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현실 기반 세계관인 ‘메타버스’는 어느새 익숙한 단어가 됐다. 방송영상산업에서도 메타버스를 활용한 프로그램 제작이 늘며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제작진에게 새로운 도전이면서 동시에 여러 과제를 안겨주기도 한다. 메타버스가 예능의 새로운 장르로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 할까?
팬데믹과 함께, 생소했던 여러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를 몇 가지만 꼽아 본다면 메타버스, 웹 3.0, A.I., 비대면, 부캐, 디지털노마드 등이 있을 것이다. 물론 메타버스나 A.I.와 같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십 년 전이지만 구글 검색량 추이만 보더라도 코로나19가 시작됐던 2020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메타버스, 그리고 이와 관련된 A.I. 기반 기술은 전 산업군에 거쳐 새로운 사업 전략이자 마케팅 수단으로 널리 활용됨과 동시에, 아예 메타버스를 콘셉트로 하는 SNS 플랫폼, 콘텐츠 제작사, 기술 제작사, 증권 상품이 등장했다. 페이스북은 사명을 ‘메타(Meta)’로 변경했고, 메타버스 공간에서 브랜드 스토어나 콘서트를 여는 일도 흔해졌다.
필자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니지만, 제페토와 같은 메타버스 플랫폼에 가입하여 아바타를 만든 후 플레이를 해 본 적이 있다. 이제 메타버스가 일반인들에게도 전혀 낯선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예다.
메타버스 관련 콘텐츠 제작의 시작은 디지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의 대표적인 사례를 두 가지만 꼽는다면 유튜브 채널 ‘빵송국’의 매드몬스터, 그리고 유튜브 채널 ‘우왁굳의 게임방송’과 그 연관 채널들이다. 매드몬스터의 경우 스마트폰 어플의 얼굴 변형(Face Editing) 기능을 통해 탄생한 캐릭터를 부캐로 활용하고 있다. 기술적 미흡함은 도리어 친밀감을 유발하며 개그의 소재로 사용됐다. ‘우왁굳의 게임방송’은 게이머 출신 유튜버가 운영하고 있는 채널로, ‘왁타버스’라는 서브 채널을 개설한 후 ‘이세상아이돌’이라는 가상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걸그룹을 데뷔시켰다. 이들의 음원은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에서 1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편, 메타버스 관련 기술에 대한 업계의 관심은 레거시 미디어인 TV 방송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방송을 통해 주로 활용된 기술은 A.I. 음성복원, 홀로그램, 얼굴합성(GAN) 기술 등이다. 열거된 기술들은 보도국의 선거 방송이나 뉴스, 일부 드라마에서 오래전부터 활용되어왔지만, 프로그램의 주제로 가져온 사례는 다큐멘터리나 리얼리티 쇼였다.
대표적인 예로 2020년 방송된 <너를 만났다>(MBC)가 있다. 고인이 된 가족을 VR을 통해 조우한다는 내용으로, 큰 성과를 거둔 작품이다. 그 밖에도 <A.I. 음악 프로젝트-다시 한번>(Mnet)은 음악 다큐멘터리로, 가수 터틀맨(故임성훈)과 故김광석의 생전 모습을 디지털로 재현, 무대에서 아티스트와 협연하는 내용을 담았다.
예능으로 기획, 제작된 메타버스 프로그램의 시초로는 <가상세계지만 스타가 되고 싶어>(티빙)를 꼽을 수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실제 출연진을 가상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캐릭터로 제작해 디지털 공간에서 각자의 아바타로만 소통하며 상대방이 누구인지 추리하는 일종의 리얼리티 추리 쇼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설정된 이유는 기술 구현상, 움직임이 많을수록 합성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눈동자의 세세한 움직임과 시선 처리가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가상세계지만 스타가 되고 싶어>는 가상의 아바타 부캐 뒤의 실제 스타를 추리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출처: 티빙 네이버TV 채널본 기사 작성을 위해 메타버스 관련 프로그램 제작진, 업계 관계자들을 통해 프로그램 제작 과정과 후기, 평가 등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공통으로 언급된 것은 기술 구현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 제작비 재원 확보 문제, 방송 제작진과 기술 제작진의 제작 시스템 차이에서 오는 소통 이슈였다.
TV 제작 일정의 경우 통상적으로 사전 기획이 3개월에서 길어야 1년 정도인데, 일단 첫 방송이 되고 나면 주간 단위로 일정이 쳇바퀴 돌듯이 굴러가기 때문에, 기술 구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시간이 부족하면 인력을 더 많이 고용해야 하고, 이는 결국 제작비 증가로 직결된다. 메타버스 프로그램은 기술 구현을 위해 추가 제작비가 상당액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방송사는 예산을 무한정 배정할 수 없다. 그러면 기술 업체들과의 가격 조정, 외부 협찬금 유치 등이 필수가 되고, 이는 제작진에게 압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또 특화된 제작 일정 시스템에 맞춰 작업을 해 온 방송 제작진들과, 게임이나 영화 등 제작 기간이 훨씬 더 여유 있는 분야에서 작업을 해 온 외부 기술팀이 협업을 하다 보니 결과물에 대한 시각 차이, 적정 비용 산출 문제 등 소통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2022년은 국내 TV 방송사들이 본격적으로 메타버스 예능 프로그램을 론칭하기 시작한 해다. 가장 대표적인 메타버스 예능으로 <아바타싱어>(MBN), <스타탄생>(JTBC), <아바드림>(TV조선)을 꼽을 수 있다. 모두 10회 이상 정규 편성물로, 메타버스 개념과 관련 A.I. 기술을 본격적으로 접목하였고, 디지털 휴먼 아바타가 등장하여 노래 경연을 하는 음악 쇼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주로 사용된 A.I. 기술로는 인간의 몸에 센서를 부착해 움직임을 따내는 모션캡처 기술, 실시간 증강현실(AR), 모션 캡처한 영상을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라이브 링크, A.I. 음성복원, 얼굴 변형, 홀로그램 기술 등이다.
