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억 파운드에 달했던 재산가치가 불과 2년 만에 26억 파운드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한지붕 세 가족이라는 기형적 구조 때문에 나아질 기미는 없다. 올해 2월에 판을 걷어야 했던 이야기지만 그래도 유일한 해답은 하나로 뭉치는 것뿐이다."
최근 다시 합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ITV의 양대 주주이자 영국 내 최대 방송사업자인 Granada와 Carlton이 미우나 고우나 다시 서로 합치려는 이유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공수표로 끝나지 않고 뭔가 물건을 만들어 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성공하면 BBC, BSkyB가 자기 지분을 확고하게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나머지 자리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영국 방송 시장의 판도를 3분할하게 된다. 그러나 넘어야 될 산도 많다. 영국 미디어 산업의 지형변동이 어떤 이해관계 속에서 진행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ITV의 구조적 문제
10월 11일 Granada와 Carlton측은 합병 협상이 상당히 진전됐으며 법적인 규제문제들에 관해 해결책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번 협상결렬시 문제가 됐던 양자간의 이해관계는 일단락됐으며 외부적인 조건만 만족시킨다면 단일 소유의 ITV는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15개의 ITV 지역 프랜차이즈 가운데 현재 Granada가 7개, Carlton이 5개 등 무려 12개를 소유하고 있다. 합병은 이 12개 프랜차이즈가 단일 소유주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머지 3개의 프랜차이즈도 조만간 이 단일 소유권으로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당연히 독점문제 공정경쟁문제 등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현행법은 단일 방송사가 15% 이상의 시청자 시장을 차지할 수 없도록 못박고 있다. 여기다 런던 지역에서 두 개 이상의 방송 프랜차이즈를 소유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12개의 지역 프랜차이즈를 차지할 합병기업은 이 두 가지 조항에 모두 걸린다.
현재 ITV의 시청자 시장 점유율은 24%에 이른다. 12년 동안 내리막길을 달려 1990년 41.8%나 됐던 수치가 반토막이 날 지경까지 됐지만 여전히 법이 정한 상한선을 넘는다. 그러나 정부가 준비 중인 새 커뮤니케이션법은 Granada와 Carlton의 합병을 방해하지 않도록 이 두 규제조항을 다 수정할 계획이다. 문제는 이 법이 내년 말경에나 마련된다는 것. 지난 2월의 협상때에도 이 문제가 끝까지 발목을 잡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ITV는 물론 양쪽의 상황은 심각하다. 이런 가운데 극적인 계기가 마련됐다. 민영방송규제기구인 ITC나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련 규제기구에서 커뮤니케이션법 이전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키로 한 것이다. 이로써 합병은 빠르면 6개월 내에, 늦어도 9개월 내에 마무리지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해결의 실마리는 Carlton의 ITV 지분 20%를 일단 ITV에서 떼어내 별도의 회사에 이관시킨 다음, 합병으로 만들어질 새 회사인 ITV plc.에 다시 통합한다는 계획이다. ITC는 이 방법의 법적인 타당성을 놓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검토를 진행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 만들어질 ITV plc.에서 Granada의 주주들은 지분의 68%와 현금 2억 파운드를 배당받게 된다. Carlton 주주들은 32%의 지분을 갖게 된다.
합병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한지붕 세 가족식의 경영분산이다. 대주주인 Granada와 Carlton 그리고 ITV 자체의 경영진 등으로 3분할된 경영구조 때문에 경영의 비효율성은 더 이상 방치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당장에 프로그램 공급자인 Granada와 Carlton이 ITV 내의 프로그램 방영권을 따기 위해 엄청난 소모전을 벌여왔다. 양사는 제작시설 중복에서부터 행정조직 중복에 이르기까지 비용증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중간에서 ITV 경영진들은 어느 것 하나 제때에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ITV Digital의 실패를 제공한 원인 중 하나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영 비효율성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앉아서 재산을 축내고 있던 주주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합병하지 않을 경우 새로운 투자는 없다는 통첩을 전달했다. 합병 협상이 되살아나고 속도를 받은 속사정 중의 하나가 주주들의 협박성 주문이었다는 후문이다.
합병은 당장에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으로 계산됐다. 합병 첫해만도 약 3,500만 파운드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프로그램 제작비에서도 약 7,000만 파운드의 추가투자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합병으로 행정분야의 인력감축은 피할 수 없겠지만 제작비의 증가로 제작인력은 더 늘릴 수 있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Granada 사장은 "한 개의 회사 한 개의 경영진은 일관성 있는 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경쟁의 효율성에서 월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단일 경영권, 단일 소유권이 아닌 경쟁자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급변하는 방송 시장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합병은 절대불가결이라는 것이다.
광고계의 반발도 걸림돌
법적인 문제는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시장의 반발은 또 다른 문제다. 이런 점에서 합병의 가장 큰 걸림돌은 광고계다. 양자간의 합병시 ITV는 두 개의 인-하우스(in-house) 광고회사를 가지게 되는데 이들의 광고시장 점유율을 합하면 무려 55%에 이른다. 당연히 광고계가 시장독과점의 문제를 지적하게 되어 있다.
