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24 2022 Summer

    가상인간, 현실로 로그온

N Story 2

현실로 온 버츄얼 휴먼

고찬수 PD(KBS 예능국)

1972년, 최초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비디오 게임 ‘퐁(PONG)’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성장한 컴퓨터 게임은 젊은 세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엄청난 시장을 형성했다. 게임의 인기와 빠른 성장은 가상 세계와 가상 캐릭터에 대한 친근감을 높여주었고, 이에 익숙해진 젊은 소비자 덕분에 게임 캐릭터가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 게임 속 세계나 다름없었던 가상 세계가 자연스럽게 일상에 자리 잡은 데에는 새로운 세대의 역할이 지대했다. 새로운 세대에게 게임은 이전 세대의 SNS 서비스와 유사하다. 기성세대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서비스에 24시간 접속해 생활하는 것처럼, 게임은 10대의 SNS 공간이다. 가상공간 속에서 캐릭터(아바타)의 모습으로 만나는 것은 Z세대와 알파세대에게 익숙한 소통 방식이다. 이런 미래세대에게 가상공간은 현실과 분리된 곳이 아니며, 언어 그대로 ‘세계’에 가깝다.

    여기에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이 더해지며 가상 캐릭터가 현실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버츄얼 유튜버’, ‘버츄얼 아이돌’, ‘버츄얼 인플루언서’ 등 가상의 캐릭터가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발달과 함께 우리의 일상 속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가상 캐릭터에 인공지능 기술로 자율성이 부여된 ‘버츄얼 휴먼(Virtual Human)’까지 등장하고 있다.

버츄얼 휴먼 키우기

  • ‘버츄얼 휴먼’은 앞으로 크게 두 개의 발전 방향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버츄얼 휴먼을 만드는 것이다. 유니티와 언리얼 엔진 등 버츄얼 휴먼을 창작하는 도구인 게임 엔진이 대중화되고 있다. 누구나 일정 수준의 교육만 받으면 버츄얼 휴먼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언리얼 엔진에서 발표한 디지털 휴먼 제작 툴인 ‘메타 휴먼 크리에이터(Meta Human Creator)’는 간편하게 디지털 휴먼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제작 도구’로, 다양한 인간 피부, 체형, 헤어스타일, 골격 정보가 저장돼 있어 그래픽 디자이너가 원하는 모습의 버츄얼 휴먼을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

    이제는 버츄얼 휴먼을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버츄얼 휴먼 사이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많은 자금을 투입하여 마케팅으로 스타를 만들어내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미래 콘텐츠 소비자들이 열광할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의 버츄얼 휴먼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마치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것과 유사하다. 성공한다면 엄청난 금전적 보상을 얻게 되지만, 그 성공 가능성이 상당히 희박하다.

  • n2_1 버츄얼 휴먼 '김래아' ⓒ LG전자
  • 2021년 1월 미국에서 열린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 2021’에서 LG전자가 선보인 버츄얼 휴먼 ‘김래아(Reah Keem)’. LG전자가 2020년 5월부터 준비한 이 가상인간은 CES에서 최초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한 버츄얼 휴먼이라는 것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그 뒤로 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해서 점점 잊히고 있다. 연예기획사 싸이더스에서 만든 버츄얼 휴먼 ‘로지’도 모 대기업의 TV광고 모델로 인지도를 높이며 많이 알려졌지만, 아직 스타성을 확보하는 것에는 미치고 못하고 있다.

