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권라희 사진제공 길픽쳐스
드라마는 세상과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으며 그 매력에 푹 빠져 지난 20여 년간 이 길을 걸어왔다.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통해 세상에 진심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고, 이제는 뜨거운 화두를 던져보고자 <소년심판>을 제작 중인 길픽쳐스 박민엽 대표를 만났다.
Q
박민엽 대표님, 반갑습니다. 겹경사를 맞으셨지요, <스토브리그>의 백상예술대상 드라마 작품상과 휴스턴 국제 필름 페스티벌 플래티늄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A
감사합니다. <스토브리그>는 저희 길픽쳐스 창립 작품이기도 하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터라, 좋은 결과에 저 또한 큰 감동을 받았어요. 제가 방송제작 쪽에 몸담은 지 어느새 20여 년이지만 드라마제작사 경영자로서는 설립 4년차라 아직 부족한 게 많은데 응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스토브리그> 준비 단계에서 정동윤 감독님께 연출 제안을 드리면서 ‘시청률은 가늠하기 어렵지만 좋은 드라마라는 평가는 받을 것이고, 백상예술대상 후보에 오르는 게 목표’라고 말씀드렸는데, 현실로 이뤄져 더욱 기쁩니다.
Q
<스토브리그>는 어떤 계기로 기획되고 제작되었나요?
A
‘1등만 박수 받는 세상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열정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주제의식이 제 마음에 울림을 줬어요. 스포츠드라마임에도 깊이와 섬세한 결,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확신이 들었지요.
이신화 작가님은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보조작가 때부터 연을 이어왔는데, <스토브리그>로 MBC 극본 공모에 당선됐다는 소식에 정식으로 제안을 드렸어요. 신생 제작사임에도 저를 믿고 선뜻 작가 계약을 해주셨고, 저희 길픽쳐스 구성원들도 이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죠.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이 드라마 제작이라면, 그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Q 시청자의 열렬한 반응이 있었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A ‘본방 사수하게 만든 드라마’라는 반응에 참 기뻤습니다. 그만큼 다른 우선순위를 제치고 볼 수밖에 없는, 봐야만 하는 드라마라는 뜻이니까요. 이 작품이 사회인의 자기계발서로 떠오르고 백 단장의 대사가 인생 명언으로 조명되고 ‘휴먼 승수체’라며 회자되는 걸 보니, 이런 현상이 신기하고 드라마 만드는 과정도 신나더라고요. <스토브리그>는 진정으로 시청자들의 사랑 덕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스토브리그>가 대표님께 남긴 것은 무엇인가요? A 이 작품은 제게 좋은 가르침을 남겨줬어요. 드라마 기획적으로는 멜로 장르나 요소에 얽매이지 않아도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시선을 더 넓게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제작 사업적으로는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2차 부가사업에 대한 큰 그림을 갖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 방영 후 흥행 여부에 따라 부가사업을 계획하면 늦어요. <스토브리그>를 통해 기획PD이자 드라마 제작자로서 얻은 깨달음이 많습니다.
Q
드라마 기획PD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A
기획PD는 드라마로 제작되면 좋을 법한 이야기를 찾고 검토하고 개발하는 일을 합니다. 만화·소설·웹툰·웹소설·해외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작을 접하고, 좋은 아이템을 찾으면 기획안을 작성합니다. 이후 그것을 잘 표현할 만한 작가를 발굴해서 대본 작업이 진행될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하고, 대본이 나오면 검토하고 개발하는 과정을 갖습니다.
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기획 단계에서만 최소 2년여의 시간이 걸리고, 제작 기간도 1년 남짓한 시간이 필요하죠. 그 오랜 고난의 시간을 작가님과 함께 묵묵히 버텨내는 책임을 맡는 사람이 기획PD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Q 드라마를 만드는 다양한 역할 중 기획PD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A 제작 전반적으로 생각해보면, 기획PD와 제작PD를 합친 개념의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 제작 업무가 이전보다 세분화되었고, 그중에서도 저는 자연스럽게 기획PD로서의 업무를 맡게 된 것이죠. 드라마 제작에서의 참모 역할이 제 성향상 가장 잘할 수 있고 저다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드라마 업계로의 입문을 비롯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궁금합니다.
A
2004년 로고스필름에 정규직 프로듀서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길에 들어섰어요. 드라마 <곰탕>, <아스팔트 사나이>, <아름다운 그녀>를 연출한 이장수 감독님이 설립한 제작사인데, 제가 열혈 시청자였던 터라 이 감독님과 일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드라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조연출로 시작해 이후 작품에서는 기획PD와 제작PD, 마케팅PD와 조연출 등의 파트를 고루 거치며 멀티플레이어로서 일을 했어요. 당시에는 각 분야별 역할이나 책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여러 파트를 경험하면서 드라마 제작 전반을 이해하고 지금의 균형 감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드라마 제작 일을 하면서 희로애락을 숱하게 겪었죠.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나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이 메가 히트를 친 작품도 있지만, <해변으로 가요>와 같이 조기 종영한 작품도 있었어요. 16부작으로 기획한 드라마를 완성하지 못하고 끝낸다는 건 그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상처로 남아요. 그래서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할 때 더욱 책임감을 갖고 절박하게 임합니다. 해당 드라마에 관련된 사람들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작품을 완성하고 오래도록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으로요.
