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편집실 사진 제공 한국콘텐츠진흥원 만화스토리산업팀
지난 10월 21일 개최된 ‘2021 더 스토리 콘서트’에서는 <세계관의 창조>를 주제로 드라마, 영화, 웹툰 등 각 장르별 대표 연사들이 스토리의 토대가 되는 세계관 발굴과 창조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했다.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품위있는 그녀>, <마인>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집필한 백미경 작가가 첫 주자로 나섰다.
진행:
이다혜 <씨네21> 기자
연사:
백미경 작가
이다혜
올 6월 종영한 드라마 <마인>은 전작 <품위있는 그녀>와 비슷한 듯 다르게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어떻게 기획하게 되셨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백미경
두 작품 모두 제이에스픽쳐스와 만들었어요. 제이에스픽쳐스 이진석 대표에게 ‘돈’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했더니, <품위있는 그녀>와 비슷한 걸 써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똑같은 걸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동일한 포맷으로 가되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려고 했죠.
이다혜
다른 세계관으로 확장하기 위해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백미경
두 작품 모두 두 여자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하지만 <품위있는 그녀>가 욕망 속에 가려진 인간의 서글픈 인생사를 보여주며 인간의 가치를 묻는 작품인 반면, <마인>은 ‘인간의 편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마인> 1~2회 때 <품위있는 그녀>와 유사하다는 반응이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비슷한 포맷으로 시작하되, 결국 다른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차기작에서도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하되 다른 방향과 가치로 격돌하는 이야기를 시도하고 싶어요. 인간에게는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아요.
이다혜
<품위있는 그녀>와 <마인>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 각각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백미경
<품위있는 그녀>의 우아진(김희선)과 <마인>의 서희수(이보영)를 예로 들면 둘은 사실 비슷한 캐릭터예요. 인간에 대한 경계가 없고 인품이 좋은 캐릭터죠. 다만 배우가 다르다 보니 그들의 힘으로 다르게 표현된 면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평소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정말 이상한 사람도 있고, 재미있는 사람도 많잖아요? 사람 한 명 한 명이 다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인물의 특성을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 이런 관찰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다혜
<힘쎈여자 도봉순>, <날 녹여주오>, <우리가 만난 기적>처럼 판타지 장르로 구분되는 작품들도 집필하셨어요. 앞서 언급한 두 작품과는 장르가 다른데 세계관을 창조하는 데 있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백미경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추구하다 보니 판타지까지 쓰게 됐어요. <날 녹여주오>는 냉동인간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쓰게 됐고, <우리가 만난 기적>은 흔히 아는 ‘영혼 교체’를 ‘육체 임대’라는 설정으로 살짝 비틀어 만들어본 거예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하잖아요? 소재의 특이성보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다혜
주변에 글 쓰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소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백미경
소재에 매몰돼선 안 돼요. 너무 새롭고 생경한 소재는 오히려 시청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오징어 게임>이 사실 새로운 소재를 다루진 않잖아요? ‘데스 게임’은 어떻게 보면 익숙한 소재인데, 그 안의 플롯을 새롭게 구성하니 색다르게 느껴지죠.
이다혜
초보 작가들이 소재를 ‘나만의 이야기’로 만들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백미경
유행이나 흐름에 휩쓸리지 말고, 본인이 잘 쓸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야 해요. 자기객관화가 필요한 거죠. 전등이 떨어져서 불이 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장면을 첫 신(scene)으로 시작해 대본을 쓴다면? 표현할 수 있는 장르와 이야기가 무궁무진해요. 로맨틱 코미디, SF, 여성 서사 등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죠. 평소 이런 훈련을 통해 본인이 어떤 이야기에 더 잘 맞는지, 본인이 어떤 부분에 강점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제작사들은 결국 재미있는 대본을 찾아요. 어디서 본 듯한 소재가 더 재미있을 수 있거든요. 드라마 작가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이야기꾼’이 돼야지,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발굴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이다혜
“어떻게 이렇게 쉬지도 않고 작업할 수 있나요?”라는 사전 질문을 받았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해도 그걸 쉬지 않고 지속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 같아요.
백미경
저는 꾸준히 씁니다. 직장 생활하듯 주말에는 쉬고 주중에는 하루 6시간 이상 집필하죠. 그러다 보니 아이템과 이야기들이 늘 축적돼 있어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이야기’를 생각해요. 힘들지만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이다혜
글을 쓰다 보면 슬럼프를 겪는다고 하죠. 슬럼프를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백미경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처럼, 오래 붙잡는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시련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거든요. 노하우가 따로 없어요. 안 써질 때는 접고, 써질 때 써야 합니다. 저도 글이 안 풀릴 때는 힘들어요. 그럴 때 쓴 글은 지적을 많이 받기 마련이에요.
