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콘텐츠를 보지 않고 ‘듣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들이다. 이들은 음성을 통한 화면해설로 콘텐츠를 감상한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 콘텐츠란 장벽이 없는 콘텐츠란 뜻으로,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말한다. 장애인에게 편하다면 비장애인에게도 편하다. 장애/비장애를 구분 짓기보다 모두에게 좋은 콘텐츠를 만들면 된다.
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는 화면해설 작가로 10년 넘게 활동한 강내영 대표가 2017년에 설립했다. 강내영 대표는 저시력인데, 저시력은 의학적 수술 혹은 안경으로 교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상당히 손상된 상태를 말한다. 본인이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고, 절대맹(絕對盲)1)은 아니기에 비장애인의 시각 또한 가질 수 있었다. 배리어프리 콘텐츠를 통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을 만드는 강내영 대표를 만났다.
영상 화면해설 작업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시각장애인 분들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시거든요. 근데 듣기만 하기 때문에 내용의 50~60% 정도만 이해해요. 그래서 작업할 때 처음에는 영상을 재생해 소리만 들어요. 그러면 소리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데, 그게 시각장애인이 제일 궁금해하는 부분이 됩니다. 그 부분을 메모해뒀다가 영상을 다시 한 번 눈으로 보면서 메모해둔 부분을 확인해요. 그리고 어떤 해설이 들어가면 될지 생각해서 대본을 써요. 보통은 대사와 대사 사이 빈 공간, 평균 5초 정도 되는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흐름에 맞게 녹여내느냐가 중요합니다. 또한 저희가 작성한 대본을 성우가 내레이션 하거든요. 근데 눈으로 글을 읽는 속도랑 소리를 내어 읽는 속도는 다르기 때문에 제가 쓴 대본을 성우처럼 말하면서 읽어봐요. 그러면서 문장의 길이를 조절합니다.
5초 남짓의 짧은 시간 안에 정보를 주기 위해 특별히 고려하는 부분이 있을까?
들어서 알 수 없는 정보들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다음 우선순위를 정하는데요. 보통 비장애인 분들은 뭔가를 보게 되면 그냥 한 번에 정보들을 다 수용하잖아요. 어떤 걸 골라서 정보를 얻지는 않거든요. 근데 시각장애인 분들은 듣는 순서대로 연상을 해요. 그래서 배경이나 인물의 행동을 표현할 때 어떻게 그리는 게 좋을지 그 순서를 고려해서 문장을 만들어요. 우리 회사에서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모니터 요원을 두고 이들의 모니터 및 감수 작업을 통해 정보가 제대로 제공됐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영상콘텐츠의 배리어프리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났죠. 물론 더 늘어야 하고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덩달아 배리어프리 콘텐츠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배리어프리 콘텐츠 제작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아졌고요.
영상콘텐츠의 호흡이 짧아지고, 유튜브의 경우 자막을 기본으로 탑재하게 되면서 영상의 시각 정보가 전보다 많아진 것도 같다. 일을 해오면서 콘텐츠 트렌드의 변화도 체감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유튜브에 맞춰서 콘텐츠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고요. 사람이 말하는 사이사이 비는 공간들을 다 쳐내고 편집해서, 화면해설을 넣을 공간이 없어요. 그게 유튜브 영상을 화면해설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대사를 덮어서까지 해설을 넣기도 애매하고, 그런데 또 시각적인 정보는 줘야 하고. 또한 콘텐츠 길이와 작업량이 비례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10분짜리 콘텐츠여도 보통 1시간 단위로 계산하여 제작을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작업을 의뢰하시는 입장에서는 콘텐츠 길이가 짧더라도 1시간에 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고려할 지점이 많으실 테고요.
