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제작사들의 수출 전략도 진화하고 있다. 제작이 완료된 콘텐츠를 수출하거나 원작을 리메이크하는 방식의 IP 수출에서 한 단계 나아가 현지 제작사와의 협업을 통한 새로운 콘텐츠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스튜디오드래곤, SLL 담당자와의 자문 인터뷰를 통해 국내 제작사들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에 이어 2022년 애플TV플러스, 아마존프라임비디오까지 한국어 서비스를 지원하며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는 글로벌 OTT가 증가하면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유통 플랫폼이 증가한다고 해서 모든 콘텐츠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이유는 최근 5년간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방영된 한국 콘텐츠들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플릭스패트롤(FlixPatrol)의 집계에 의하면 <오징어 게임>(넷플릭스)은 2021년 넷플릭스 TV Shows 부문에서 9월부터 11월 말까지 누적 시청시간(viewing hours) 21억 뷰 이상을 기록하며 1위를 달성하였으며 2위를 기록한 <종이의 집>과 큰 격차를 보였다. 또한 <빈센조>(tvN)와 <갯마을 차차차>(tvN) 역시 높은 기록을 달성했는데, 두 프로그램이 50여 개국에서 제한적으로 방영한 것을 고려하면 이 또한 높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2021년 넷플릭스 TV Shows 부문 순위
출처: 플릭스패트롤2022년도 이러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와 최근 종영한 <작은 아씨들>(tvN) 역시 글로벌 TV Show Top 10에 포함되었다. 10월 현재 <작은 아씨들>은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1~3위에 포함되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SVOD 서비스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2021년 글로벌 시장에서 넷플릭스 가입자가 총 1,810만 명 늘어났는데, EMEA(유럽, 중동, 아프리카 지역) 733만 명 다음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가입자가 710만 명 추가됐다. 이는 전체 순증 가입자의 40%다(북미 지역의 순증 가입자 127만 명, 라틴 아메리카 240만명).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넷플릭스 가입자가 3,263만 명이 된 것은 방영되는 작품마다 놀라운 스토리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한국 콘텐츠의 역할이 크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국내 콘텐츠 제작사들의 해외 시장 진출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OTT 시장 진출 초반에는 제작사 인수합병을 통해 제작 역량을 높임으로써 매출을 늘리고 마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식이었으나, 2~3년 전부터 IP를 보유하고 다수의 OTT 플랫폼과의 거래를 통해 전체 수익을 높이는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더 나아가 이제는 해외 제작사를 인수하며 방송영상시장의 규모가 가장 큰 북미시장에서 콘텐츠를 기획개발을 거쳐 제작하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사랑의 불시착>(tvN)으로 점화 되었다면 <오징어 게임>을 통해 본격화 되었습니다. 최근 3년, K-콘텐츠 시장은 걷잡을 수 없이 판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해외에서 공동기획/제작을 하고싶어 하는 업체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들과 함께 공동제작을 하게 된다면 예산이 많이 들겠지만, 글로벌 커버리지를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죠.” - 원설란(스튜디오드래곤 전략커뮤니케이션팀)
구체적으로 CJ ENM은 2021년 스카이댄스미디어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데 이어 최근 사명을 피프스시즌(Fifth Season)으로 변경한 엔데버 콘텐트의 지분 80%를 9,300억 원에 인수하였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스카이댄스미디어, 애플TV플러스와 <빅 도어 프라이즈>, 그리고 유니버설인터내셔널 스튜디오와 <설계자들>을 공동제작 중이다. 한편, 스튜디오 체제로 전환하여 15개 제작사에 지분을 투자하고 있는 SLL(구 JTBC스튜디오) 역시 미국 제작사 wiip(word, idea, imagination, productions)의 지분 80%를 1,338억 원에 인수하였다. 지금까지 완성된 프로그램이나 포맷 판매를 통해 해외 유통 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했던 방식에서 나아가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해외 제작사와 공동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해외 제작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크리에이터들의 결정 사항이다. 현지 시장에 대한 노하우가 축적되고 네트워크를 가진 크리에이터 그룹이 영상화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제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해외 제작 작품의 선정은 기본적으로 크리에이터들의 노하우, 의지, 생각들이 제일 중요합니다. 영상으로 재밌게 풀어낼 수 있느냐를 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 이태호(SLL America)
또한 해외 시장은 콘텐츠의 기획개발에 소요되는 기간이 다르다. 기획개발에만 3~5년씩 소요되는 등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기획 단계에 있는 작품들의 제작 여부를 확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투자받기 전 스튜디오 내부에서 감당해야 하는 개발 비용도 커진다. 즉 기획 단계에 있는 작품이 많아지면서 개발 비용이 급증하고, 투자 비용의 회수도 길어진다.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유통하는 콘텐츠의 평균 제작비용이 높아진 만큼 사전 기획과 검증 단계를 철저하게 함으로써 실패 확률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의 기대수익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북미 영상산업의 시스템과 IP를 기반으로 콘텐츠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높아진 리스크를 낮추고 제작 과정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작 시스템의 효율화가 중요해졌다. 제작 규모가 커지고 해외 제작사와의 공동제작이 늘어나면서 제작 시간과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다수의 글로벌 OTT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으로써 나타난 변화는 오리지널 콘텐츠의 제작 의뢰뿐만 아니라 구작 콘텐츠의 구매도 늘어난다는 점이다. 한국 콘텐츠의 높은 인기에 긍정적 외부 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존 작가와 스타 감독 외에도 잠재력이 있는 창작자들이 데뷔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지고, 한국적 스토리를 선호하는 글로벌 플랫폼을 향한 피칭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능력 있는 쇼 러너와 함께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되고 있는 점도 새로운 변화라 볼 수 있다. 국내 제작사들은 성공 사례를 기반으로 글로벌 OTT에 공급할 수 있도록 콘텐츠 제작 역량을 높이는 중이다.
국내 스튜디오들이 해외 제작사와 공동 제작한 <빅 도어 프라이즈>나 <설계자들>과 같은 작품들의 성공 여부는 향후 해외 시장에서의 제작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도전의 결과는 현지 제작을 이어갈지 판단하는 강력한 시그널이 될 것이다. 또한 OTT들의 전략과 성장 속도도 한국 콘텐츠 기업의 투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광고 모델을 도입하는 SVOD가 늘어나는 것은 OTT 간 경쟁이 심화하면서 가입자 확보가 절실함을 의미한다. 증권가에서는 광고 모델 도입으로 넷플릭스는 북미 지역에서만 750만 명의 구독자가 증가하고 광고 수익도 8,600억 달러(약 1,237조 1,1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당분간 글로벌 OTT의 콘텐츠 수요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콘텐츠 제작사 역시 현지 제작을 통해 한 차원 높게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