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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ssue 3

한국 사회의 축소판
리얼리티 게임 쇼

글. 박경식(SBS PD)

‘리얼리티 게임 쇼’ 포맷은 시대와 국가를 넘나들며 각광 받았다. 잔혹성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궁지에 몰린 인간이 보이는 현실적이고 처절한 모습이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한국만의 사회적 특징을 담아낸 리얼리티 게임 쇼로 만들어질 때, 시청자들은 참가자만큼이나 게임에 몰입한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인(?)끼리 싸우는 거 관심 없잖아?”

새 프로그램 아이디어로 리얼리티 게임 쇼 장르를 들이밀 때마다, 선후배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어프렌티스>(NBC), 대 오디션 시대를 열었던 <아메리칸 아이돌>(FOX) 등을 보며 PD의 꿈을 키웠던 나는 항시 물음표를 갖고 살았다. ‘도대체 언제쯤, (혹은 어떻게 해야) 한국의 시청자들이 비연예인들의 게임에 열광할까?’ 오기 반 설렘 반으로 꾸준히 문을 두드리던 중, ‘뭔가 기회가 오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2021년 상반기 유튜브에서는 <머니게임>이, 하반기 넷플릭스에서는 <오징어 게임>이 소위 초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솔깃한 제안이 다가왔다.

“너 예전부터 무슨 게임 같은 거 해 보고 싶다 하지 않았니?”

그렇게 <검은 양 게임>(SBS)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검은 양 게임> 포스터

출처: SBS 홈페이지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글의 맨 앞 문장(한국 사람들은 일반인(?)들의 경쟁에 관심이 없다.)은 무언가 어긋나있다. 일단 리얼리티 게임 쇼 장르에 꼭 비연예인만 출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후배 동료들이 해 준 걱정이 틀린 말도 아니다. 내 기획안 속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비연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명확했다. 만들고자 하는 장르가 게임(game)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의 본 모습(reality)을 드러내야 하는 ‘리얼리티’ ‘게임 쇼’여서다. 인간의 본성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 이 부분이 장르의 승패를 가르는 승부수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래도 방송이 익숙하지 않은 비연예인이 적합하지 않겠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렇듯 제작자가 이 장르에 도전할 때에, 서로 다른 두 관점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과 ‘한국의 시청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 어쩌면 이 두 지점의 간극에서 ‘한국식’ 리얼리티 게임 쇼만의 특징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

“○○이 민심 완전 나락 갔네.”, “○○은 이번 회차로 극락 가네. 재평가 가자!”

<머니게임> 콘텐츠의 댓글 반응 중 꽤나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내용들이다. 실제로 이 콘텐츠는 게임 참가자들의 ‘콘텐츠 밖 현실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는 출연 후 몇 배의 인지도를 얻어 현생의 극락을 맛보았으며, 반대로 누군가는 낙인찍혀 현생의 영향력을 잃고 나락 행을 명받았다. 이 모든 것은 콘텐츠 속 플레이어의 행동이 연기된 것이 아닌 그들의 본 모습이라는 믿음에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이 프로그램 속 몰입도와, 프로그램 밖 화제성을 담보해주었다.

그런데 이 <머니게임>의 참가자 모집 공고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 재미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자격 조건: 돈이 급한 방송인’.

<머니게임> 참가자 모집 공고

출처: 진용진 유튜브 채널

‘Money 게임’에 ‘Money’가 급한 ‘방송인’을 모집한다. 얼마나 영리한 조건인가! 실제 이 콘텐츠에는 수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크리에이터들과 높은 인지도를 지닌 뮤지션들이 참가했고, 그들은 인지도를 무력화하는 거액의 상금 앞에서 본인들의 진짜 모습(reality)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단 2주일 만에 최대 4억 8,0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명제가 ‘돈이 급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게임 안에서 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란 믿음에 충분한 설득력을 제공한 것이다. 그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돈이 급했던’ ‘방송인’ 참가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진짜 감정을 맘껏 내비쳤고, 그 감정이 진해질수록 그들의 게임에 관심을 가지는 시청자들도 점점 늘어났다.

