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에서 노년층은 ‘선생님’으로 떠받들어지거나, 모든 것을 품어주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그려지는 등 단편적인 모습에 그쳤다. 그러나 그들도 누구나와 같이 서툴고, 도전하고, 때로는 까다롭기도 한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최근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들은 이전과 달리 여러 각도로 조명되고 있다.
지난주에 남해 남파랑길을 걸었다. 2016년 개통한 동해 해파랑길에 이어 2020년 10월에 열린 남파랑길. 새로이 정비된 이 길이 또 어떤 매력이 있을지 사뭇 궁금했으나 하필이면 내도록 코로나19 시기가 아니었나. 다행히 얼마 전 방역기준이 바뀐 참에 서둘러 다녀왔다. 하지만 아뿔싸, 동행하게 된 분이 나보다 훌쩍 높은 연배신지라 행동거지가 마냥 조심스러울 밖에. 하지만 남파랑길 21코스에 이르러 라벤더와 금계국이 어우러진 꽃밭을 만나고 난 뒤 다소 불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거기 서보세요. 이쪽으로 고개 돌리고.” 칠십 대이신 선배님의 다정한 음성의 지시에 따랐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인생 사진을 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러 컷을. 남다른 구도며 색감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휴대폰 어플로 편집을 해서 바로바로 톡으로 보내주시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70대 수준이 이렇다.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숱한 명언을 쏟아낸 배우 윤여정 씨 역시 70대가 아닌가. 윤여정씨는 그의 이번 오스카 시상 일정에 동행한 프로그램 <뜻밖의 여정>(tvN) 을 통해 ‘K-할머니’가 아닌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현역 배우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코다>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트로이 코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청각장애를 지닌 그를 위해 시상식 며칠 전부터 수어로 축하 인사를 준비한 윤여정 씨. 당일 코처가 수어로 수상소감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트로피를 들어주는 세심한 배려로 감동을 줬다. 이게 바로 연륜의 힘이다. <뜻밖의 여정>에 초대된 윤여정 씨 지인 중 한 사람인 애니메이션 타이밍 디렉터 김정자 씨는 4년 전에 에미상을 수상한 분이다. 윤여정 씨 막냇동생의 친구이니 연세가 꽤 있을 터, 그럼에도 여전히 현역이라고 한다. “우리가 나이 들수록 인생에 목표가 없어지지 않느냐. 근데 여정 언니가 무언가를 이뤄냄으로써 70이 넘어도 무슨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겠다. 그런 희망을 갖게 해줬다.” 김정자 씨는 윤 언니가 희망을 줬다지만 나는 김정자 씨에게서 희망을 봤다.
<뜻밖의 여정>(tvN) 속 김정자 씨의 말
출처 : tvN 유튜브 채널방송을 보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 평론가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언제쯤 손을 놓아야 박수 칠 때 떠나는 것 일까? 나름 고민 중이던 나에게 김정자 씨가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다면, 코로나19를 빌미 삼아 집안 붙박이 신세를 면치 못하던 나를 집 밖으로 끌어낸 분도 있다. MBN <주간 산악회>에 소개된, 88세의 나이에 여전히 산에 오르는 신옥자 님은 암벽등반에 히말라야 등정도 다섯 차례나 성공하신 분이다. ‘산이 누구도 거부하지 않아서, 모든 이를 품어줘서 좋다’는 신옥자 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방송을 통해 닮고 싶은 어른들을 만난다. 그들의 진취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기운을 얻는다.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등이 펴지고 발걸음이 빨라지니 말이다. 허나 그런 기회는 흔치 않다. 방송이 실버세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간 산악회>(MBN)의 신옥자 산악인
출처 : MBN Entertainment 유튜브 채널오죽이나 관심 없으면 실버세대가 뭘 보고 싶어 하는지, 뭘 궁금해하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겠는가. 지레짐작으로 차려낸 밥상에는 막장 요소가 가득한 아침저녁 일일극, 주말극과 건강정보 프로그램들이 찬으로 오를 뿐이다. 선과 악의 구분의 뚜렷한 등장인물들, 주인공은 늘 가족과 남편에게 헌신했으나 처절하게 배신당하는 여성이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양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 나락으로 떨어진 여자 주인공을 구원하는 흐름 또한 한결같다. 두 주인공이 합심하여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악을 척결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막을 내리곤 한다. 출연자만 다를 뿐 구성과 전개는 복사해서 붙여넣기라도 한 것처럼 똑 닮아있다.
