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눈 나빠지게 뭘 그런 걸 봐!”
인물의 형태만 겨우 식별되는 저화질의 <전원일기>(MBC) 영상을 보는 엄마를 구박하다가, 어느샌가 나도 옆에 앉아 함께 보기 시작했다. 그냥 훑어보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편성표를 찾아 수백 개의 채널 속에서 진주알 찾듯이 <전원일기>를 찾아내 제대로 각 잡고 앉아 두 편, 세편씩 정주행을 시작했다.
편성표를 찾아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근데 세상에, 핫하고 트렌디한 드라마도 아닌 옛날 옛적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한 드라마를 보려 편성표를 찾다니 가히 충격적이다.
아직도 가끔 소파에 앉아 <전원일기>를 보는 내 모습이 어이없어 피식 실소가 나온다. 내가 나이를 먹은 건가, 흔히 말해 ‘감 떨어지는’ 시기가 온 건가. 테스트가 필요하다. 운영 중이던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전원일기> 관련 글을 쭉 적어 내려갔다. 주로 젊은 층이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에 이 글이 먹힐까 싶었다.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다음 날 브런치 알람이 끊임없이 울리더니 업로드 하루 만에 조회 수 3만을 훌쩍 넘기고 공유 수는 400을 넘겼다. 심지어 글을 올린 지 3개월이 지났지만 꾸준히 조회 수는 상승세다.
‘나 아직 감 안 떨어졌구나. 이게 요새 트렌드구나’ 생각했다. 작년부터 레트로 감성이 스멀스멀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한물간, 아니 한참 과거로 가 거의 석기시대에 방영된 급의 드라마가 센터로 올라왔다. 급기야 MBC에서는 <전원일기> 특집 다큐멘터리 <다큐 플렉스 - ‘전원일기 2021’>(MBC)까지 제작했다.
20년 전 종영한 드라마 <전원일기>가 다시 트렌드의 중심에 선 건 단순히 중장년층만의 힘이 아니다. 유튜브에 있는 수많은 <전원일기> 관련 콘텐츠가 입증하듯, MZ세대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홀렸듯 말이다.
내가 주로 <전원일기>를 보는 시간은 일과가 다 끝난 늦은 저녁부터 새벽 한 시. 갱년기를 맞아 잠이 없어진 엄마와 거실에서 멍하니 <전원일기>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정이 더없이 푸근하다.
<다큐 플렉스 - ‘전원일기 2021’> 예고편
출처 : MBC life<전원일기> ‘찐팬’으로서, 이 드라마는 요즘 드라마가 품을 수 없는 맛이 있다. 분명 밍밍해서 원픽(One pick) 반찬은 아닌데 있으면 자꾸 손이 가는 슴슴한 무나물 같은, 배부른데도 자꾸 먹어 한 봉지를 ‘순삭’하는 적당히 달달한 뻥튀기 같은, 별다른 자극과 소리 없이 강한 힘이 있다.
일단 <전원일기>에는 악인이 없어 좋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얄미울 때도 있지만 베이스는 모두 선한 사람들이 극을 이끈다. 그들의 갈등이라고 해봐야 가끔 삐쳐서 아웅다웅하는 정도. 회차마다 주인공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펜트하우스>(SBS) 같은 요즘 드라마와 비교했을 때 인물들이 정말 밋밋하다. 회장, 상무 같은 대단히 능력 있는 인물도 없고, 가난하지만 꿈만 많은 예쁜 신데렐라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드라마 <전원일기>
출처 : MBC 홈페이지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냐면, 농번기 때나 돼야 현금을 만질 수 있는 가난한 농촌 사람들 사정을 리얼하게 반영해 배우들이 의상을 돌려 입는다. 이번 회차에 입은 옷을 다음 회차에서도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옷은 매번 새로 바꿔 입는 요즘 드라마의 가난한 주인공들과는 다르게 현실감이 살아있다.
그리고 <전원일기>에는 중장년층과 MZ세대를 만나게 해 주는 ‘라떼는~’의 매력이 있다. 요즘엔 집에 손님이 놀러온다고 하면 배달 어플로 유명 빵집에서 빵을 시키고 마카롱에 커피, 과일 등을 내기 바쁜데, 양촌리의 브런치는 슈퍼에서 파는 봉지 과자다. 새우깡과 양파링 같은 봉지 과자와 페트병 음료를 차리면 ‘양촌리 카페’ 완성이다.
“맞아, 저 때는 저랬어. 빵집도 많이 없어서.”
그때 그 시절 친구들과의 티타임을 떠올리는 엄마, 유치원 끝나고 친구 집에 놀러 가 봉지 과자에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나. 엄마와 내 시간의 교집합이 생성됐다. 추억의 공존 영역대를 찾아낸 거다. 엄마와 한참 그때 그 시절을 얘기했다.
지금의 촬영 현장과 비교하는 것도 큰 재미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원되는 요즘 드라마 현장과 달리, <전원일기>는 종종 원테이크로 숨 가쁘게 카메라를 돌린다.
촬영 현장도 지나치게 생동적이다. 요즘 촬영장에선 최대한 모든 생활 소음을 차단하고 깨끗한 오디오를 따는 게 기본이라면, <전원일기>에선 바로 옆에 기차가 지나가도 그냥 그대로 진행한다. 심지어 기차 소리 때문에 배우 대사가 하나도 안 들리는데 그걸 그대로 내보낸다. 지금으로 보면 방송사고 수준의 장면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구성도 요즘과는 확연히 다르다. 신박한 소재, 빠른 템포 없이 <전원일기>만의 느릿느릿한 속도로 한 회 이야기를 단단히 완성해간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면 1,000회를 이끌 수 있을까. 소재 충당이 가능한 걸까. 궁금한 마음에 한 회 한 회 지켜봤는데, 정말 <전원일기>는 별거 아닌 일로 이야기를 만든다.
영남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데 아무도 안 와서 서운한 얘기, 복길이네 집에 중고 냉장고를 들여놓은 날, 방에 전화기를 따로 놓기 위해 시어머니와 투쟁한 수남 엄마 얘기까지, ‘정말 저게 사건이야?’ 싶을 정도로 밋밋한 에피소드들로 한 장면 한 장면을 채워나가 밍숭맹숭한 얘기를 완성시킨다. 이 밍숭맹숭함이 좋다. 드라마를 보며 열받아서 분노할 일도, 주인공이 죽을까봐 숨죽여 보며 마음 졸일 우려도 없는 평화로운 드라마여서 <전원일기>가 좋다. 가뜩이나 힘든 세상, 드라마 보면서까지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 그저 불멍하듯 단조롭게 쉴 수 있는 드라마가 필요할 뿐이다.
<전원일기>를 보며 얻은 이 평안함이 내 집필에 그대로 투영되면 좋으련만, 잘못 배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난 또 자극적인 소재를 찾고 빠른 구성의 글을 쓴다. 그래야 시청자가 보니까. 내가 김은숙 작가처럼 대단한 작가가 아닌 이상 독특함으로 승부해야 글이 팔릴 테니.
하지만 즉석식품이 집밥을 따라가지 못하듯, 조미료 구성에는 한계가 있는 법. 내 글은 금방 질린다. <전원일기>는 내게 구성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트렌디한 것, 쿨한 것만을 추구하는 요즘 미디어에 <전원일기> 재방송은,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하라는 ‘온고지신’의 울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