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기반의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인 FAST는 아직 우리나라에선 낯선 개념이지만,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는 활발히 서비스되고 있다. 최근 OTT 요금제 개편 이슈와 채널 다변화로 인해 FAST에 대한 국내 미디어의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FAST는 방송의 새로운 미래가 될 수 있을까?
넷플릭스는 ‘몰아보기(binge viewing)’ 편성 방법을 도입하여 기존 TV와 차별화에 성공했다. 이전의 TV는 시간을 축으로 콘텐츠를 순환시키지만, OTT는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전 편을 시청할 수 있다. 소비자의 시청 방법을 바꾸었다고 해서 우리는 OTT를 뉴미디어, 기존 TV는 올드미디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올드미디어의 범주에서 파생된 OTT 서비스가 있다. FAST(Free Advertising Streaming TV)가 그것이다. FAST는 24시간 돌아가는 채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보고 싶을 때 특정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OTT와는 방식이 다르다. 그럼 기존 방송 채널과는 무엇이 다를까? Free! 돈 낼 필요 없는 무료 채널이라는 점이다. 다만 광고는 건너뛰기 없이 시청해야 하는 조건이다.
그리고 이 채널들은 조금 특이하다. ‘방송국’ 이름이 걸려 있지 않고 ‘콘텐츠’ 자체가 채널의 주인이다. 단일 시리즈(Single Series) 스트리밍 채널 방식으로 서비스된다. 예를 들면, <응답하라 1997>(tvN) 채널이나 <무한도전>(MBC) 채널처럼 인기 높은 과거 드라마나 오락 콘텐츠를 24시간 내내 편성한다. 시청자는 특정 시점을 선택하지 않고 그냥 아무 때나 채널로 진입하면 된다. 물론 인기 높은 뉴스, 스포츠 FAST 채널들은 채널 편성표를 확인하고 시청하는 기존방식과 거의 동일하게 제공되기도 한다.
미국의 분석회사 TV REV는 최근 발행한 FAST 분석 보고서에서 ‘FAST는 차세대 케이블(Next Cable)’이라고 정의한다. 1948년 미국에서 처음 출발한 케이블 TV는 본래 ‘재방송을 볼 수 있는 미디어’로 시작했다. FAST도 케이블의 탄생 의미와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최고의 선택을 위한 최고의 질문』의 저자 워런 버거(Warren Berger)는 그의 책에서 “혁신이란 익숙한 상황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FAST는 이런 혁신에 가깝다. 기존의 익숙했던 TV 경험을 OTT 기술로 만들어 냈다는 의미이다.
2014년 당시 스타트업이었던 플루토(Pluto)TV는 온디맨드(on demand, 수요가 있을 때 즉시 서비스) 방식이 주류였던 OTT 시장에서 TV처럼 인식될 수 있는 OTT를 만들면 넷플릭스 등과 차별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방송 채널과 유사한 방식의 OTT를 개발했다. FAST의 시초인 플루토TV는 2019년 파라마운트(당시 ViacomCBS)에 무려 4,800억 원에 인수되었다. 2022년 현재 280여 개의 채널과 월 활성 사용자 수 6,800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 FAST와 매우 흡사한 서비스가 있었다. 지금은 KT에 인수된 HCN(현대케이블방송)과 판도라TV가 합작하여 2012년에 무료 OTT로 출범한 ‘에브리온TV’가 그것이다. 무료 채널 방식과 광고 수익 모델은 거의 흡사하다. 하지만 선구적인 이 서비스는 아쉽게도 네트워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2019년을 문을 닫았다.
에브리온TV가 문을 닫은 시점, 미국의 지상파는 1,000억 원을 주고 FAST 회사를 인수했다. 현재 ABC 방송국을 제외한 모든 미국 지상파들은 FAST에 진입했다. 파라마운트(Pluto TV), FOX(TUBI), NBCU(피콕), 컴캐스트(XUMO)가 모두 FAST를 제공 중이다.
미국은 가정의 60%가 1개 이상의 FAST를 경험하고 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FAST의 인기가 높다. 흥미로운 것은 FAST 채널과 SVOD의 시청 시간을 분석했는데, FAST는 주중에, SVOD는 주말에 이용률이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두 서비스가 보완적 관계로 작용하며 슬기로운 콘텐츠 소비를 제공하는 것이다. 2022년 미국에서 FAST로 제공되는 채널의 개수는 무려 1,400여 개이고, 지상파 3개 사, 삼성, 로쿠 등 22개가 넘는 서비스들이 경쟁하고 있다.