    김래아와 로지 이외에도 많은 국내 창작 버츄얼 휴먼들이 창작되어 활동하고 있지만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릴 미켈라’라는 버츄얼 인플루언서나 일본의 버츄얼 유튜버 전문기업 ‘애니컬러’ 같은 성공 사례가 국내에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를 본뜬, 버츄얼 스타

  • n2_2 블랙핑크 아바타 © 네이버Z
  • 두 번째 방향은 기존의 스타 이미지를 가진 버츄얼 휴먼을 만드는 방식이다. 국내 패션 플랫폼 무신사에서 기존의 광고 모델이던 배우 유아인의 이미지를 차용한 버츄얼 휴먼 ‘무아인’을 만들어 활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 경우에는 빠르게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높일 수는 있지만, 스타의 퍼블리시티권을 사용하는 대가로 큰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스타들을 보유하고 있는 대형 연예기획사의 경우에는 손쉽게 ‘버츄얼 스타’ 사업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국내 메타버스 플랫폼 중 가장 많은 사용자를 확보한 제페토는 K-Pop 스타의 이미지를 가진 아바타를 서비스 안에 구현하고 이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가입자를 유치하고 있다. BTS와 블랙핑크 등 K-Pop 아이돌이 제페토 내의 가상 세계에서 전 세계 팬과 소통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국내 대형 연예기획사는 자신들이 보유한 스타가 가상 세계에서 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BTS 소속사인 하이브엔터테인먼트와 블랙핑크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트와이스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가 총 17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제페토에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n2_3 NUGU 셀럽 알람 아이린편 © SK텔레콤
  • SM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인공지능 기술과 자신들의 소속 스타를 활용한 혁신적인 수익 모델 발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인공지능 스피커에 소속 스타들의 목소리를 탑재하여 좋아하는 팬 누구에게나 1대1 대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일종의 ‘오디오 버츄얼 스타’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팬 입장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버츄얼 스타)와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스타를 보유한 소속사는 전에 없던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할 수 있다.

    목소리로만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스타와 연결된 이미지의 버츄얼 스타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더 폭발적인 반응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스타를 보유하고 있는 엔터사 입장에서는 새로운 수익 모델이 될 수 있는 버츄얼 스타 분야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계약이 만료된 후에 이미 만들어져 활동하는 버츄얼 스타에 대한 권리문제는 상당히 복잡한 법률적 숙제를 가지고 있다.

달릴 준비가 필요해

  • 많은 콘텐츠 소비자들이 다양한 경로로 버츄얼 휴먼을 만나고 있는 현재를 지나, 훗날 버츄얼 휴먼 경쟁의 핵심은 스토리(서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이세돌(이세계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가상 캐릭터 아이돌 그룹의 성장 스토리는 미래의 버추얼 휴먼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이나 인공지능 기술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던 시기를 지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버추얼 휴먼의 시대가 온 것이다. 버츄얼 휴먼이든, 진짜 인간이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는 스토리를 가지고 소비자를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버추얼 휴먼 제작에서 세계관을 만들어내고 구체화시킬 기획자와 작가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 n2_4 Mnet <AI 음악 프로젝트-다시 한 번> © Mnet
  • 다만, 인공지능 기술로 가상의 캐릭터에 인격체가 부여되는 버츄얼 휴먼의 경우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 Mnet <AI 음악 프로젝트-다시 한 번>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그룹 거북이의 멤버였던 ‘터틀맨’ 故 임성훈 씨의 모습과 음성을 완벽히 구현해 많은 시청자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미래에 다가올 문제점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도 하다. 본인에게 동의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고인을 부활시키는 이러한 시도가 합리적인 규칙이 없다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인간과 거의 흡사한 외모와 능력을 갖춘 버츄얼 휴먼이 일반화될 시기에 대한 준비가 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이다. 인간과 거의 같은 수준의 능력에 외모까지 비슷한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버츄얼 휴먼이 우리 일상의 현실이 되었을 경우를 대비한 법적·제도적 준비는 되어 있는가? 공상과학 영화에서 예견한 대로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격권이 부여되어야 할까? 버츄얼 휴먼은 인간인가, 기계인가?

    버츄얼 휴먼은 인류가 처음 경험해 보는 새로운 현상이지만,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TV와 스마트폰 그리고 인공지능 스피커의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버츄얼 휴먼을 접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VR, AR 그리고 메타버스 콘텐츠가 버츄얼 휴먼과 함께 대중화되는 과정을 걷게 될 것이다. 이제 버츄얼 휴먼의 가능성을 넘어 현실이 된 후의 대비책을 논의해야 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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