최근 한 CF에서는 아이 100명의 목소리를 인공지능을 통해 합성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화면해설도 인공지능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객관적인 정보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예능, 애니메이션, 드라마 순으로 주관적인 표현들이 더 많이 사용되거든요. 그랬을 때 객관적인 정보는 인공지능이 학습을 많이 하게 되면 대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특히 영상은 프레임의 연결이라 인간이 놓칠 수 있는 부분도 기계는 전부 읽을 수 있으니까요. 요즘에는 A.I.가 그림도 그리고 작사도 하고 창작의 영역을 대체하는 걸 보면 화면해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아직은 먼 일이라고 생각할래요. 단순히 정보만 생각했을 때는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 있는 거고, 그 작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설명은 A.I.가 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런 게 서로 구분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선택지가 오히려 늘어나는 게 아닐까요. 사실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즐길 수 있는 콘텐츠의 수가 많아지는 게 더 좋으니까요.
배리어프리 콘텐츠의 확산을 위해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화면해설 작업이란 게 작가의 컨디션에 따라서 대본의 질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어요. 예전에는 우리나라는 왜 사전 제작을 안 하느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어요. 사전 제작을 하면 화면해설 작업 시간도 확보할 수 있고 더 높은 품질의 대본을 쓸 수 있는데 말이죠. 요즘에는 사전 제작이 많이 늘어서 그런 고민이 해소되고 있습니다. ‘빨리빨리’를 기조로 하면 품질은 낮아질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는 대본 초고가 모니터링이나 감수 과정 없이 바로 녹음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제작돼왔어요. 방송은 특히 좀 더 심했는데, 화면해설 대본 작업도 하나의 창작 영역이기에 제작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양이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콘텐츠’가 많아져야지 사람들이 찾는 거잖아요.
또 제작사나 방송사에서 요청하는 작품들만 배리어프리 콘텐츠가 된다는 게 아쉽습니다. 이 과정에 시각장애인 분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구조는 아니에요. 이 지점에서 넷플릭스의 사례는 참고할만합니다. 제가 넷플릭스 한국 론칭 초기부터 작업을 했거든요. 넷플릭스에서는 미국 오리지널 콘텐츠에 화면해설이나 자막을 당연하게 제공합니다. 근데 우리나라, 특히 방송 같은 경우는 ‘편성’의 일정 비율을 화면해설 프로그램으로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신규 프로그램을 제작하지 않고 예전에 제작해 둔 배리어프리 콘텐츠를 편성 안에서 계속 돌리는 경우도 많아요.
미국은 시장의 인식 자체가 의무적으로 화면해설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디즈니플러스도 배리어프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서 저한테도 자문을 구한 적이 있는데요. 이런 글로벌 플랫폼이 우리나라 배리어프리 콘텐츠 확산에 큰 역할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도 관심은 높지만 아무래도 제작비 문제가 제일 큰 것 같아요. 방송이나 영화는 정부기관으로부터 배리어프리 콘텐츠 제작 지원이 있지만, OTT 콘텐츠는 아직 부족한것 같아요. 자본이 있는 넷플릭스의 경우 이 부분에 과감히 투자한 것이고요.
음성 해설과 자막을 동시 제공하는 넷플릭스 콘텐츠
한국어 콘텐츠임에도 대사를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 자막을 켜고 보거나, 또 화면해설을 켜두고 다른 일을 하며 콘텐츠를 시청하는 등의 콘텐츠 소비가 늘고 있다. 이 말은 비장애인도 결국 배리어프리 콘텐츠를 즐길수 있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방송’이라는 말을 썼는데, 지금은 배리어프리 콘텐츠라고 해서 장애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콘텐츠라는 인식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감상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방송, OTT,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분야를 오가며 활동하는데요. 이보다는 각각 해당 콘텐츠 분야에 계신 분들께서 먼저 장애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콘텐츠를 좀 더 쉽게 효율적으로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각장애인이 더 이상 ‘수혜자’가 아닌 비장애인과 같은 ‘소비자’라는 것을 알아주시고, 이들도 타깃이 되는 콘텐츠가 많이 제작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