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지난 뒤에 보자”는 말을 인사치레로 할 만큼 코로나19는 어느새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재미없고 불안한 날들이다. 지난 4월, 코로나 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가 중단된 가운데 한 시즌을 무사히 마친 종목이 있다. ‘e스포츠’다. 최고의 인기 e스포츠 종목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LCK)’의 하광석 해설가를 만나봤다.
2007년 처음 e스포츠에 발을 디딘 하광석 게임해설가는 어느새 13년째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e스포츠 팬들에게는 ‘빛돌’이라는 닉네임이 더 익숙한 하광석. 현재 LCK 분석데스크를 맡고 있는 그는 경기 중 해설가들이 놓친 부분이나 한 번 더 짚어주면 좋을 장면을 시청자들에게 짚어준다. 세세한 분석으로 시청자들의 가려운 부분을 효자손처럼 긁어주는 하 해설가. 분석데스크를 ‘단순히 경기 들어가기 전에 가지는 쉬는 시간’이 아니라 꼭 챙겨보고 싶은, 볼 가치가 있는 온전한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경기를 생중계로 보면서 콘텐츠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해설보다 힘든 경우도 있어요. 승부의 전환점이 된 장면, 선수들의 좋은 플레이가 나온 장면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고 신경을 많이 쓰고 이 장면을 어떻게 설명할지 논의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e스포츠 특성상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생중계 중에 다루지 못하는 부분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는 그런 부분을 외부적 관점에서 짚어보고 그 순간에 선수들이 나눈 대화 녹취본을 들려준다. 경기를 보고나면 분석데스크가 보고 싶어지고 분석데스크를 보고나면 경기가 보고 싶어지는, 자생력이 있으면서 시너지를 내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덕분에 그가 진행하는 LCK 분석데스크는 경기 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중계 못지않은 시청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4월 25일 ‘T1’ 대 ‘Gen-G(이하 젠지)’의 경기로 진행된 LCK 결승전은 T1이 3:0으로 승리하며 끝이 났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T1의 우승을 예견했지만 젠지가 이렇게 허무하게 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LCK 스프링 시즌이 막을 내렸다.
시즌을 무사히 마쳤지만 e스포츠 역시 코로나19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무관중으로 경기를 진행했고 선수 인터뷰를 진행하는 김민아 아나운서가 중계 도중 고열 증세를 보여 서둘러 검사를 받으러 간 일도 있었다. 여파가 심해지자 약 3주간 리그 운영을 중단하기도 했다. “리그가 다 진행되기는 하는 것이냐”, “이러다 중도 취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후 경기는 온라인으로 재개됐다. e스포츠라 가능한 해결책이었다. 기존에는 체육관 등을 빌려 대규모로 펼쳐졌던 결승전도 올 봄에는 종로 롤파크(LCK가 진행되는 경기장)에서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결승전이 끝난 직후에는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는 기분도 들었어요. 무관중에, 종로 롤파크, 일방적인 경기내용까지. 하나의 스플릿을 보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죠.”
하지만 결승이 끝난 지 약 한 달 가량 된 지금, 하 해설가의 생각은 그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초유의 비상사태지만 확진자도 나오지 않고 정해진 일정 안에서 시즌을 마칠 수 있었던 건 e스포츠였기에 가능했다.
“시즌 종료 직후 느꼈던 아쉬움이나 허전함은 관객이나 장소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이었어요.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e스포츠의 시스템과 인프라가 얼마나 잘 갖춰졌는지 느꼈죠. 위기 속에서 빛난 시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시청자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개발사 ‘라이엇게임즈’ 통계에 따르면 2020 LCK 스프링 시즌 일평균 순 시청자 수는 무려 463만 명에 달했다. 지난 스프링 대비 13.4%나 증가한 수치다. 중국에 거주하는 시청자와 비공식 중계 시청자를 제외한 것이니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일평균 최고 동시 시청자 수도 82만 명이나 됐다. 비대면 스포츠의 가능성을 여러모로 확인할 수 있는 시즌이었다.
2020 LCK 스프링 시즌이 코로나19라는 위기 속에서도 더 많은 시청자 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코로나19 맞춤형 전략’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e스포츠는 지금껏 축구나 야구 등 기성 스포츠와 비교했을 때 PC를 기반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단점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네트워크 환경이나 PC 장비 등에 따라 경기 지연이 발생할 수 있고 게임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공정한 진행이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이번 시즌에서 무언가 더 보여주기 위해 특별한 것을 했다기보다는 20년의 세월동안 응축된 관계자들의 노하우나 위기대처 능력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스포츠는 다 중단된 상황에서 어떻게 e스포츠만혼자 무사히 시즌을 마칠 수 있었느냐’는 건 외부의 시점이었어요.’
이번 LCK 시즌이 성공을 거두자 온라인 중계 송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실제로 기성 스포츠 업계에서는 이러한 e스포츠의 노하우를 활용해 리그 중단의 위기에 대처하기도 했다. 해외 축구 리그의 경우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팀이나 소속 스타 선수들이 축구 게임으로 승부를 겨루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레이싱 또한 실제 차가 아닌 레이싱 시뮬레이션으로 게임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 해설가에게 있어 e스포츠의 코로나19 위기 극복은 내부로부터의 ‘발전’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발견’이었다.
“코로나19 이슈로 e스포츠에 대한 외부의 관심과 인지도가 올랐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외부적인 브랜딩에 집중하는 게 좋을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 해설가는 좋은 콘텐츠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순환구조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선순환구조란 시청자들이 좋아할 콘텐츠를 생산자가 만들어내면 그것을 통해 정당한 수익을 얻고 그 수익으로 다시 시청자들이 더 좋아할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근 그는 콘텐츠 제작 구조가 콘텐츠 생산자와 플랫폼, 시청자 3단계로 정리되면서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기 더 적합해졌다고 봤다.
“생산자가 콘텐츠를 만들면 시청자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즐기고, 콘텐츠 생산자는 더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선순환구조가 중요합니다. 생산자는 나를 지지하는 팬뿐만 아니라 외부의 시각이나 내부의 평가에도 귀를 기울이고 반영할 필요가 있겠죠. 그게 가능하기 때문에 온라인 콘텐츠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고요.”
하 해설가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 표현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이 적성에 맞고, 사람들도 계속 찾아주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만큼 높은 퀄리티의 분석과 해설을 시청자에게 제공하고, 시청자는 그의 해설을 들으며 e스포츠를 더 풍성하게 즐긴다.
“거창하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는 없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사실 엄청난 행운이죠. 내가 재미있어 하는 일과 남들이 내게 잘한다고 하는 일이 일치한다는 건요. 이 행운이 계속되게 하기 위해 앞으로도 더 노력하며 지치지 않고 더 재미있게, 오래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