영국 최대의 광고회사인 Procter & Gamble의 대외협력국장인 게리 커닝햄(Gary Cunningham)은 "단일 ITV의 인-하우스 광고회사는 시장 장악력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고, 이 때문에 다른 광고회사들이 파고들 틈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이 둘의 합병은 결국 광고단가의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Granada와 Carlton이 해결책으로 모색 중인 대안은 둘 중 하나를 매각 또는 독립시키는 것이다. 즉, 둘 중 하나를 별도의 독립회사로 떼어냄으로써 ITV 광고시간의 반은 ITV plc.의 인-하우스 광고회사가 아닌 외부에 내놓겠다는 것이다. 계산상으로 보면 ITV plc.의 광고시장 점유율은 반으로 떨어지고 별도 법인으로 독립한 광고회사도 다른 광고회사들과 똑같은 경쟁을 해야만 한다.
이는 광고주협회(Insti- tute of Practitioners in Advertising)가 정부에 제시한 해결책이다. 문제는 별도 법인의 공정경쟁에 대해 다른 광고회사들이 미심쩍어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들은 이 별도 법인의 공정경쟁을 엄격하게 규제할 수 있는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광고계만이 합병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Channel 4, Channel 5, BBC, BSkyB 등 모든 다른 방송사업자들은 합병 무산 로비전을 준비중이다. 55%의 광고시장 점유율을 가지게 되는 ITV plc.가 이 독점적 지위를 악용할 것은 불을 보듯 하다는 논리를 내세우게 되면 공정거래위원회도 합병문제를 처리하는 데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Granada와 Carlton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자는 것이 이들 경쟁자들의 속셈이다.
돈줄인 주식시장의 신뢰를 얻는 것도 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들이 아직까지 반신반의하는 것 역시 ITV plc.가 넘어야 할 산이다. 합병이 당장의 주가상승으로 이어질 만큼 호재인 것만은 사실이나 이미 ITV의 경영 비효율성에 덴 주식시장은 여전히 경영진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무엇보다 회장에 Granada 회장인 마이클 그린이, 사장에 Carlton 회장인 찰스 알렌이 각각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응이다.
이 둘의 사이가 견원지간처럼 좋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어떻게 한집에서 손발을 제대로 맞출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그때는 집이 각각 달라서 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한집으로 합치면 그럴 필요가 없으며, 더구나 둘이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ITV Digital의 뒤처리 때 보여 주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간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제작총본부장의 공석 상황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메릴 린치사는 '합병 협상이 여기까지 진행되도록 ITV plc.의 제작총책임자가 누군지 아직까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은 시장의 불안감을 사기에 충분한 문제'라고 보고서를 내놓기까지 했다.
방송시장의 지형변화
Granada와 Carlton의 합병은 영국 방송계의 지형을 3자 정립시대로 이끌어갈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시장구도는 BBC와 BSkyB가 시장을 거의 지배하는 형국이다. BBC는 지상파 시장의 지배적 위치를 갖고 있고 BSkyB는 위성의 절대권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들이 손을 잡고 최근 ITV Digital을 인수, 지상파디지털 시장까지 팔을 뻗고 있다.
닷컴산업의 침체, 뉴욕 테러 등으로 방송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수신료라는 흔들리지 않는 재원을 갖고 공격적인 경영에 나선 BBC나 위성의 절대적 시장우위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는 BSkyB의 시장 양분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이 둘이 손을 잡기에 이르렀다. ITC나 공정경쟁위원회가 Granada와 Carlton의 합병으로 인한 독점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 것도 이런 상황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즉, 양분구도보다 3분구도가 시장의 다양성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한 셈이다.
합병 협상 진척이 알려지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11일 Carlton의 주가는 14%, Granada는 9.5%나 상승했다. 그러나 이들의 합병이 노리는 것은 '단일 소유권'의 경쟁력 제고에 그치지 않는다. 더 먼 곳까지 계산하고 있다.
ITV plc.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대서양 양안의 합병이다. 내년 말 새로 나올 커뮤니케이션법은 비EU 국가의 기업들도 ITV의 지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게 된다. 손잡을 미국 쪽 사업자는 AOL Time Warner와 Dianey. Carlton의 회장인 찰스 알렌(Charles Allen)이 이 문제를 위해 최근 미국을 다녀왔다. 현재의 불황이 걷히면 이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정리하면, 미디어 시장의 흐름은 신속한 결정을 할 수 있는 효율적인 경영 시스템, 이를 뒷받침하는 규제장치의 마련, 공·민영간의 협력 및 대립을 통한 판도 재편, 이종매체간의 다양한 결합, 나아가 국경을 넘어서는 전략적 제휴 등의 성격을 띠고 있다. 무엇보다 변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ㅇ참조 : Guardian 2002. 10. 8., 10. 11., 10. 14.∼10. 17. Independent 2002. 10. 13., 10. 17. Observer 2002. 10. 13., 10. 20. Telegraph 2002. 10. 12. The Time 2002. 10. 22.
ㅇ작성 : 김사승(영국 통신원, s.kim1@ntl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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