<아바타싱어>의 경우 1년의 사전 제작 기간을 거쳐 2022년 8월에 첫 방송되었는데, 회당 10억 원의 제작비 투입(총 150억 원)과 국내 최초 라이브 링크 기술 접목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제작진에 따르면 라이브 링크 제작 시스템이란 모션 캡처를 실제 무대로 증강하는 기술로, 데이터를 하드디스크에 저장하지 않고 광케이블을 통해 바로 스튜디오로 송출하는 시스템이다. 한정된 데이터 용량으로 진행상 어려움은 있었지만 국내 최초로 해당 기술을 시연했다는 점에서 제작진은 많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라이브 링크는 프로그램으로 구현한 데이터를 저장 과정 없이 바로 송출하는 기술이다.
출처: 언리얼 엔진<스타탄생>은 메타버스 예능으로 분류되지만 기술 구현보다는 가상 캐릭터 아바타를 통한 ‘인생 리셋’이라는 메시지에 보다 집중한 프로그램이다. 유튜브 인기 콘텐츠인 ‘매드몬스터’에서 힌트를 얻어 제작된 작품이기에 고비용의 A.I. 기술을 사용하는 대신 스마트폰 얼굴 변형 앱인 스노우와 틱톡을 활용하여 태블릿 PC를 이용해 촬영되었다.
스마트폰 앱을 도구로 사용하다 보니, 앱의 필터값 미세 설정은 작가 등 제작진이 일일이 수동으로 진행하면서 많은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앱을 쓰더라도 사람에 따라 얼굴 변형이 잘 되지 않는 얼굴이 있고, 미리 확정해둔 필터 값이 녹화 당일 무대 조명이나 카메라와의 거리 때문에 얼굴 변형에 실패하는 등 예기치 못했던 기술상 애로점이 있었다고 한다. 기존 앱 활용으로 제작비 부담은 거의 없었지만, 앱 기술 완성도의 미흡함을 제작진이 수작업을 통해 메꿔야 하는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스마트폰 카메라 앱으로 변형한 외모로 평소와 전혀
다른 이미지에 도전한 <스타탄생>의 성시경
마지막으로 <아바드림>의 경우, 메타버스 콘텐츠 전문 외부 제작사가 직접 제작, TV조선에 편성, 방송된 사례다. 해당 업체의 경우 웹 3.0에 기반한 메타버스 콘텐츠 분야에서 선두 주자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그램 구성과 사용된 기술을 기준으로 할 때, 제작비는 <아바타싱어> 이상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작 관계자의 설명이다.
<아바타싱어>가 미국 FOX사의 디지털 아바타 뮤직 서바이벌 쇼 <얼터 에고(Alter Ego)>와 궤를 같이하고, <스타탄생>이 유튜브 콘텐츠 매드몬스터에서 영감을 받은 반면, <아바드림>은 여러 개의 다른 코너를 복합 구성하여, 다양한 기술의 시연에 집중하고 있다. A.I. 음성복원과 홀로그램을 통한 헌정 무대가 가장 화제성이 높았다. 헌정 무대는 고인이 된 아티스트를 복원해 가족, 지인과 한 무대에서 협연하게 하는 코너로 故김성재, 故김자옥 씨의 무대가 높은 화제성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방송 제작진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웹 3.0 시대의 개념과 기술 접목을 위해 창작자로서 호기심과 실험정신을 발휘, 다양한 형태의 메타버스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 비용에 대한 압박 등으로 인해 기술 구현의 완성도가 미흡해지면서, 타깃 시청층인 MZ세대나 그 외 일반 시청자 모두에게 큰 반응을 얻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소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시청자, 언론의 반응과 저조한 시청률 속에 제작진은 향후 메타버스 예능 제작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를 진행한 제작자와 업계 관계자들 모두 메타버스와 A.I. 기술 접목 프로그램 제작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것이라고 전망은 하면서도, 현시점에서 기술 구현 난이도, 제작비 확보 문제 등으로 인해 규모가 큰 정규 프로그램의 제작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2022년 5,560억 원에 달하는 메타버스 관련 예산 지원을 발표했다.1) 하지만 콘텐츠 제작 지원 시 고급 인력과 설비를 갖추고 있는 지상파와, 메이저 종편채널을 역차별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이 존재하는 만큼 예산이 적재적소에 운용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A.I. 기술 구현의 완성도는 들인 시간과 비용에 비례하기에, 전문 인력 교육 등을 통해 인재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작진 차원에서는 화제성과 신기술 시연에 대한 의욕을 앞세우기보다는 실감미디어2) 성격이 강한 메타버스와 3D 기반의 A.I. 기술을 접목한 콘텐츠가 평면 매체인 TV를 통해 어떻게 시청자들에게 호소력 있는 콘텐츠로 다가갈지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광고 시장성 악화와 플랫폼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방송사는 시청률이 담보되지 않은데다 많은 제작비가 필요한 메타버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이 매우 힘든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메타버스 프로그램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위한 투자로 인식하여 회사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언론의 경우 자극적인 헤드라인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심도 있게 작성된 기획 기사를 통해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방송 제작진들과 시청자들에게 균형 잡힌 통찰력을 제공한다면 대한민국 메타버스 프로그램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간 드라마, K-Pop등을 통해 글로벌 콘텐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앞으로 ‘K-메타버스 콘텐츠’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TV 방송사 제작진과 협력 업체에게 각계가 합당한 평가와 지원, 격려를 지속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