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12시가 되면 전국에 울려 퍼지는 소리, “딩동댕~ 전국 ~ 노래자랑”. 이 세 가지 소리는 각각 다른 주체가 낸다. ‘딩동댕’은 실로폰 소리로 출연자에게 합격을 뜻하는 행복한 소리다. ‘전국~’은 푸근한 명 사회자 송해의 선창이고, ‘노래자랑~’은 객석에 있는 관객들의 신나는 외침이다. 얼마 전 송해 선생이 타계하여 이제 그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전국노래자랑>(KBS1)과 송해라는 인물이 어떻게 대중문화와 우리 사회의 신화가 되었는지, ‘딩동댕’,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3가지 열쇳말로 풀어보고자 한다.
<전국노래자랑>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다. 본방송보다 먼저 진행되는 예심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심사위원들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합격과 불합격을 알리는 용이한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고안한 것이 딩동댕과 땡이었으리라. 딩동댕은 기쁜 소리지만, 땡은 불합격을 알리는 암울한 신호다. 하지만 ‘불합격’이라는 말을 직접 듣는 것보다는 ‘땡’이라는 신호를 들었을 때 충격이 덜할 것이다. 특히나 방송에 처음 출연하는 일반인이 불합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경직되고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시청자에게 전해져 민망함이 증폭될 수도 있다. 땡은 출연자의 불쾌함을 감쇄시켜주고, 시청자들의 불편함을 줄여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땡을 받은 출연자들이 노래를 계속하거나 춤을 계속 추는 이유는 땡이 가진 ‘풍선에 바람 빼는’ 효과 때문일 것이다. 긴장감으로 팽팽한 출연자에게 땡은 옆구리를 간지럽히듯 합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심스레 에둘러 알려준다. 긴장감이 없어진 출연자의 편안한 모습에 시청자들도 함께 웃으며 남의 ‘불운’에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되자, 땡을 일부러 노리는 출연자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음치에 가깝지만 자신 있게 노래 부르는 사람, 독특한 율동으로 시청자의 박수를 받는 사람, 눈에 띄는 복장과 분장으로 웃음을 받는 사람. 딩동댕은 받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입에 오르내림으로써 화제가 되는 보상을 받은 그들이야말로 <전국노래자랑>의 진정한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탈락과 상관없이 무대를 즐겼던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들
출처: KBS광주 유튜브 채널그런 점에서 <전국노래자랑>은 앞서가는 방송의 모델을 이미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포츠 중계가 프로 선수들의 뛰어난 경기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일방적이고, 음악 쇼 프로그램도 아이돌 스타의 칼군무를 보여주기만 하는 ‘송신자→수신자’ 모델이라면, <전국노래자랑>은 수신자가 주인공이 되는 ‘송신자↔수신자’모델의 전형이라 하겠다. 예능 프로그램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이미 1980년에 선취된 것이다. 지금도 공영방송의 책무로 언급되는 ‘시청자가 주인인 방송’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전국노래자랑>의 ‘땡’은 시청자 주권 실현의 실마리를 보여주었다.
송해가 “전국”을 선창하면 객석이 “노래자랑”이라고 따라 외치는 장면 역시 방송을 만드는 사람과 시청자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재미없다고 편집해버렸을 불합격 출연자를 주인공으로 만든 최고의 수훈갑은 송해라는 데 이의를 달 수 없다. 송해는 ‘땡’을 받은 출연자들이 쑥스러워하지 않도록 출연자를 존중하며 유머로 위로한다. 오디션을 통과하지 못한 출연자를 대하는 송해를 보는 시청자들은 약자를 귀하게 여기며 마음 상하지 않게 보듬어주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따뜻함을 느낀다. 공부 잘하는 재주가 없어서 세상으로부터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 자식을, 명절의 고향집에서 아버지가 거칠지만 두꺼운 손으로 토닥여주는 그 다독임 말이다.