그런가하면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채널에서 매일 아침 방송되는 건강정보 프로그램들은 또 어떤가. 겉으로는 시청자의 건강을 가장 염려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건강보조식품 광고를 위해 마련된 자리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정보 전달과 오락이 합쳐진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이라는 미명 하에 아예 교양 쪽에 편성이 되어 있으나 의사들은 방송에서 해당 식품을 복용하지 않으면 당장에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열변을 토하다가 얼마 후 홈쇼핑에 등장해 해당 보조식품 판매에 목청을 높인다. 건강보조식품이나 한약재, 미용재료 같은 경우 방송에 나오는 순간 바로 검색어에 오르며 판매고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아울러 한동안 몰아치듯이 팔다가 세간의 관심이 시들해지면 이내 다른 품목으로 교체가 되곤 하지 않나. 하지만 방송과 홈쇼핑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지, 쇼닥터들은 또 어떤 상관관계인지, 효과를 봤다는 연예인은 무슨 이득을 얻는지 어르신들로서는 드라마 속 PPL만큼이나 구분이 어렵다. 시청률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골고객을 받들어 모시고 특혜를 줘도 부족할 마당에 오히려 이용이나 하려 들다니 허망하달 밖에.
다행히 최근 들어 세칭 ‘K-할머니’ 중심의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1월에 첫 방송을 시작한 채널S <진격의 할매>와 지난 5월에 종영한 11부작 <뜨거운 씽어즈>(JTBC)다. <진격의 할매>는 김영옥, 나문희, 박정수 세 배우가 젊은이들의 난감한 고민에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는 기획이고 <뜨거운 씽어즈>는 4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세상 좀 살아본 배우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까요?’ 물음표로 가득한 젊은이들에게 노래를 통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이다. 그러나 두 프로그램은 결이 다르다. <진격의 할매>의 세 배우에게 제작진이며 시청자가 바라는 건 이해와 관용이다. 그날의 사연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너그럽게 포용하고 다독여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욕 잘하기로 호가 난 김영옥 씨야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질 수 있겠지만 나문희 씨에게 주어진 역할은 미륵보살과 같은 미소가 아닐는지. 왜 노인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넓디넓은 가슴으로 모든 걸 품어줘야 하는지, 왜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위치여야 하는지, 반대로 왜 노인들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프로그램은 없는지, <진격의 할매>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반면 <뜨거운 씽어즈>의 경우 ‘실버세대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나문희 씨가 부른 ‘나의 옛날 이야기’와 김영옥 씨가 부른 ‘천 개의 바람이 되어’는 연기력을 기반으로 우리를 단숨에 몰입하게 했고 서이숙 씨의 ‘나를 외치다’는 마치 나에게 불러주는, 위로하는 노래 같았다. 특히 나문희 씨와 김영옥 씨는 단원들과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을 통해 모처럼 가슴에 남을 추억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고 그런 이유로 마지막 무대를 못내 아쉬워했다.
실버세대가 좋아하겠거니 지레짐작만 할 것이 아니라, 방송사가 실버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걸 일방적으로 보여줄 것이 아니라, 실버세대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나마 가뭄 중에 단비 모양으로 해갈해 줄 프로그램을 발견했기에 이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이번에 망설임 없이 남해 남파랑길로 향했던 이유가 바로 이 프로그램에 있었다. 배우 정보석 씨가 여행 안내자로 나선 <마을을 걷다: 정보석의 섬마을 이야기>(JNG다).
<마을을 걷다>(JNG) 스틸컷
출처 : JNG배우 한 사람이 국내 각 지역을 누비며 문화와 볼거리, 그 지역 먹거리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KBS1),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KBS1)와 엇비슷한 구성이다. 최불암, 김영철 씨와 마찬가지로 내레이션부터 소개와 소통, 모든 걸 혼자 도맡고 있는 정보석 씨의 대화를 이끄는 솜씨며 공감 능력이 여느 전문 진행자 못지않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행 프로그램들이 추세에 따라 먹방 중심으로 흐르는 반면, <마을을 걷다>는 섬마을 곳곳의 아름다움을 담아가며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전하는 데에 주력한다. 거기에 주민들이 갓 수확한 재료로 차려내는 집밥 한 상은 어찌나 정겹고 소담스러운지. 갈등도 억지 설정도 없는, 담담히 풀어가는 수채화 같은 실버세대 맞춤 방송이다. 살짝 아쉬움이 있다면 이제는 여성 안내자가 등장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