즉, 콘텐츠 나름의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과 ‘한국의 유튜브 시청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K-리얼리티 게임 쇼의 부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든 제작자들에게 4억 8,000만 원이라는 제작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는 앞으로 가성비 좋은(?) 또 다른 필승법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 병폐 드러내는 리얼리티 게임 쇼

사실 비연예인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면서도 출연자들을 한국의 시청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인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콘텐츠들은 이전부터 꾸준히 존재해 왔다. 멀게는 <슈퍼스타 K>(Mnet)로 대변되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짝>(SBS)으로 대변되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있었고, 가깝게는 <강철부대>(채널A), <스트릿 우먼 파이터>(Mnet) 등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이들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꿈(오디션), 사랑(연애 리얼리티), 경쟁과 동지애(서바이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큰 주제 속에 참가자들을 던져 넣어 시청자들이 출연자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지금 당장 유명하지 않을 뿐, 언제든 유명인이 될 수 있는 매력과 잠재력을 보유한 비연예인들을 출연시킨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리얼리티 게임 쇼의 필승법 역시 같은 길 위에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플레이어와 시청자 모두를 공감시킬 주제로 ‘돈’을 선택했고, 누군가는 ‘빈부격차’를 선택했으며, 누군가는 ‘불합리한 지배구조’를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내가 만든 <검은 양 게임>은 ‘차별과 배척’을 선택했다. 심지어 최근의 콘텐츠들은 ‘성별갈등’이나 ‘몸무게’를 소재로 삼아 게임을 진행시키기도 한다. 아니, 이렇게 늘어놓고 다시 한번 읽어보니 이것들이야말로 한국 사회 문제점들의 총집합이 아닌가? 이래서 ‘K’ 리얼리티 게임 쇼인건가?

<검은 양 게임>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배척의 면면을 그려냈다.

출처: SBS 홈페이지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여러 번 언급했듯 한국에서 리얼리티 게임 쇼를 성공시키려면 꼭 잡아야 할 두 마리 토끼, ‘한국 시청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인물을 끌어’들여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드러내게 하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본인의 유명세를 잊을 정도의 강렬한 상황 속에 출연자들을 던져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머니게임>처럼 저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제조건이 성사됐을 때, 리얼리티의 몰입도와 게임의 긴장감 모두가 살아난다. 그리고 그 누구라도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은 결국,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제작자들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고민하고, 그 안에서 출연자들이 진짜 감정을 드러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한국식’ 리얼리티 게임 쇼에서는 한국의 사회가 녹아 있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나름의 소구점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넘어 게임 쇼까지, 한국적 소재가 성공 법칙

“그러니까, 그게 <오징어 게임> 같은 거야?”

<검은 양 게임> 콘텐츠를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소개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다. 물론 나 역시도, <오징어 게임>에 빗대어 <검은 양 게임>을 소개한 적이 종종 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픽션 장르인 <오징어 게임>과 논픽션 리얼리티 장르인 <검은 양 게임>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이야말로 최고의 배우들이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연기’해내는 콘텐츠이고, 리얼리티 게임 쇼는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콘텐츠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오징어 게임>에 한국식 리얼리티 게임 쇼 장르를 비빌 수밖에 없는 것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줄다리기, 달고나, 탈북자, 서울대 출신, 한국의 평범한 엄마 등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절묘하게 녹인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 흥행을 이끌며, K-컬처의 선두주자로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 ‘생존과 인간 존엄’이라는 전 세계인이 공감할 큰 주제 속에 가장 한국적인 것들을 섞어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제패했듯, 한국식 리얼리티 게임 쇼 역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 속에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문을 두드리기를 감히 꿈꿔본다.

  • 필자 소개_ 박경식

    2011년 JTBC 입사, 2016년 SBS 이직. SBS에서 <동물농장>, <그것이 알고 싶다>, <나의 판타집> 등을 거쳐 2022년 <검은 양 게임>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