송해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월남했고, <가로수를 누비며>(TBC)라는 교통 안내 방송의 진행자로 10여 년 이상을 활동하다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참척의 고통을 겪었다. 진행하는 내내 “안전운전하세요”라고 외쳤던 그가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을 잃는 운명의 장난을 어떻게 삭였을까.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에서 만난 출연자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1997년쯤 필자가 KBS 재직 시절 만들었던 <가요무대>(KBS1)에 송해 선생이 출연했었다. 그는 수많은 애창곡 중 조명암이 작사한 ‘아주까리 등불’을 골랐다. 담담하게 읊어나가는 노랫말은 송해 선생의 가슴 속 깊이 자리한 한의 정체를 상기시켰다.
피리를 불어 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산 넘어 고개 넘어 까치가 운다
고향길 구십 리에 어머니를 잃고서
네 울면 저녁별이 숨어 버린다
구슬프게 부르는 ‘아주까리 등불’에 등장하는 아가는 어머니를 두고 남쪽으로 내려온 뒤 눈물로 평생을 보냈을 송해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고 이해하는 공감 능력의 근원을 본 듯했다.
진행자 송해의 또 다른 탁월성은 지극한 겸손함이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고령 MC1)였던 그는 나이를 내세우는 세태와 달리 한없이 자신을 낮추었다. 어린아이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 했던 호칭도 ‘송해 오빠’였고, 어린 출연자를 위해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며 진행했다. 출연자 중 지역 특산물을 준비해와서는 송해 선생에게 잡수어보라고 선사하는 경우에도 어느 곳에서나 맛있게 맛봄으로써 방문한 지역에 대한 존중심을 표현했다.
언제나 유쾌한 모습으로 출연자들을 대했던 진행자 송해
출처: <전국노래자랑> 네이버TV 홈페이지필자가 KBS에 재직하던 시절, 특집 프로그램을 위해 송해 선생을 만나기로 한 일이 있었는데, 약속 시간 전에 미리 커피숍에 나와 있던 모습에 당황했었다. 선배들에 따르면 송해 선생은 약속 시간 30분 전에 항상 미리 나와 계신다는 것이었다. 방송계 어른께서 이토록 겸손하게 방송에 임한다는 사실은 어린 연출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촬영을 마친 후 뒤풀이 자리에서 편안하게 제작진들과 술을 즐기시던 모습에서는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송해는 악극단 출신으로 만담과 코미디, 연기와 노래에도 탁월했다. 출연자들과 합을 맞춰 연극 공연을 하듯 역할을 설정하고 연기를 하기도 하고, 댄서와 함께 춤을 추며 출연자의 흥을 돋웠다. <전국노래자랑>은 송해가 이끄는 한 편의 버라이어티 쇼였다. 필자가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전남 함평에는 군청 앞에 함평극장이 있었고, 영화뿐만 아니라 극장 쇼가 틈틈이 펼쳐지기도 했다. 당대의 유명 연예인들 가령 김희갑, 구봉서, 배삼룡 등과 함께 송해도 동창여관이라는 큰 숙소에 머물며 순회공연을 했다고 한다. 전국을 순회하는 극장식 쇼는 컬러 텔레비전이 등장한 1980년대에는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1980년 11월 방송을 시작한 <전국노래자랑>이었다. 극장식 쇼와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자가 송해라는 사실은 미디어의 극적인 변화에도 중심인물은 변화하지 않은 기묘한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신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우리가 만든 신화를 곧바로 깨는 환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화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믿고 싶은 공통된 믿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에 따라 추앙과 혐오를 반복하는 시대적 요동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문화가 동의한 단단한 신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송해라는 인물일 것이다. 진정한 어르신을 찾기 어려운 시대, 송해는 대중문화의 어르신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어르신이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 지역을 불문하고 아픔에 공감하고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사람들을 존중하신 어르신. 우리 사회가 그를 잃은 것은 대중문화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손실이다. 이 빈자리를 어떻게 채울까? 우리 앞에 큰 과제가 남겨졌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