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ITV Digital의 실패로 영국의 지상파디지털방송, 나아가 디지털방송 전체가 위기상황에 내몰렸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2010년으로 못박은 정부의 디지털 완전이양이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나돌던 가운데 BBC가 ITV Digital의 허가권을 인수, 위기의 영국 디지털방송 구하기에 나섰다. 이 일을 위해 BBC는 최대의 적인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BSkyB와 손을 잡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 BBC의 제2지상파디지털플랫폼인 Freeview이다. 10월 30일 방송 예정일을 앞두고 최근 BBC는 채널계획의 전모를 밝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BBC의 '디지털 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동시에 내놓고 있다.
상업방송 겨냥한 대중화 전략
10월 3일 BBC는 31개 텔레비전 채널, 13개 라디오 채널로 구성된 Freeview 채널 계획을 발표했다. 채널 이름처럼 모두 무료로 제공된다. 이날 발표가 있기 전까지 방송가에서는 10월 말로 예정된 방송이 제때 시작되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들이 나돌았다. BBC가 구체적인 채널 구성 및 서비스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널 계획의 공표로 이런 추측은 일단 불식된 셈이다. BBC 영업본부장인 앤디 던컨(Andy Duncan)은 "당초 예정된 10월 말 또는 11월 초 방송 시작은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때를 목표로 대대적인 홍보작전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BBC가 제시한 채널 구성안은 다음과 같다.
1. 종합편성 : BBC 1/ BBC 2/ BBC 3/ ITV 1/ ITV 2/ Channel 4/ Channel 5/ S4C/ Sky Travel/ UK Homestlye/ Ftn
2. 뉴스 및 스포츠 뉴스 : BBC News 24/ Sky News/ Sky Sport News/ ITN/ CNN
3. 문화 및 역사 : BBC 4/ UK History
4. 영화 : Turner Classic Movies
5. 어린이 : CBBC/ CBeebies/ Boomerang
6. 공공 : BBC Parliament/ The Community Channel/ S4C 2
7. 음악 : The Hits/ The Music Factory
8. 기타 : Sky Travel/ QVC/ TV Travelshop
9. 양방향 : BBCi/ 기타 양방향 서비스
10. 라디오 : 1Xtra/ 6Music/ Asian Network/ 5 Live/ 5 Live Sports Extra/ Smash Hits/ Kerrang!/ Kiss/ oneword/ Jazz FM
여기에 포함된 대부분 채널들이 서비스 계획을 확정했지만 일부 채널들은 아직 최종 확정 단계에까지 협상이 이르지 못한 경우들도 있다. CNN, Turner Classic Movies, Boomerang을 비롯해 BBCi 외의 제2의 양방향 서비스나 몇몇 상업 라디오 방송은 아직 최종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BBC측은 "문제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방송계 일부에서는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참가가 당연시되었던 채널인 기존 공중파 방송들을 제외한 몇몇 장르의 경우 새로운 사업자들이 등장해 기존 프로그램 공급자를 긴장케 하는 장면들도 눈에 띈다. 대체적으로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프로그램 공급자들의 관심이 높은 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경쟁이 치열했던 대표적인 장르가 음악 채널이다. 음악 채널로 참여하는 The Hits나 The Music Factory 둘 다 새로 편성되는 오리지널 채널로서 배경이 간단치 않다. The Hits는 영국 내 최고의 대중음악잡지 중 하나인 의 출판사 Emap이 MTV와의 정면대결을 작심하고 내놓은 채널이다. 오프라인 인쇄매체 분야에서의 성과와 축적된 역량을 방송으로 이어나가겠다는 것이며, 주로 순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편성할 예정이다. 이에 비해 MTV측의 The Music Factory는 MTV가 영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무료 채널이다. 재미있는 것은 MTV가 당초 무료 플랫폼인 Freeview에 참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MTV의 참여가 결정된 것은 BBC가 채널구성안을 발표하는 현장에서였다. 그것도 인터넷의 텍스트 메시지 전송을 통해 극적으로 채널 참여신청을 한 것이다. 이때까지 참여를 꺼려왔던 것은 대표적인 유료 채널로 정착한 MTV가 무료로 자기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 채널의 종가로서 시장잠식을 막기 위해 MTV는 전례없이 오리지널 프로그램 채널을 무료로 전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료 채널 방식인 Freeview의 시장확대 가능성을 나름대로 계산했다는 뒷얘기다.
