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기술의 균형 VR영화 ‘허수아비’ 영화감독 정지현

2020년 제36회 선댄스 영화제에 색다른 한국 영화 한 편이 초청됐다. 바로 정지현 감독의 VR(가상현실) 영화 “허수아비(Scarecrow)”다. 다양한 기술을 융합해 만든 이 작품을 체험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영화제 기간 내내 부스 앞에는 긴 줄이 끊이지 않았다. 많은 호평 속에 영화제 참석을 마치고 귀국한 정지현 감독을 만나봤다.

선댄스 영화제에 가기까지

“허수아비”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콘텐츠원캠퍼스’ 사업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콘텐츠원캠퍼스’ 사업은 대학을 중심으로 기업, 연구소와 기관 등이 컨소시엄 형태로 협력하여, 인문, 공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융복합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이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관련 수업에서 정지현 감독의 영화가 탄생했다. 정 감독은 선댄스 영화제에 영화가 초청됐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영화를 만들 때는 수업에 제출할 생각만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영화제에 초청된 것이다.

“제출 영상에 형식 규정이 따로 없어서 그냥 경험 삼아 제출했어요. “허수아비”는 영화 특성상 매번 배우들이 실제 연기를 해야 하는데 이를 소개 영상에 다 담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큰 기대는 안 했죠.”

기왕 보내는 영상, 최대한 내용을 잘 전달하고 심사위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보내려고 노력했다. 배우의 동작도 따로 찍어 보내고, 필요한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게 보낸 메이킹 영상이 덜컥 1차 심사에 합격해버렸다. 추가로 보낸 빌드 파일까지 2차 심사에 합격하더니, 마지막으로 보낸 3차 영상에서 결국 최종 초청을 받았다. 그렇게 “허수아비”는 2020년 선댄스 영화제의 ‘뉴프런티어 엑시비션(New Frontier Exhibition)’ 부문에 초청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이는 당해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 영화였다. 교육 과정을 지원했던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수업을 진행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를 만든 정 감독 모두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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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체험자가 함께 만드는 이야기

“허수아비”에서 배우와 체험자는 가상현실 속에서 1:1로 실시간 상호작용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헤드셋을 낀 체험자가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허수아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체험자의 반응에 맞춰 연기하며 함께 영화를 끌어간다. 이때 열 감지와 모션 캡처 등의 다양한 기술을 활용하여 체험자와 배우들의 움직임을 가상현실 속에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에 체험자는 실제 영화 속 인물이 된 것처럼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특징은 체험자에 따라 영화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 감독이 말하는 기본 스토리는 ‘체험자가 허수아비의 저주를 풀어주고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허수아비는 다시 마법같이 사라진다’ 정도다. 하지만 체험자에 따라 스토리가 조금씩 달라지다 보니 전체 내용을 다르게 느끼는 체험자들도 있었다. 정 감독은 이를 “정확한 줄거리보다는 이미지와 체험 위주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이라는 기본 주제는 있지만, 세세한 과정은 체험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거다.

융복합 콘텐츠답게 “허수아비”에는 여러 기술이 활용됐다. 핸드폰 페이스 캡처 기술, 모션 트레킹 수트 등 기존 영화에서 잘 쓰지 않던 기술들을 사용했다. 정 감독은 이 점에 대해 사용한 기술이 다른 영화들과 조금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기술과 영화는 함께 발전해 왔어요. 현대 영화에도 이미 VFX(시각적 특수효과)를 포함한 다양한 기술이 사용되고 있죠. 이 영화는 VR이라는 조금 다른 기술을 썼을 뿐이에요. 현실을 확장한다는 면에서 오히려 VFX보다 VR이 더 본질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존에 있는 기술을 잘 조합하고, 여기에 사람의 손길을 더해 매력적인 영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매력 덕분일까? 영화제 내내 “허수아비”팀의 체험장 앞에는 연일 긴 줄이 이어졌고, 영화를 보고 나온 체험자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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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담아낸 기술과 이야기 그리고 사람

체험자와의 공감을 위해서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 정말 중요했다. 특히 정 감독이 기술적으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가상현실 속 허수아비와 체험자 간의 ‘눈 맞춤’이었다.

“눈을 맞출 수 없다면 어떤 동작을 해도 체험자와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기술적으로 꽤 어려웠지만, 교수님들께 자문하고 산학협력 단체인 버드핸드와도 계속 협력하면서 결국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술적인 부분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기술에만 치우치지 않기 위해 신경 써야 했다. VR을 영화에 사용하기로 한 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 중 하나가 이야기가 기술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기술에 집중하면 영화를 보러 온 관객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고, 영화의 내용보다 기술에만 관심이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연출 역시 중요한 부분이었다. 과한 연출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이는 체험자와 배우의 상호작용에 따라 움직이는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조절하지 않기 위해서다.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은 배우와 체험자 간의 ‘접촉’이었다. VR에서의 접촉이 사용자의 공포심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와 체험자가 더 몰입하고 배우와 공감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생각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결국 체험자의 반응에 따라 배우가 임의로 접촉의 정도를 조절하기로 결정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허수아비의 접촉에 대한 체험자들의 반응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기술과 이야기 사이에 균형을 잡고, 배우와 체험자가 교감할 수 있도록 하되 과하게 연출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 그 사이에서 초보 영화감독은 균형을 잡고자 무던히 애를 썼고, 그 노력은 체험자들의 감동으로 이어졌다. 관람평 중에는 VR 세계에서 한바탕 모험을 하고 나온 뒤 조금 전까지 함께 모험했던 허수아비 역할의 배우를 만나는 게 감동적이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술 뒤에 있던 사람을 만남으로써 가상현실 속 공감과 상호작용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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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에 영화를 만든다는 것

“허수아비”는 선댄스 영화제 외에 다른 영화제의 문도 부지런히 두드렸다. 그 결과 유럽의 다른 영화제들에서도 초청을 받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의 영화제가 미뤄지거나 온라인 상영으로 변경되었다. 국내에서 예정되어 있던 시연회도 모두 취소됐다. “허수아비”의 경우 1:1 콘텐츠이기 때문에 온라인 등을 통한 상영도 어려워서 당분간은 관객들을 만나기가 요원하다. 정 감독은 앞으로 영화 제작 현장도 이런 상황에 영향을 받아 ‘언택트’ 경향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스튜디오 촬영이 늘어나거나, 영화 제작에 지금과 다른 새로운 기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배우와 영화 제작자들이 만나지 않아도 각자의 공간에서 무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VR 작품을 엄청 확대한 개념이죠.”

물론 이 정도까지 되려면 VR 관련 하드웨어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해야 하지만, 언젠가는 이 역시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혹스럽긴 하지만, 정 감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있다.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계속 새로운 시나리오도 쓰고 새로운 VR 영화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영화와 원격 기술을 접목하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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