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스트리밍이 텔레비전을 추월했다. 올해 7월 닐슨의 미국 플랫폼별 통합 시청 점유율 조사1)에 따르면 스트리밍 서비스는 지상파 시청 점유율(21.6%)과 케이블 시청 점유율(34.4%)을 추월해 가장 높은 점유율(34.8%)을 기록했다. 넷플릭스는 8%의 시청 점유율로 스트리밍 서비스 중 1위였다. 미국에서의 8% 점유율은 의미가 꽤 크다. 영국 채널 4의 CEO 알렉스 마혼의 말대로 “넷플릭스는 모든 국가에서 1%의 사람들을 합하여 시청자를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커미셔닝(commissioning)과 스트리밍 편성(programming)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커미셔닝은 방송사가 제작자에게 프로그램을 의뢰하고 발주하는 일련의 절차로, 방송사 서비스 가치에 부합하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소재, 창작자를 선정해 기획·제작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넷플릭스는 190여 개국 2억 명 이상의 구독자에게 서비스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국어 및 다국적 스트리밍 OTT 플랫폼으로, 60% 이상의 가입자가 미국 외 지역에 있어서 코로나19 이전에도 다중 지역 현지화 전략을 커미셔닝에 활용해왔다. 그런데 <킹덤>, <스위트홈>, <오징어 게임> 등의 K-콘텐츠는 같은 문화권이 아닌 시청자 집단에게는 매우 낯선, 기존 방송사나 영화사가 추구하는 블록버스터 장르 국제주의와는 다른 장르 커미셔닝이다. 다수의 글로벌 시청자보다 글로벌 틈새 시청자(global niche audiences)에 소구하는 “방송사에서 폐기된 장르를 부활시키는 전략” 이다(Cunningham & Scarlata, 2020). 실제로 공포물, 좀비물, 공상과학, 10대 및 MZ세대를 타깃으로 한 장르는 넷플릭스에 의해 재조명된 장르이다. 앞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성공한 K-콘텐츠는 국내 방송사 커미셔너가 선택하기 어려운 소재인데다, 장르적 특징이 강해 대중적 인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넷플릭스가 각국의 시청자 집단에서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없는, 제작 실행 가능성이 낮은 작품을 과감히 커미셔닝하는 자신감의 근거는 티끌 모아 ‘서서히’ 태산이 되는 시청자와 ‘현지 국가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야기’를 활용하는 틈새 전략에 있다. 이들은 일시적이고 단발성인 시청 성과를 위해 경쟁하기보다, 인구 통계적으로 대표성을 띨수 없는 소규모 취향 집단을 대상으로 콘텐츠 유통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롱런 전략을 펼친다.
국내 창작자들이 넷플릭스와의 제작 경험을 넓혀가면서 IP의 중요성을 인지함에 따라 거래 방식의 변화도 포착된다. <킹덤>을 제작했던 에이스토리는 IP를 보유하는 라이선스 방식으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를 넷플릭스에 유통시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공교롭게 이 작품도 지상파 채널 커미셔닝을 통과하지 못했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 주인공인, 다양성과 소수자를 소재로 한, 지상파가 아닌 신생 방송 채널 기획의 한국어 드라마가 방송 송출과 동시에 전 세계에서 흥행한 현상은 텔레비전 시대에 볼 수 없던 기이한 광경이다. 넷플릭스 시청 순위 제공 사이트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종영 직후 21개국 1위, 71개국에서 10위권 안에 들며 국내 텔레비전 동시 방영작으로는 최고 시청 기록을 세웠다. 몰아보기를 선호하는 넷플릭스 시청자 특성상 ‘제2의 <오징어 게임>’ 신드롬도 기대할만 하다. 넷플릭스가 지난해부터 공개하기 시작한 TOP10 공식 집계에 따르면, 8월 3주차까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누적 시청 기록은 4억 4백만 뷰가 넘는다. 넷플릭스는 이 작품을 영어, 일본어, 힌두어, 태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더빙판으로 제작해 9월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새로운 글로벌 롱런 기록을 세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8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의 시청 시간은 7,700만 회 이상이며, 공개 이후 누적 시청 시간은 약 4억 4백만 뷰 이상이다.
출처: https://top10.netflix.com/tv-non-english국내 OTT 플랫폼의 고민은 더 커졌다. K-콘텐츠의 주가가 높아질수록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창작자 저작권이 보장되는 거래 방식이 늘어날 전망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 저작권을 몰수하는 약탈적 플랫폼인데다 제작비를 상승시켜 국내 제작 시장을 교란시킨다’며 맹공하지만, K-콘텐츠와 창작자들의 글로벌 교두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오징어 게임>은 올 8월 현재 누적 시청 시간 약 23억 시간으로 대략 2억 명이 넘는 글로벌 시청자가 본 셈이고, 약 6억 6,000시간의 누적 시청 시간을 기록 중인 <지금 우리 학교는>은 대략 5,000만 명 내외가 시청했으리라 추정된다. 오리지널 시리즈가 아닌 <사랑의 불시착>(tvN), <이태원 클라쓰>(JTBC), <응답하라 1988>(tvN), <빈센조>(tvN), <갯마을 차차차>(tvN) 등 라이선스 작품도 200일 이상 넷플릭스 TOP100 시리즈에 머물며 롱런하고 있다. 넷플릭스 구독자 사이에서 K-콘텐츠 시청층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넷플릭스는 많은 타이틀을 제공하기보다 작품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콘텐츠 간 인접효과를 극대화하는 넛지(nudge) 전략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정된 콘텐츠 자원 안에서 시청자 선택이 용이하도록 다양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활용해 시청을 ‘슬그머니’ 유도하는 것이다. 창작자, 출연자, 작품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해체해 트랜스미디어로 넛지하는 방식 몇 가지를 살펴보자.
