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4조에 의거해 설립된 한국영상자료원은 그간 우리 영화를 꾸준히 수집, 보전, 활용, 전시함으로써 한국영화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발전을 시도해왔다. 뉴노멀, 디지털 뉴딜 시대를 맞아 영상 데이터 구축과 아카이빙의 대표기관으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정혜연 수집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수집팀의 업무는 영상자료원의 설립 근간과도 맞닿아있다. 영화필름의 수집과 보존이라는 지향점 아래에서 출발지점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6년 의무납본제도가 생긴 이래 한국영상자료원은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심의를 받은 모든 한국영화의 필름 보존을 위해 의무적으로 한 벌을 제출받아왔고,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지금은 디지털 시네마파일을 납본받고 있다. 그러나 수집팀의 업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수집은 물론, 디지털 시네마 파일 검수, 저작권 대리중개, 영상도서관 운영까지 꽤나 광범위한 일을 수행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과거의 영화를 수집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비용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 맹목적인 열정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의미 있는 우리 영화 필름들이 거의 소실된 건 두고두고 생각해도 뼈아픈 일이다.
4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한국영상자료원은 무수한 터닝포인트를 맞아왔다. 정혜연 팀장은 그 중 법에 의해 ‘납본제도’를 운영한 게 가장 큰 지점이었다고 말한다. 설립 당시만 해도 ‘한국필름보관소’라는 이름으로 필름을 그저 보관하는 역할에 그쳤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 의무적으로 영화필름을 납본 받으면서 영상자료원의 위상을 높이고 영화라는 데이터가 국가적인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보존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7년, 저희가 소장하고 있던 현존하는 최고(最古) 영화인 〈미몽〉을 포함한 7편의 고전영화가 마침내 문화재로 등록됐습니다. 이는 인식 전환이 이루어진 대단히 큰 계기라고 생각해요. 당시 모든 예술 분야 중 문화재가 없는 분야는 영화 하나였거든요. 저희 영상자료원에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IT강국으로서의 존재감은 그간 양적으로, 질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온 한국영상자료원에게 힘을 실어주는 초석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디지털 아카이빙에 관심이 높아진 지금, 영상자료원의 역량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세계 각국의 영상자료 기관들이 모인 국제영상자료원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ilm Archives, FIAF)이 있습니다. 연맹에서는 올림픽처럼 돌아가며 총회를 개최하는데 그때마다 주제와 이슈를 정해서 발제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어요. 그중 저희 자료원은 디지털 아카이빙과 관련해 매우 선도적인 입장입니다. 유럽 등 여러 국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앞선 수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한국영상자료원은 2009년에 이미 디지털 시네마 아카이빙이라는 사업을 만들며 디지털 시네마 시대를 준비했다. 흔히 사람들은 디지털, 하면 쉽고 편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날로그 필름 보관과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겨준다는 의미에서 결코 만만치 않다. 아날로그 필름은 필름캔에 담으면 되지만 디지털 시네마 파일은 스토리지, LTO(Linear Tape-Open) 테이프로 이중보관해 삭제와 오류에 대비한다.
“디지털 시네마 제작 기술이 발달할 때마다 보존도 함께 진행돼야 하기에 스토리지도 계속 증설해야 해요. 스토리지는 구입 비용에 유지·보수 비용도 발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날로그 필름 보전보다 더 까다롭고 예산도 많이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상자료원의 방대한 양의 영상 데이터 수집과 보관, 이를 통한 다양한 활용은 대한민국 영화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주요상을 휩쓸 때 김기덕 감독의 〈하녀〉를 계속 언급했듯이 현재와 미래의 창작물은 과거에서부터 오는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가치를 엿보고 지금을 비교하며 미래로 나아갈 방향까지 짐작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영상자료는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드러나요”라는 정혜연 팀장의 말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숙고와 엄중함이 깃들어있다.
“과거의 자료들은 어쨌든 지속적으로 찾아서 수집하고 있습니다. 또 현재의 자료를 놓치게 되면 과거의 것을 쫓듯이 미래에는 현재를 쫓을 것 같아서 현재 만들어지는 다양한 영상콘텐츠와 데이터를 가급적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하루에도 방대하고 다양한 콘텐츠들이 쏟아지다 보니 100% 수집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정말 중요한 것은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정 팀장은 수집·보존 단계에서 카탈로깅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모든 데이터들의 꼼꼼한 카탈로깅이야말로 향후 연구와 활용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VR영화 등 새로운 방식의 콘텐츠가 생성되고 있지만 지금 저희 영상자료원은 영화필름을 기준으로 데이터베이스가 딱 맞춰져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디지털로 만들어진 새로운 자료들이 생성될 때마다 이걸 어떻게 카탈로깅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하고 있어요. 관련 팀과 계속 논의하고 검토하고 있으며 포스트코로나시대를 대비한 조직 개편 또한 중요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좋은 콘텐츠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개인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는 것이 조심스럽다며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의 무게를 잊지 않는 정혜연 팀장. 디지털 시네마 시대에 필름 데이터가 갖는 의미를 잊지 않고 균형과 합을 맞추려는 영상자료원의 다양한 시도들이 대한민국 영화산업의 미래를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