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잊힌 장르로 여겨졌던 시트콤이 속속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작점이 TV 방송 채널이 아니라 OTT 플랫폼이다. 넷플릭스, 웨이브(wavve) 등 OTT들이 시트콤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전략을 들여다봤다.
최근 영상콘텐츠 시장에서 부는 센 바람은 대개 넷플릭스가 진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트콤 부활의 바람도 결국 넷플릭스에서 일어났다. 지난 6월 18일 넷플릭스는 한국 시장에 투자하여 제작한 오리지널 시트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를 공개했다. 올 초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에 5억 달러(한화 약 5,868억 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하며 공개한 13편의 신작 중 하나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출처 : 넷플릭스 홈페이지글로벌 시장 앞에서 다양성을 강조해온 넷플릭스와 다양성 이슈에 민감해진 한국사회의 변화가 나름의 접점을 찾아 ‘대학교 국제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이 나왔다. 필자도 간만에 새로운 시트콤의 웃음 코드에 맞추어 감정을 튜닝하는 데에 적잖은 긴장감을 느꼈는데, 그만큼 시트콤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장르였다. 최근 OTT의 시트콤 제작에 영상 콘텐츠 업계와 시청자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시트콤 제작은 넷플릭스뿐 아니라, 콘텐츠 확보 경쟁에 나선 모든 OTT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으로 자리 잡고있다. 웨이브도 올 하반기 공개 예정인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제작하고 있고, 카카오TV도 에이스토리와 함께 시트콤 제작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OTT의 시트콤 제작은 콘텐츠 제작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을 뿐 아니라, 유료방송 채널에도 자극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OTT는 지금 저예산 고효율의 콘텐츠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콘텐츠 확보 경쟁에서 밀리면 바로 벼랑이라는 인식 때문에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HBO MAX, 웨이브, 왓챠 등은 OTT 전용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온라인 유통망만 이용하고 있는 넷플릭스는 지금까지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통해 미디어 산업에서 위상을 공고히 했지만, 심화하는 경쟁 속에서 고비용 콘텐츠에 계속 의존하기에는 그 제작비를 감당하기가 벅찬 것이 사실이다. 시트콤은 태생적으로 제작비 절감을 추구한다. 섭외에 드는 비용은 신인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줄일 수 있고, 촬영은 주로 세트장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다.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 제작에 투자해오던 넷플릭스도 예능, 다큐멘터리로 장르를 넓혀오다가 시트콤을 저비용 고효율의 좋은 모델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OTT는 지금 20~30분 전후의 미드폼 콘텐츠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퀴비(Quibi)에서 경험했듯이 숏폼에 대한 기대와 좌절이 반복되면서, 대안으로 미드폼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MZ세대의 수요에 맞추어 1~10분 안팎의 숏폼 콘텐츠가 OTT에서 시도되고 있고, 넷플릭스도 일부 국가에서 패스트 래프(Fast Laughs)라는 숏폼 서비스를 론칭했다. 숏폼은 분명 그 자체로 온라인에서 생성된 새롭고 매력적인 소통방식이지만, 서사적 형식의 콘텐츠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크다. 정작 ‘MZ세대’라는 표현도 그 자신들보다는 기성세대들이 더 즐겨 쓰는 듯하다. 이처럼 ‘10~30대는 이야기보다 숏폼에 더 반응할 것’이라는 생각도 기성세대의 편견일 수 있다. OTT는 오리지널 콘텐츠로 이야기와 형식의 완성도가 더 높은 콘텐츠가 필요했고, 그런 점에서 시트콤이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OTT는 2010년대 말부터의 복고풍을 새롭게 소비하는 뉴트로 트렌드에 편승하여, 1980~2000년대 유행하던 시트콤 양식을 소환해내고 있다. 뉴트로는 비단 한국 사회만의 트렌드가 아니다. 미국도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2018년과 2019년에 6,000만 달러(한화 약 703억 원)와 1억 달러(한화 약 1,171억 원)를 각각 지불하고 1990년대 미국 대표 시트콤 <프렌즈>(NBC)를 편성했고, 이를 둘러싼 넷플릭스와 HBO MAX의 방영권 쟁탈전이 일어나 HBO MAX가 2020년 방영권을 차지한 일도 있었다. 2021년에는 특별판 다큐멘터리 <프렌즈: 리유니언(Friends Reunion)>도 제작되었다. 유튜브에서 우리나라 과거 인기 시트콤인 <순풍산부인과>(SBS), <거침없이 하이킥>(MBC) 등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프렌즈> 방영의 성공적 경험에 기초하여, 넷플릭스는 시트콤 제작과 흥행의 경험을 가진 한국 시장에서의 시트콤 부활을 시험하고 있다.