우선 장르 IP를 유기적으로 직조하는 시청 흐름 전략(Audience flow strategy)을 들 수 있다. 통합된 엔터테인먼트 경험을 만들기 위해 픽션·논픽션의 필수 요소가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여러 전달 채널에 체계적으로 분산되도록 트랜스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림 1]은 넷플릭스 코리아의 공식 인스타그램의 게시물로 각기 다른 작품에서 유사성 있는 장면 또는 연기를 추출해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플랫폼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하는 예시이다. 올해 공개된 오리지널 시리즈 <종이의 집:공동경제구역> 홍보를 위해 넷플릭스에 서비스 되고 있는 <스타트업>(tvN), <갯마을 차차차>, <더 킹: 영원의 군주>(SBS)에 등장하는 장면을 추출해 ‘머리를 묶는다는 건 무슨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라는 스토리텔링으로 엮는다. <오징어 게임>, <괴물>(JTBC)의 눈싸움 장면으로 이야기 접점을 찾아내고 배우 박해수를 소개하기 위해 <슬기로운 감빵생활>(tvN)의 유사 장면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림 1] 각 작품에서 유사 장면 또는 접점을 추출해 플랫폼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한 사례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인스타그램[그림 2]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출연 배우와 넷플릭스 서비스 작품의 배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구독자의 시청 선택을 유도한다. 작품의 메타데이터에서 여러 장면, 스토리텔링 요소를 추출해 언번들링(unbundling)하고 새롭게 번들링(bundling)하는 플랫폼 스토리텔링은 기존 구독자를 유지하고 신규 가입자를 유인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림 2]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출연자 필모그래피를 이용해 작품 선택을 유인하는 메시지 생성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인스타그램팬들이 제작하는 비공식적인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과 트랜스텍스트, 밈(meme)도 플랫폼 스토리텔링에 기여한다. 예컨대 2021년 <오징어 게임> 흥행 당시 해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 계정에서는 볼만한 K-콘텐츠를 추천해달라는 게시물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전 세계 구독자가 K-콘텐츠를 대규모로 발견하던 이때 소셜미디어에서는 <부산행>을 추천하는 언급이 많았는데, 이것이 넷플릭스의 콘텐츠 전략이었는지 팬들의 자발적 추천인지는 확실치 않다. <부산행>은 넷플릭스에 알고리즘 추천작으로 올라왔고 연이어 연상호 감독의 디스토피아 장르인 <지옥>과 좀비물 <지금 우리 학교는>이 공개되었다. 팬과 커미셔닝 전략이 조우해 새로운 시청 흐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그림 3]
[그림 3] <오징어 게임> 공개 이후, 해당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공유의 <부산행>이 넷플릭스 추천 알고리즘에 올라오고, 연상호 감독의 <지옥>, 좀비물 <지금 우리 학교는>이 순차적으로 공개된 바 있다. 출연자, 창작자, 장르 유사성을 활용한 커미셔닝 전략으로 글로벌 시청 흐름이 이어지는 큰 효과가 있었다.
출처: 넷플릭스넷플릭스와 K-콘텐츠는 몇 년 사이 스트리밍 시장에서 커미셔닝 시너지를 가장 잘 창출해온 환상의 커플이었다. 최근 동남아시아가 스트리밍 시장의 새로운 격전지로 떠오르면서 초국가적인 시청자 집단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넷플릭스와 K-콘텐츠의 밀월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외 OTT 스트리밍 플랫폼 경쟁 심화로 구독자 유입은 물론 이탈 감소(reducing churn)를 막기 위한 콘텐츠 전략 또한 치열한 가운데 OTT 플랫폼의 커미셔닝 전략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무한정 새로운 작품 수를 늘려 유통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작품 수와 비례해 가입자가 증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숙기에 접어든 스트리밍 시장은 가입자 유치보다 유지가 더 힘들어질 수 있다. 특히 너무 많은 볼거리에 노출된 시청자는 콘텐츠 선택에 좌절감을 느낄 때 구독 취소를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플랫폼과 콘텐츠 이용에 효능감을 높이고, 작품의 양보다는 기존 구독자와 신규 가입자 모두를 충족하는 일관된 콘텐츠 서비스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스트리밍]우리가 경험할 스트리밍 시대>, 한정훈, Junghoon’s Direct Media for Audience, 2022.8.
Cunningham, S., & Scarlata, A. (2020). New forms of internationalisation? The impact of Netflix in Australia. Media International Australia, 177(1), 149-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