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콘텐츠가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 다른 나라에서도, 누구든, 언제든, 원할 때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시공간과 인종, 문화를 초월하는 콘텐츠 제작법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상이 높아졌다고 해야 하나,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구권 드라마나 영화의 인종차별 장면에 항의하던 나라에서, 이젠 같은 이유로 항의를 ‘받는’ 나라가 됐으니 말이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드라마, 영화 그리고 K-Pop 등의 K-콘텐츠가 다른 나라의 문화적 감수성을 존중하지 못한 표현으로 뭇매를 맞는 일이 늘고 있다.
지난 7월, MBC에서 방송되었던 드라마 <빅마우스>에서는 배우 이종석이 분한 주인공 박창호가 사형수를 자극하기 위해 “네 엄마가 너 낳고 미역국은 드셨냐? 너 같은 사이코 같은 새끼를 낳고 도대체 뭘 드셨는지. 똠얌꿍 아니면 뭐 선짓국 같은 거?”라는 대사를 해 태국 네티즌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태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똠얌꿍을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하며, 태국을 비하했다는 것이다. 또 9월에는 윤종빈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이 남아메리카 국가 수리남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알버트 람찬드 람딘 수리남 외교장관은 “수리남은 수년간 마약 운송 국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런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며 제작사였던 스튜디오드래곤에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이어 10월에는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도 물의를 일으켰다.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1위를 차지하던 <작은 아씨들>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을 ‘전쟁 영웅’으로 묘사하고 극 중 대사에서 “한국군 1인당 베트콩 스무 명을 죽였는데 그 사람들(비밀작전 수행 부대)은 100대 1(한국군 한 명이 베트콩 백 명을 죽였다)” 등 사실과 다른 묘사를 했다는 이유로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송출이 중단되었다.
태국 음식 똠얌꿍을 비하했다는 논란을 낳았던 드라마
<빅마우스>의 장면. MBC 공식 유튜브 클립에서 해당 대사는 편집된 상태다.
각기 대응은 달랐다. <빅마우스>를 제작한 MBC 측은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고, <작은 아씨들>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은 “향후 콘텐츠 제작에서 사회적-문화적 감수성을 고려해 더욱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사과했다. <수리남>의 제작사 넷플릭스와 윤종빈 감독 측은 무대응이었지만, 수리남 측에서 문제 제기를 하기 전에 한국 외교부가 수리남 측에 관련한 우려를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리남 정부 측의 드라마 제목 변경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 드라마 제목은 <수리남>으로, 영어 제목은 <Narco Saints>1)로 변경하는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논란은 비단 드라마나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방탄소년단이 몰고 온 열풍에 K-Pop을 향한 해외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룹 이달의 소녀 멤버 이브는 자신의 SNS에 알레르기로 부은 입술 사진을 공개했고, 한 팬이 그를 만화 <달려라 하니>(KBS2)의 고은애를 닮았다고 언급해 이브가 해당 이미지를 프로필에 올렸다. 이에 해외 네티즌은 두꺼운 입술에 곱슬머리를 가진 캐릭터가 흑인을 조롱하는 ‘블랙 페이스’냐고 비판했고, 이브는 “다음부터는 캐릭터를 사용하기 전에 오해를 살 수 있는 요소가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할게요”라며 사과했다. 한편 2인칭 표현인 ‘네가’의 발음이 흑인을 비하하는 ‘Nigger’와 발음이 같은 ‘니가’로 들린다는 해외 팬들의 지적에 방탄소년단은 미국 공연에서 ‘Fake Love’의 가사 일부를 수정한 적이 있다.
이러한 논란은 해프닝으로 끝나거나 사과 표명으로 일단락되기는 했으나 담당자가 논란에 대처하는 방식은 다 달라 특별한 위기 대처 매뉴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수가 문제 삼지 않으면 조용히 넘어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대부분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형식적인 입장만 반복할 뿐이고 국내 네티즌들 역시 논란에 시큰둥하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고 주장하거나, 역사의식은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르게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사과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반응도 많았다. 해외 네티즌의 반응이 민감하다는 시각도 많았다. 우리는 이미 서구권 콘텐츠에서 편협하게 동양인을 다루는 것에 분노하고 항의했지만 그쪽도 별다른 사과나 입장 표명을 한 경우가 많지 않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그들의 논리가 맞고 그동안 우리가 당해왔던 것이 억울하다 해도 K-콘텐츠 산업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콘텐츠의 소구력과 대치되는 전략이다. K-콘텐츠의 강점은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이유는 누구나 공감할만한 계급사회의 단면을 유머러스하게 다뤘다는 점도 있었지만,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이 백인 배우 위주의 시상식으로 비판받았던 기조를 바꿔 <기생충>을 선택했다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아시안 혐오와 차별에 대한 논의를 나누기도 했던 방탄소년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들의 노래를 통해 ‘Love Yourself’,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는 아시안, 아프리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은 물론 다양한 성적지향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앞서 언급했던 아이돌 관련 논란에 아티스트들이 발 빠른 사과와 대처를 한 것은, 이제 K-Pop은 초국가적이기 때문이다. K-Pop 그룹에 속한 멤버들도 한국뿐 아니라 여러 국가 출신이며 심지어 한국인은 한 명도 없는 K-Pop 그룹도 있다. 이제 노래를 영어로 부르는 것은 필수고, 흑인 인권 운동(#Black Lives Matter)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K-Pop 아이돌은 해외 팬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한다. K-Pop이 이렇듯 드라마와 영화도 할리우드처럼 국제 표준에 맞춰 제작될 것이다.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열린 넷플릭스를 타고 공개되는 작품이 점점 많아질수록 그렇게 될 것이다.
