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는 마침내 지난 9월 17일 디지털 계획의 핵심인 BBC 3 채널의 방송 계획에 대해 영국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다른 디지털 채널의 계획과 달리 정부가 1년이 넘게 수정을 요구해 왔던 BBC 3가 제 모습을 보이게 됨으로써 BBC의 디지털 계획은 사실상 완전한 골격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정부는 BBC 3에 대해 엄격하고 구체적인 조건들을 제시했다. BBC 3와 이에 대해 정부가 내건 조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본다.
공영 채널의 엄격한 조건들
BBC 3는 25세부터 34세의 시청자군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청년 채널이다. 기존의 BBC Choice를 대체할 이 채널이 주대상으로 삼는 젊은 성년층은 그 동안 방송에서 소외되어 왔다는 평을 받아왔다. 젊은층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내용은 오락적 색채가 강한 대중적인 디지털 채널이다. 때문에 상업방송들이 가장 경계를 해왔던 채널이기도 하다. 지난 1년간 문화부가 계속 지적해 온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연 상업 채널들과 공영방송 채널로서 차별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테사 조웰(Tessa Jowell) 문화부장관은 "당초의 BBC 3 계획은 상업방송과 뚜렷한 차이를 찾을 수 없었지만 이번에 많은 수정을 거쳐 차별화를 시킬 수 있다고 봤다."면서 그러나 "정부로서는 지금까지 텔레비전 채널의 방송 계획에 대한 승인 가운데서 가장 엄격하고 혹독한 조건들을 부가했다."고 말했다. 조웰 장관은 이어 "BBC 3는 공영방송 채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확인시켜 주어야 하며 이를 점검하기 위해 BBC 3에 대해 2년 후 종합적인 평가를 실시할 방침임을 밝혔다. 문화부가 내건 조건은 모두 12가지로 다음과 같다.
첫째, 방송의 모든 측면 특히 프로그램의 내용과 질 및 편집상의 통일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BBC가 제시한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영국 문화의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지원하며 또 반영해야 한다.
넷째, BBC 이사회는 방송 프로그램의 세세한 부분까지 감시해야 한다.
다섯째, 디지털 텔레비전 및 디지털 라디오 서비스의 확산을 위해 모든 종류의 디지털 방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여섯째, 방송 편성은 드라마, 오락, 뉴스, 시사, 교육, 음악, 예술, 과학 그리고 국제관계 등과 관련된 프로그램 장르들을 적절히 그리고 모두 망라해야 한다. 또 1년에 적어도 15시간 이상을 과학, 종교 프로그램 등에 할애해야 한다.
일곱째, BBC 3를 위해 프로그램을 신규 제작할 때는 BBC 1과 BBC 2의 젊은 성년 시청자층에게도 적합하도록 제작해야 한다.
여덟째, 전체 프로그램의 25%는 외부 독립제작사에 의뢰해야 하는데 이때 25%는 다른 채널의 외주 제작분과 관계없이 순수한 BBC 3에만 적용된다.
아홉째, 미국 프로그램에 대한 의존을 막기 위해 전체 방송시간의 90%는 반드시 EU 역내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 하며, 영국 내에 첫 방송되는 프로그램들이어야 한다. 또 BBC가 제시했듯이 BBC 3의 프로그램 제작 예산의 90% 상당을 이들 프로그램에 투입해야 한다.
열째, 프로그램들은 항상 창의적이어야 하고 또 모험적인 시도를 담고 있어야 하며, 전체 방송시간의 80%는 BBC 3를 위해 제작된 오리지널 프로그램들로 채워져야 한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새로운 소재와 인물들을 동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하고 기존의 프로그램들과의 경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저녁 시간대의 프로그램들은 이런 목적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
열한째, BBC 이사회는 BBC가 스스로 제시한 계획들과 약속들을 제대로 지켰는지에 대해 매년 연례보고서를 통해 보고해야 한다.
열두째, 정부는 2년 후 BBC 3가 과연 방송 목적에 맞게 제대로 방송을 했는지 평가할 것이다. 이 평가는 BBC 3가 전체 영국 방송시장에 미친 영향에 대한 독립기구의 평가와 공청회 등을 통한 평가 등을 포함한다. 이 평가는 다음 방송 승인 때 광범위하게 참고될 것이다.