Q
일을 시작한 2000년 초반과 2021년 현재를 비교하면, 드라마 제작 환경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A
현재 드라마 업계는 R&R(Role and Responsibilities, 역할과 책임)이 세분화·전문화하면서 이전처럼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라, ‘스페셜리스트’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어요. 촬영 현장에서도 주 52시간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촬영을 해요. 사전제작이 도입되면서 스태프의 업무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인건비도 향상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스태프들이 촬영 버스에서 쪽잠을 자면서 방송 당일까지 촬영을 강행하고 쉬는 날도 없이 밤샘 작업을 했거든요.
지금은 OTT플랫폼이 많아 드라마 제작 편수도 늘어났고, 다양한 기획부터 자유로운 형식의 제작도 가능해져서 제작사 입장에서는 이러한 환경적 변화가 기쁘고 신나는 일입니다.
Q
드라마 제작사 길픽쳐스를 설립한 계기는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나요?
A
남편의 결정적인 한 마디 덕분에 용기를 냈죠. 새벽까지 여념 없이 일하다 문득 회의감이 든 때였는데, ‘힘들어도 그 일이 좋고 계속 할 거라면, 제작사를 차려. 하고 싶은 작품 맘껏 할 수 있잖아?’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거창한 꿈을 이루려 했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하려고 제작사를 세웠고,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힘이 납니다.
길픽쳐스는 기획 김다운 이사, 제작 최선화 이사, 재무 김유리 팀장, 총괄 저 박민엽 해서 4인 체제입니다. 소속 작가로 박재범, 최윤교, 노혜영, 김윤, 김민석, 이승진, 은주영, 김희, 남승현, 임진선 작가들이 함께하고 있죠.
Q 최근 신입 기획PD 채용 공고를 올리셨는데, 어떤 능력과 자질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A ‘드라마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이라면 환영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원동력을 얻으니까요. 저마다 특장점이 다르니까 특별한 능력보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투철한 책임의식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후 월드와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영어 능통자라면 활약상이 돋보일 것 같네요.
Q 대표로서 드라마 제작사를 운영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A 길픽쳐스는 ‘Better Together!!’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드라마 제작은 어떤 이들과 함께 하느냐가 관건이에요. 한마음 한뜻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 힘들어도 의미 있고 보람되죠. 늘 함께하는 길픽쳐스 구성원들과 소속작가들이 가장 소중한 보배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잃지 않고 함께 가겠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운영하려고 합니다.
Q 차기작으로 <소년심판>을 제작 중이시죠.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드라마 기획 때 ‘처음 꺼내는 이야기인가? 또 다른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는가?’ 두 가지를 중점에 두고 생각합니다. 김민석 작가님이 ‘소년 범죄를 전문으로 다루는 판사 이야기’를 제안하셨을 때 매력적으로 느꼈어요. 촉법소년법 폐지 여론이 있을 만큼 사회적 이슈라 드라마화 해서 화두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소년심판>을 준비하며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고 소년법과 판사의 일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어요. 청소년은 우리 사회의 미래이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개선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동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할 텐데, 소년 범죄 문제에 대해 각 나라별로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Q OTT와 함께 하고자 하는 제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요? A 방송사는 방송통신위원회 심의 규정이나 정규 방송 러닝타임을 엄격히 준수해야하는 반면 OTT플랫폼은 소재와 형식적 측면에서 창작자에게 자유가 보장된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작품을 OTT플랫폼을 통해 공개하고 싶다면 소재나 형식에서 기존 방식의 틀을 깨는 것이 좀 더 유리한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드라마를 통해 전달하려는 기획의도와 톤앤매너, 이야기 방향성에 대해 플랫폼 관계자들에게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 편성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Q 앞으로의 목표나 만들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A 드라마는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잖아요. 시청자의 마음에 오래도록 간직될 ‘최애 드라마’를 기획하고 싶습니다. 길픽쳐스 소속 작가님들과 ‘좋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열심히! 기획하는 것’이 목표죠. 또한 시즌제 시트콤, 3D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싶고, 길픽쳐스의 제작 편수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저 또한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습니다.
박민엽
길픽쳐스 대표. SBS <스토브리그>, KBS <어서와>, JTBC <우리, 사랑했을까>를 제작했다. 드라마 <스토브리그>는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서울드라마어워즈 한류드라마 우수작품상, 미디어어워드 지상파 드라마부문 우수상, 휴스턴 필름 페스티벌 플래티늄상을 수상했다. 2004년부터 MBC <내조의 여왕>,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 SBS <별에서 온 그대> 등 다수의 작품에 기획·제작으로 참여했다. 현재 SBS <원더우먼>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심판>을 제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