물론 넷플릭스라고 해서 완벽한 문화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공개되었던 <선과 악의 학교>는 영웅과 악당을 키워내는 마법학교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 영화다. 극 중 선과 악이 모호해 재미가 떨어진다는 점은 차치하고, 의도적으로 흑인 배우는 선한 주인공에, 백인 배우는 악한 역할로 배정한 점이 눈에 띄었다. 넷플릭스의 PC주의(정치적 올바름)적 행보로 보건대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극 중 배경인 ‘선한 학교’에는 상대적으로 다양한 인종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그 중 ‘키코’라는 동양인 캐릭터가 있었다. 이름은 일본인 같고, 의상은 한복 같고 실제로 배우는 중국계였던 그 캐릭터는 넷플릭스가 그토록 공을 들이는 PC주의에 정녕 아시안은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 뜨악하게 만들었다. 키코는 쉴 새 없이 조잘대며 애교를 부리고 멍청한 소리를 일삼는다. 무엇보다 존재감이 전혀 없다. 세계에서 가장 PC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넷플릭스가 이 정도라면, 매뉴얼이 있어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개념을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문화적 감수성을 겸비할 콘텐츠 제작 윤리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사고는 무엇일까?
먼저, 피아식별(彼我識別)에 대한 강박이 납작한 선악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플롯에는 ‘대립’이 필요하다. 극의 긴장감을 이끌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사회 대 개인 혹은 자기 자신과의 갈등 등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대립 구도도 많지만 가장 구시대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은 과거 역사의 상처를 헤집거나 국제 사회에서 적으로 간주되는 민족을 소환하는 것이다. 미국은 과거 소련에 그랬고, 지금은 러시아를 넘어 IS(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에 대한 날을 세운다.
우리나라 영화의 대부분은 일본 또는 북한을 적으로 묘사했다. 마치 이 두 나라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제작된다. 영화와 드라마는 서슴없이 북한 사람을 현대 문물을 접해보지 못한 순진한 존재로 그리고(<사랑의 불시착>(tvN), <공조> 등), 조선족에 대한 공포와 편견을 불러일으키는데다가(<청년경찰>, <범죄도시> 등) ‘쪽바리’, ‘짱깨’와 같은 언어를 맥락과 관계없이 사용해도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종이의 집 : 공동경제구역>(넷플릭스)에서 주인공 ‘도쿄’는 자신의 별명을 도쿄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나쁜 짓을 할 거잖아”라고 대답한다. 국민 정서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지만 고민 없이 게으른 선택을 하면 언제나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드라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의 장면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유튜브 채널또한, 우리 안의 사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블랙핑크의 멤버 리사의 사진을 두고 한국 네티즌이 “화장하면 완전 러시아 엘프 미녀 느낌인데 화장 지우면 그냥 태국 여자”라고 한 것을 두고 태국 네티즌들이 크게 화를 냈던 일이 있었다. 우리는 얼굴이 검으면 “동남아 사람 같다”, “흑인 같다”며 유머 코드로 삼았다. 최근 연이어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 지역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비판이 이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체화한 사대주의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하얀 피부에 대한 열망은 어두운 피부색을 차별하고, 하등한 존재로 하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서구적인 외모가 인기를 끄는 현상에 담긴 이면도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의 미디어 연구자 장희수는 “국내 문화콘텐츠 사업은 여태껏 내수지향형 산업이었다. 한국어로, 한국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관객의 취향을 고려한 기획이 대부분이었는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 사례가 늘면서 한국 문화콘텐츠의 소비자는 이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디어 제작자들에게 철학자 롤스가 주장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모두에게 공정한 선택은 자기가 태어날 국가, 사회적 위치, 재산, 인종, 직업, 성별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며 “한국이 세계인을 대상으로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배포하려면 더 이상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을 위한 내용만을 생산할 수는 없게 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문화적 감수성’이라는 말도 ‘문화가 다른 것이지 우리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오만이 깔려있다. 그런 자세로는 같은 잘못이 반복된다. 문화콘텐츠의 국가적 경계가 지워진 시대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디어 제작자들은 인종이나 문화, 민족의 문제를 다룰 때 세심한 공부를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위기 대처 매뉴얼은 허울뿐인 반성문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