이다혜
본인이 슬럼프인지도 모른 채 밀어내듯 글을 쓰다 보면 더 악순환이 될 수 있겠죠.
백미경
드라마는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여러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어요. 작가 본인이 재미있다고 느끼더라도 다른 사람의 반응이 안 좋을 수 있죠. 작가는 자기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가끔 대중의 니즈와 맞지 않고 ‘삑사리’가 나기도 해요. 때문에 진심 어린 조언과 모니터링이 필요한 거죠. 드라마가 무엇인지 알고, 취향이 대중적이며, 작가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모니터 요원 두 명만 있어도 정말 좋아요. 저도 지금 보조 작가가 제 모니터링을 해주고 있어요. 좋은 조언은 나중에 다 본인 것이 됩니다. 저도 조언을 듣고 초고를 10번은 고쳐 써요.
이다혜
작가님도 실패를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백미경
2019년 방영한 <날 녹여주오>의 실패는 작가라는 제 인생의 서사에서 필요한 시점이었다고 생각해요. 그게 성공했다면 제 작품을 성찰하지 못하고 더 막 썼을 거예요. 실패를 인정하고 나면 무서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알게 돼요. 작가는 결국 자신을 믿어야 해요. 한 번 실패했다고 스스로에게 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합니다.
이다혜
<마인>은 재미있게 본 다음에도 시청자들이 추가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작품이었어요. 캐릭터가 입체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캐릭터 개발 노하우가 있다면요?
백미경
<마인>은 사실 여자 세 명이 연대한 다음부터 재미가 떨어지죠. 싸우고 질시할 때가 재미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시청률을 어느 정도 포기하더라도 캐릭터들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힘쎈여자 도봉순>도 겉으로 보면 오락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회적 약자가 세상을 정복한다는 메시지가 있어요. 사명감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지 모르지만 저는 작가로서 캐릭터를 사건에 따라 맞춰지는 ‘사건 기계’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다혜
중요한 결정이네요. 어떤 작품을 보면 인물들이 편의적으로 사건에 끼워 맞춰져 희생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백미경
이제 저에게 캐릭터는 각각 하나하나의 인격체가 됐어요. 그런 점에서 <품위있는 그녀>의 ‘박복자’는 제 작품 중 성공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연민도 함께 느껴지는 입체적인 인물이거든요. 캐릭터에게 의미와 주제를 전달했다면, 작가는 캐릭터 스스로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도록 해야 해요. 작가는 창조주잖아요. 캐릭터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도록 돕는 것이 제가 할 일이죠. 물론 기본 플롯은 제가 쓰지만, 작품을 쓰다 보면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일 때가 있어요. 작가로서 짜릿한 순간이죠. 사실 그런 맛에 글을 쓰는 거예요.
이다혜
좋은 말씀입니다. 요즘 드라마 제작 환경은 어떤가요? 작가님께서 이 일을 처음 시작하셨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나요?
백미경
요즘이 최고인 것 같아요. 대본만 좋으면 얼마든지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이니까요. 16부작이 아니더라도 6부작 숏폼이나 OTT 시장도 있고요. 덕분에 창작자들이 신나게 놀 수 있죠. 저작권 권리에 대한 존중도 점차 좋아지고 있고, 저처럼 제작을 병행하는 작가들도 늘었어요. 과거에는 작가의 대본이 실제 현장에서 왜곡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점차 좋아질 거라고 봅니다.
이다혜
마지막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백미경
어떤 작가로 기억되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가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이 인정하는 스타 작가라도 본인이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제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유의미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드는 게 목표예요.
더 스토리 콘서트
2016년부터 개최된 더 스토리 콘서트는 스토리 창작자 및 예비 창작자를 대상으로 국내 유명 작가와 감독, 제작자를 초청해 창작 노하우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나누는 토크콘서트다. 이번 콘서트는 총 4개 세션으로, 드라마 <마인>, <힘쎈여자 도봉순> 등을 집필한 백미경 작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이명세 감독, 영화 <승리호>의 조성희 감독과 웹툰 <승리호>와 <기계증식증>의 홍작가가 참여해 인기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 비결을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