눈여겨볼 대목은 BBC와 50 대 50의 제휴 관계에 있는 Flextech가 두 개의 오락 채널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기존의 Flextech 계열 채널인 Trouble, Challenge TV, Bravo 그리고 Living TV 등의 프로그램들을 쇼케이스 형식으로 방송하게 되는 Ftn이고, 다른 하나는 UK Homestyle로서 생활, 정원 가꾸기 프로그램, DIY 프로그램, 퀴즈프로그램 및 요리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편성할 계획이다. 이들 외에 종합편성을 목표로 한 대부분의 오락 채널들은 나 와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현재 공중파 상업방송에서 최고 인기품목들로서 결국 Freeview가 상업방송 시청자 시장의 잠식을 노리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채널은 공중파 상업방송과의 맞불작전을 위해 Ftn은 낮시간대에, UK Homestyle은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방송시간대를 잡아놓고 있다. 이 때문에 ITV와 Channel 4는 비상경계에 들어갔다는 소문이다. 여기다 전통적인 유료 채널 가운데 하나인 영화 채널을 무료화함으로써 유료 상업 채널들의 디지털 시장 경쟁에서 BBC가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나설 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Channel 4의 경우 유료 서비스 채널로 내세우고 있는 E4나 Film Four의 설자리가 현저하게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지상파디지털의 전망은 불투명
그러나 무료채널전략을 내세운 Freeview가 성공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유료 중심 전략 때문에 실패한 ITV Digital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섣불리 할 수 없다는 지적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시청가능 범위가 여전히 좁다. 영국 전체 인구의 4분의 3 정도만 Freeview의 신호를 받을 수 있고, 나머지 4분의 1은 수신불능 상태에 놓여 있다. ITV Digital 실패의 한 요인이기도 했던 저출력이 여전히 완전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ITV Digital 당시의 출력은 전체 가구의 40%만 커버할 정도였고, 인구수를 기준으로 할 때도 65%만 시청가능 범위에 들어 있었다. Freeview의 출력은 이보다 증강되어 전체 75%의 인구에 도달하게 되어 150만 명의 시청가능 인구가 추가됐다. 그러나 나머지는 정부가 디지털로 완전이양하는 2010년까지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문제는 디지털 이양에 관한 한 정부가 시장에 일임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시장의 수요에 따라 완전이양 시기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펴지 않고 시장에 맡겨놓는 한 2010년까지 이양 시기를 결코 맞출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장에 맡긴다'는 말은 뒤집어 말해 디지털 완전이양을 정부의 정책적인 개입이 아니라 시청자의 확대추세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영방송인 BBC가 나서서 무료플랫폼인 Freeview를 등장시킨 것도 결국 '시장에 맡긴다'는 원칙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BBC가 200만 파운드, 나머지 Freeview 참여 채널들이 500만 파운드의 돈을 들여 대대적인 마케팅 작전에 나선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시장의 논리가 결코 지상파 디지털방송의 시장확대에 긍정적인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BBC가 Freeview 플랫폼의 채널 계획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한쪽에서는 "지상파디지털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돌에서 우유를 짜내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나왔다. 미디어 컨설턴트사인 Forrester Research는 '지상파 디지털텔레비전은 결코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내놓고 "지상파디지털방송을 아무리 재촉해 봐야 시장확대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디지털 정책의 초점은 지상파디지털이 아니라 케이블과 위성디지털방송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장 확대전략도 바로 이들 방송을 중심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보고서는 또 시장 가능성이 나타날 기미가 전혀 없는 디지털오디오방송 역시 정부가 거둬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실현가능성이 없는 2010년 디지털 전환은 시청자의 불만만 가중시킬 뿐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독일과 벨기에의 경우 몇몇 도시가 올 가을 디지털 완전이양을 실험적으로 실시할 예정인데 이들의 경우 시청자들 대부분이 디지털방송 성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케이블디지털방송에 가입해 있어 비교적 실험성공의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입자들은 셋톱박스 등 디지털 수신기기를 새로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 보고서는 올해 초, 유럽 전역의 지상파디지털방송 보급은 2006년에도 11% 정도에 머물 것으로 예측하였다. 지금은 이런 정도의 수치도 지나친 낙관이라는 지적이다. 영국의 ITV Digital 실패와 스페인의 Quiero Television의 실패가 치명적이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이 두 실패 사례의 공통점이 이미 시장을 확고하게 갖춘 케이블디지털과 위성디지털방송에 맞서 무리하게 프로그램 확보에 나섰다는 것이다. 요컨대 지상파디지털 중심의 디지털 정책을 수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고에 대해 BBC나 정부는 무료 채널의 확대만이 디지털 시장을 넓혀 준다는 주장으로 맞서고 있다. 아직 승부의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
ㅇ참조 : Guardian 2002. 9. 23., 10. 3., 10. 4. Independent 2002. 10. 4. BBC 보도자료 2002. 10. 3.
ㅇ작성 : 김사승(영국 통신원, s.kim1@ntl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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