미국 FAST 채널 증가 추이
출처: Variety VIP+FAST의 경쟁자들은 매우 다양하다. 지상파, 케이블 등 기존 방송국들, 스마트TV, 로쿠, 아마존 등 CTV 진영 그리고 기존 OTT들이 FAST 추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절대 강자는 스마트TV와 커넥티드TV 진영이다. 이들을 통칭 묶어서 ‘CTV’라고 부른다. 이들은 OTT 앱들을 모두 모아 제공하는 일종의 ‘OTT 백화점’이다. 지상파 등 방송국들이 FAST 채널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TV 앱을 개발하여 CTV 진영과의 협상을 통해 입점해야 하지만 CTV는 앱 방식이 아니라 콘텐츠 목록에서 선택만 하면 채널로 진입할 수 있다. 시청자 편의성 측면에서 한발 앞서 있다. 단말 제조회사들은 전 세계에 판매된 CTV에 동시 또는 선별적으로 서비스를 론칭할 수도 있다.
잠깐! 그렇다면 CTV가 곧 지금의 케이블, IPTV 아닌가? 맞다. OTT를 시청하는 단말이 스마트폰에서 다시 TV가 되면서 CTV의 미디어 권력은 소리 없이 성장했다. FAST가 기존 유료방송 플랫폼과 가장 다른 점은 데이터 활용방식이다. CTV 진영은 소위 오디오 인식 기술(ACR)을 통해 데이터 수집에 동의한 시청자들의 시청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타깃 광고에 활용하거나 FAST 채널을 고객 취향으로 빠르게 조정하고 있다.
미국 분석 업체 Interpret는 FAST의 광고 수익이 2022년 200억 달러(약 28조 4,900억 원)를 넘을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는 2020년 이후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최근 급격히 성장한 이유는 팬데믹과 경기 불황이 연속되며 청자들의 무료 시청 욕구를 견인했기 때문이다.
FAST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무엇일까? 뉴스, 스포츠, 영화, 키즈 콘텐츠다. 기존 TV와 인기 장르는 비슷해도 방송 채널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뉴스는 지상파의 지역 뉴스, 케이블방송의 지역 채널 뉴스 등 시청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현지 뉴스에 집중한다. 그리고 스포츠도 지역의 고등학교, 커뮤니티 스포츠, 요가, 서핑 등 생활과 밀접한 스포츠가 인기다. 영화는 고전, 인디영화 등 롱테일 성향이 강하고 키즈는 유튜브에서 인기를 구가하는 키즈 유튜버들의 콘텐츠를 제공한다. FAST 채널들은 구작 방송 콘텐츠나 유튜브 영상 그리고 시청자 취향에 기반한 롱테일 콘텐츠들로 구성되어 있다. 콘텐츠 가치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에는 삼성, LG 등 스마트TV와 SK브로드밴드가 출시한 CTV인 PlayZ에 FAST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아직 숫자는 많지 않지만 미디어 업계의 관심은 매우 높다. 스타트업 ‘뉴 아이디’는 국내 FAST에서 선도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MBC플러스, MBN 등 방송국들과 파트너쉽을 강화하여 한국에서만 40여 개의 FAST 채널을 삼성 스마트TV에 입점 예정이다. 특히 이들은 K-콘텐츠로 미국, 유럽 등 글로벌 FAST 채널 등에 서비스를 확대하고자 한다. 다만, 플루토TV, XUMO처럼 직접 FAST 앱을 만들어 진입하는 사례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스마트TV의 TV Plus (FAST채널) UI 화면
삼성 스마트TV에서 FAST를 경험해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채널의 화질이 균질하지 못하고 스마트TV라면 구현해야 할 최소 수준인 HD 화질에도 못 미치는 채널들이 많다. FAST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기에 아직 미흡하다. 한국의 방송국들 또한 FAST 채널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미국 방송국들 보다 적극적이지는 않다. FAST가 기존 미디어를 위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CTV의 확대는 FAST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은 OTT 시청 단말로 모바일이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TV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결국 FAST는 기다리면 오는 시장일 수밖에 없다.
FAST는 콘텐츠/동일 장르별로 묶어 채널로 만들어 글로벌로 전파가 가능한 것이 매우 큰 장점이자 콘텐츠 소유자들에게 새로운 수익 기회를 제공한다.
FAST의 첫 시작이 2014년이라면 한국의 FAST는 그보다 5~7년 늦었다. 하지만 어떤 국가보다도 풍부한 콘텐츠의 저장고인 한국이 아닌가. FAST가 K-콘텐츠의 글로벌 확장에 새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