상업방송의 우려 크게 불식
전문가들은 문화부가 내건 조건들이 이례적일 정도로 강력한 내용이라고 평했다. 90% 이상의 프로그램을 EU 역내 프로그램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나 80% 이상이 BBC 3 오리지널 프로그램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25%를 외부 독립제작 프로그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들은 BBC의 상업성을 경계해 왔던 상업방송들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25%의 외주 제작비율 명시도 전례없는 조치다. 기존의 25% 룰은 BBC 전체에 적용되었지만 이번 경우는 특정 채널을 지목해서 비율을 명시한 것이다. 이럴 경우 BBC 3 프로그램 제작예산 가운데 약 5,000만 파운드가 독립제작사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계산이다. 이 밖에도 연간 15시간 이상의 과학 및 종교 프로그램 방송 조건은 마치 BBC의 계몽주의자였던 리스 경(Lord Reith)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강력한 공영 보호장치라는 평이다.
<가디언>지는 이 같은 상업적 경쟁방지 장치로 상업방송사들에게 미칠 타격은 연간 2,500만 파운드에서 700만 파운드 정도로 줄어들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만큼 BBC 3가 상업방송에 미칠 영향은 당초 계획 때보다 현저하게 감소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다 정부가 2년 후에 방송을 평가할 것이라고 단서를 붙인 것은 만일 BBC 3가 제대로 약속들 지키지 못했을 경우 지체없이 강력한 추가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라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방송 승인 계획을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렉 다이크(Greg Dyke) BBC 사장은 정부의 결정을 환영하면서 "지난 1년간 정부가 BBC에 대해 방송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한 것은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말했다. BBC의 최대 라이벌인 상업방송 ITV 역시 정부가 BBC 3에 대해 엄격하고 세세한 조건을 붙인 데 대해 높게 평가했다. ITV는 그 동안 공공 재원인 수신료로 운영되는 BBC가 상업방송과의 경쟁에 골몰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특히 디지털 채널의 주축이 될 BBC 3가 노골적으로 상업적 방송 계획을 제시했다는 점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워 왔다.
BBC 3가 이처럼 강력한 단서조항을 달고 승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ITV를 비롯한 이들 상업방송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들의 논리는 공공 재원인 수신료를 왜 상업적 시장경쟁에 지출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불공정 경쟁이라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내놓은 서비스 계획은 방송계로부터 16세부터 34세 사이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Channel 4의 오락 프로그램 계획인 E4나 머독의 위성방송인 Sky One, 음악 채널인 MTV, VH1 등을 그대로 베낀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 상업방송의 냄새가 농후했다. 특히 대중음악, 드라마, 시사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편성 전략은 상업방송들의 전형적인 편성 전략이라는 점에서 BBC 3의 상업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증거라고 반발했다.
만일, 당시 계획이 그대로 실행에 옮겨질 경우 이들 채널들의 경영적 안정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이런 논리로 상업방송들은 거칠게 서비스 계획 기각 로비에 들어갔다. 이들의 로비 논리 중에는 정부가 무기력하게 BBC에 끌려감으로써 상업방송시장의 위축을 초래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주장도 같이 포함되었다. 정부에 대한 압박이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BBC와 밀월관계에 있다는 소리를 듣는 정부지만 이들의 불공정 경쟁 논리를 부정할 방법이 없었다. BBC는 결국 자신의 상업화에 대해 상업방송 그리고 나아가 정부가 가진 엄청난 거부감을 넘어설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이처럼 전례없는 조건들을 수용하고 강력한 공영 형태의 서비스 계획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방송계에서는 BBC 3가 이 엄격한 조건들을 모두 지켜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동시에 내놓고 있다. 이 때문에 BBC 3의 가장 직접적인 경쟁자로 꼽히는 Channel 4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마크 톰슨(Mark Thompson) 사장은 정부가 Channel 4를 비롯해 상업방송들의 불만에 귀를 기울인 것은 환영하면서도 "정부가 붙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BBC 3는 Channel 4의 E4에 대해 상업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관건은 BBC 3가 이들 조건들을 제대로 지키는가를 면밀하게 감시하고 조건의 준수를 강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업방송들은 이런 맥락에서 정부가 2년 후에 방송승인 여부를 놓고 평가에 들어가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점에 상당히 위안을 얻고 있다.
BBC 3의 출범은 ITV 디지털의 실패로 침체에 빠진 영국 디지털 방송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라는 것이 방송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방송 시기는 내년 초로서 올해 10월에 방송 시작되는 BBC 제2의 디지털 플랫폼인 Feeview에는 뒤에 동참하게 된다.
ㅇ 참조 : Independent 2002. 9. 17., 9. 18. The Times 2002. 9. 17. Guardian 2002. 9. 17., 9. 18. Financial Times 2002. 9. 17. 영국문화부 보도자료 2002. 9. 17.
ㅇ작성 : 김사승(영국 통신원, s.kim1@ntl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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