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팬덤’은 단순한 문화 현상을 넘어 산업 전반을 움직이고 있다. 팬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며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 -편집자 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밴드가 된 BTS를 이야기할 때 아미(ARMY)는 빠질 수 없는 필요충분조건이다. BTS의 팬덤인 아미는, BTS와 하나의 운명공동체로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 이인삼각 경기를 펼친다. 실제로 영원한 난공불락의 성처럼 여겨졌던 영미권 언론이 처음 BTS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데에는 아미의 힘이 컸다. 온·오프라인 어디에서나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해 BTS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 독특한 집단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이들의 정체가 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영미권 미디어가 특히 궁금해한 건 ‘이토록 열정적이며 충성도 높은 이들이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였다.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십 번의 탈피를 거치며 자신들만의 문화로 조직화한 K팝 팬덤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팬과도 달랐다. 이들의 열정은 자기파괴적이기보다는 자기희생적이었고, 동일한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 오가는 깊은 유대감을 중시했다.
팬덤의 힘은 뭉칠수록 커졌다. 그렇게 커진 힘은 산업 전반을 움직이고 있다.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다. 얼마 전 관세청이 발표한 ‘음반 수출액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1월 기준 한국의 음반 수출액은 약 1,35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8.2%가 급증했다. 수출 대상 국가도 2017년 78곳에서 2020년 114곳으로 늘었다. 2021년 상반기에도 성장세는 이어졌다. 한터 글로벌이 지난 7월 공개한 ‘K팝 리포트’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앨범 판매량은 총 1,940만 5,514장이었고, 이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34.25% 성장한 수치였다. 이례적인 앨범 판매량 증가에서 부쩍 늘어난 해외 진출까지, K팝 붐의 기운을 타고 한국 음악산업 총매출액은 역대 최고인 7조 원에 가까워졌다(2019년 기준). 그 뒤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세계를 아우르는 K팝 팬덤이 있었다.
팬덤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비단 앨범 판매량뿐만이 아니다. 이들의 두려움 없는 사랑은 문자 그대로 음악산업의 구조를 바꿔 나가고 있다. 앨범과 공연 티켓 구매는 기본 중의 기본, 이제는 음악산업 필수 아이템이 된 머천다이즈 시장과 온라인 유료 콘텐츠 판매까지 팬덤 없이는 시장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운 분야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 가운데 커뮤니티나 개인 SNS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팬들을 한곳에 모아 그들이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팬 커뮤니티 서비스’가 있다. 지난 1~2년간 K팝 산업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모델 가운데 하나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이 서비스의 대표주자는 작년 5월 SM엔터테인먼트가 런칭한 팬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 ‘리슨’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리슨’이 제공하는 서비스 가운데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건 ‘디어 유 버블’이다. ‘최애와 나만의 프라이빗 메시지’를 테마로 K팝 아티스트와 팬의 직접적인 소통을 목표로 하는 해당 서비스는 애플리케이션이 출시된 2020년 2분기에만 42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SM은 리슨과 버블의 흥행으로 자회사 합산 영업이익에서 2016년 이후 처음으로 흑자를 냈다.
팬과 아티스트의 온라인 소통이라는 새로운 문이 열린 뒤, 이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영역을 꾀하는 차세대 플랫폼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위버스’와 ‘유니버스’가 대표적이다. 각각 하이브와 NC소프트가 기획, 개발한 이 플랫폼들은 아티스트와의 소통을 기반으로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확장된 팬 커뮤니티 역할을 지향한다. 위버스의 경우 하이브의 킬러 콘텐츠인 방탄소년단과 세븐틴, 뉴이스트 등 대형 팬덤을 보유한 아티스트들의 역량을 앞세워 2,000만 명이 넘는 가입자 수를 확보했다. 블랙핑크도 8월 합류를 앞두고 있으며, 국내 아티스트뿐 아니라 그레이시 에이브럼스(Gracie Abrams)나 제레미 주커(Jeremy Zucker), 프리티머치(PRETTYMUCH) 등 해외 아티스트도 위버스에 입점해 있다. 아티스트를 향한 높은 충성도를 바탕으로 끈끈하게 얽힌 가입자들은 플랫폼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다양한 독점 콘텐츠를 마음껏 즐긴다. 즉, 기존에는 블로그나 브이라이브, 유튜브 등 외부 채널을 통해 조각조각 전파되던 콘텐츠가 위버스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모두 모여있다는 뜻이다. 위버스는 이외에도 공연 예매 및 감상, 머천다이즈 구매, 아티스트를 분석한 전문 칼럼까지 제공한다.
NC소프트 유니버스의 경우, 겉으로 보기엔 위버스와 흡사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목적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니버스는 가입 아티스트의 음악을 유통하는 ‘유니버스 뮤직’, 오리지널 예능 콘텐츠인 ‘유니버스 오리지널’, NC의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 등을 메인으로 서비스한다. 아티스트와의 소통이나 팬 커뮤니티의 기능은 기본이고, 안정적인 팬 베이스를 갖춘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전방위 콘텐츠 제작을 지향하는 셈이다. 무기는 역시 화려한 라인업이다. 몬스타엑스, 더 보이즈, 강다니엘 등 탄탄한 국내외 팬덤을 보유한 남성 가수들과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여성 그룹 오마이걸, (여자)아이들, 여기에 떠오르는 신예 에이티즈와 크래비티 등 수십 팀이 유니버스와 함께하고 있다. 유니버스는 이들을 활용한 첫 콘텐츠로 무료 온라인 콘서트 ‘유니-콘(UNI-CON)’을 개최하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해가 다르게 성장하는 K팝과 그로 인해 파생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국가 간 경계를 허무는 협업에서도 누구보다 열린 자세를 보인다. 올 상반기 스쿠터 브라운(Scooter Braun)이 대표로 있는 레이블 이타카홀딩스를 인수한 하이브는 유니버설 뮤직그룹과 손을 잡고 2022년 K팝 남성 그룹 데뷔를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런칭하기로 합의했다. SM엔터테인먼트 역시 미국 제작사 MGM텔레비전과 함께 미국을 기반으로 한 K팝 그룹 NCT-HollyWood를 제작할 예정이다.
이 모든 경계 없는 세계화의 중심에 팬덤이 있다. 세계가 K팝을 주목하게 만든 시작점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는 K팝 팬덤은 2021년 현재 전 세계 1억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팬덤으로 만들 수 있는 경제 규모가 8조 이상1)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면서 팬(Fan)에 인더스트리(Industry)를 더한 ‘팬더스트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흐름은 코로나19로 입은 직접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한동안 무난하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았다며 함박웃음을 짓기는 아직 이르다. 팬더스트리를 이야기하며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보다 이 산업의 밑바탕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사람을 주축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있어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인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무한 리스크다. 눈 깜짝할 새 불어난 팬덤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얼마든지 와해될 수 있다. 나이와 성별에서 이제는 국가와 인종까지 다양해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불거진다. 일례로 최근 유행하고 있는 유료 구독 소통 서비스의 경우, 아티스트에게 수익을 위한 추가 노동을 쉽게 전가하는 행위나 직접 소통으로 인해 벌어지는 아티스트와 팬 사이의 물리적, 정신적 유효 거리에 대한 논의가 필수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제는 이러한 크고 작은 문제가 전국이 아닌 전 세계 규모로 일어난다.
K팝 팬덤은 크고 뜨겁지만, 그렇기에 무엇보다 섬세하게 다뤄져야 한다. 팬더스트리라는 커다란 개념 안에 갇힌 ‘사람’을 꾸준히 돌보는 행위가, 결국 팬더스트리라는 새로운 산업의 생명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