘 74% 줄었다. 세계화가 꽃피기 시작한 1990년대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슷한 일을 다시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가 ‘지속 가능한 여행·관광’에 대한 논의를 키우는 이유다. 세계 각국의 사회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담은 <톡파원 25시>, 근대성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한 다크 투어리즘을 내세운 <세계 다크투어> 등은 그동안 여행자(관광객)의 욕망을 중심에 둔 여행 예능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프로들은 하늘길이 활짝 열리기 전까지 해외여행 갈증을 채워주려는 일시적인 아이디어에서 비롯했을 수 있다. 그래도 여행 예능의 유형, 여행 예능이 품은 여행의 의미를 확장시킨 의의는 기록할 만하다. 앞으로도 팬데믹 경험을 ‘지우려는’ 여행 예능 대신,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는 새로운 여행 예능이 등장하길 바라본다.
이영민, 『지리학자의 인문 여행』, 아날로그(글담), 2019.
강수환, 『관광에서 다크 투어리즘까지』, 세계와나,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