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명석(위버스 컴퍼니 미디어 콘텐츠 팀장)
전 세계에 ESG 열풍이 분다. 콘텐츠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ESG 경영, 왜 해야 하는 걸까. -편집자 주
‘머슴살이도 대감 집에서 해야 호강’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런 제목의 게시물을 봤다. 클릭해 들어가니 MBC 예능 프로그램 <아무튼 출근!>의 특정 에피소드를 화면 캡처로 요약한 내용이다. 직장인의 하루를 관찰 예능 형식으로 담은 이 프로그램은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고 있는 중이다. 다른 직장은 어떤지,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지 볼 수 있는 동시에 저런 직장생활을 하고 싶다는 약간의 판타지도 준달까.
이쯤 되면 인터넷의 그 게시물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 게시물은 <아무튼 출근!>에서 다룬 대기업 직원의 근무 환경을 부러운 듯 묘사했다. 필수 근무 시간대만 지키면 하루 업무 8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쓸 수 있고, 일반적인 사무 환경에서 업무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싶으면 도서실 같은 콘셉트의 사무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 요즘 드라마에도 종종 나오곤 하는 밀집된 책상과 파티션으로 가득한 사무실은 없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이런 직장을 다룬다는 것,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직장인들이 대기업의 근무 환경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연봉 외의 환경 또는 직장이 제공해주는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 프로그램을 찍은 MBC를 비롯한 많은 콘텐츠 제작사들의 환경은 <아무튼 출근!> 속 사무실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최대 52시간이어야 할 근무 시간이 지켜지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밤샘 작업이 계속되는 것은 물론, ‘갑’이 되는 대형 콘텐츠 제작사가 ‘을’의 입장에 있는 관계사에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 조건을 강요하다 논란이 되는 경우도 많다. 드라마 제작 스태프의 잇따른 사고들이 여러 차례 사회 문제가 된 것도 오래전 일이 아니다. 정확히는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는 문제라 하겠다.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의미하는 ESG 경영에 관해서라면, 한국의 콘텐츠 제작사는 아예 개념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콘텐츠 제작은 애초에 환경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사회적 책임은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일단 근무 시간부터 법적인 기준을 지켜야 할 상황이다. 지배구조에 있어서는 상당수 대표 콘텐츠 제작자가 곧 오너이자 그 자체로 제작사나 다름없는 경우가 많아, 수평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콘텐츠 제작사들이 무조건 ESG경영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출근!>에 나오는 대기업이 돈이 많고 선한 의지를 가져서 근무 환경에 신경을 쓰는 것 또한 아니다. 올해 초 게임업계는 갑작스럽게 연봉을 대폭 인상했다. 전에는 무심했던 게임업계가 올해 들어 갑자기 개심해 연봉을 높였을 리 없다. 팬데믹과 함께 이용자들의 게임 시간이 늘었고, 동시에 중국에서는 한국 게임 인력에 높은 연봉을 지불하고 스카웃한 지 오래다. 반면 과거와 같은 스타트업이 아니라, 이제 대기업이 된 게임 회사들은 더 이상 일반 직원들에게 상당한 스톡옵션 등을 약속하지 못한다. 연봉 인상을 비롯한 근무 환경 개선이 없으면 유능한 직원을 확보하기 어렵게 됐다. 근무 조건 자체가 회사의 경쟁력이 된 것이다. 이는 다른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미래의 스타를 찾는 K팝 제작자는 몇 년의 트레이닝 기간이 걸리는 연습생보다 인기 유튜버가 되고 싶어 하는 10대를 설득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히트 드라마 및 예능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거나 그와 함께하고 있는 스태프라면 과거와 같은 조건을 내미는 제작사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넷플릭스로 갈래요.”
경쟁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 중에서도 근무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완전한 답은 아니다. 하지만 시장 확대와 함께 이뤄지는 경쟁은 이른바 ‘고인물’이 계속되는 환경보다는 ESG 경영에 일부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는 콘텐츠 회사들의 지배구조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기업 지배구조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야 주식 시장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의 사업이 가능하다. 올해 주식시장에서 화제를 모은 하이브를 비롯,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등 유명 K팝 제작사들은 모두 상장사이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만큼 콘텐츠 제작에 대규모 자본과 인력이 필요하다. 오너가 곧 CEO고 프로듀서이던 시절을 지나 각각의 영역에 걸맞은 전문가들이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다.
이는 대중문화 산업에서 ‘열정페이’ 문제가 조금씩이나마 개선되는 이유기도 하다.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콘텐츠 회사가 ‘열정페이’를 운운하며 직원에게 불합리한 근무 조건을 내세우곤 했던 것은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근본적으로 ‘하이 리스크(High Risk) 하이 리턴(High Return)’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오늘의 말단 매니저가 업무 노하우와 인맥을 쌓으면 내일의 대형 기획사 오너가 될 수도 있다는 식의 꿈 말이다. 그러나 콘텐츠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산업 바깥의 대자본과 전문 인력들이 활발하게 들어오면서 이제는 그런 꿈을 실현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열정페이’ 같은 과거의 악습은 이제 들어갈 자리가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은 사회의 윤리, 도덕,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지난해와 올해 전 세계적인 이슈였던 미국 내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많은 K팝 스타들이 발언을 한 것은 아티스트 개개인의 소신과 함께 소비자들 또한 이러한 문제의 당사자이거나 깊은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깝게는 연예인들의 과거 학교폭력 문제부터 각 국가의 민감한 이슈에 대한 경솔한 발언, 또는 인종 및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까지 지금 콘텐츠 소비자들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콘텐츠 생산자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다. 콘텐츠 하나가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는 현 시점에서 콘텐츠 제작사가 사회적 의제에 둔감한 경우, 차라리 콘텐츠를 만들지 않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 한국의 콘텐츠산업에서 ESG는 일종의 증서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대중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유의미한 규모의 자본이 들어가는 동시에 전 세계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산업’이 됐다는 증서 말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콘텐츠가 보다 많은 자본과 인력을 필요로 하고, 그 시장이 전 세계로 확대된 지금 시점에서 ESG 경영, 최소한 ‘SG 영역’의 개선은 한국 콘텐츠산업의 필수적인 과제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기도 하지만, 그래야만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