시트콤 <프렌즈>의 특별판 다큐멘터리 <프렌즈: 리유니언(Friends Reunion)>
출처 : HBO MAX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OTT가 미드폼의 하나로 시트콤을 선택한 것에는 ‘한국 시장에서 코미디 수요가 있음에도 충분한 공급이 없다’는 인식도 어느 정도는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웃찾사>(SBS), <개그콘서트>(KBS) 등의 프로그램이 종영되고, tvN의 <코미디 빅리그>만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다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계속되는 재택근무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시민들이 지쳐가고 있어 코미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때다. 시트콤이 개그 프로그램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지만, 코미디 장르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는 있을 것으로 본다.
OTT의 시트콤 제작과 편성은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할 수 없었던 몇 가지를 가능하게 했다. 이 얘기를 하자면, 시트콤 퇴조의 이유를 먼저 떠올려봐야 한다. 2010년 3월에 종영한 <지붕 뚫고 하이킥>(MBC) 이후 이렇다 할 시트콤 히트작이 나오지 못했다. 시트콤의 퇴조에 대한 당시의 논평들을 종합해보면, 주 5회 방영분을 제작하는 창작의 부담감과 업무적 어려움, 비드라마 부문 캐스팅의 어려움, 캐스팅에 대한 시청자들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쉬운 제작비 등 열악한 제작 여건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들은 시트콤의 시청률을 끌어올리지 못한 직접적 이유는 아니어도, 오랫동안 방송사들이 시트콤에 관심을 보이지 못했던 근거로는 충분하다.
OTT의 콘텐츠 제작과 편성의 여건은 기존 방송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시청자의 반응을 적절히 반영하면서 제작하던 방송 제작 관행과는 달리, OTT는 대체로 사전 제작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OTT의 100% 투자든 OTT와 제작사의 공동투자든 예산과 편성을 확보하고 제작에 착수하므로, 플랫폼과 제작사의 거래 관계에서 각 측에 발생하는 위험 부담은 획기적으로 감소한다.
사전 제작은 노동 여건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많은 물의를 빚었던 방송 쪽대본의 관행도 사라지고, 콘텐츠의 완성도도 높아지며, 출연진, 스태프의 전반적인 노동 여건이 상당히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8개월 이상에 걸쳐 167개 에피소드로 매주 제작하면서 방송되었던 <거침없이 하이킥>과는 달리,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는 사전 제작된 12개 에피소드를 공개한 점만 비교해 봐도 그 차이는 확연하다.
또 한 가지 차이는 OTT의 비선형적 시청1) 특징으로 인해 제작 타이틀 수의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정 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OTT에서 미드폼 형식의 시트콤이 활성화된다면, 제작 물량도 늘어 제작사와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의 참여 기회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또한, 시트콤이 방송의 범주를 넘어 OTT로 가면서, 방송심의가 아닌 영상물 등급심의를 받게 되어 내용적 제약도 완화된다. 창작의 자유와 소재의 다양성은 시트콤 장르의 인기를 지속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제한된 시장에서 다수 취향에 맞춘 일정한 소재로 수렴되면서 콘텐츠 간 유사성이 커지게 되면, 시청자들은 시트콤에 매력을 잃게 된다. 시청자가 식상해 하기 전에 스스로 발전적 탈피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제작 환경이 보장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트콤이 새로운 전성기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들 한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OTT 시대에는 걸맞지 않다. 특정 장르가 시장을 주도하고 견인하는 것은 채널과 편성 시간이 제한적이던 시대의 일이고, OTT 시대엔 새로운 장르의 추가가 있을 뿐이다. OTT는 더 큰 다양성을 끌어안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요즘 우리는 OTT에서 시트콤의 가능성을 보고 고무되어 있다. 텔레비전에서 웃음을 주던 시트콤이란 장르가 OTT로 옮겨오고, 그로인해 제작산업에 활기가 생기고, 플랫폼의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다면, 플랫폼도 제작사도 이용자도 그만큼 더 좋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