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뉴욕 테러 1주년을 맞아 영국 방송들이 다큐멘터리 등 관련 프로그램들을 봇물 터놓듯이 쏟아내고 있다. 전세계에서 미국의 유일한 지지자로 꼽히는 영국인 만큼 영국 방송들이 이처럼 달려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프로그램들의 접근 방식이나 태도들에 대한 시각은 결코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언론들은 BBC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뉴스 등 9·11 또는 이와 연관된 문제들에 대한 방송들의 시각들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조명하고 있다.
개인사에 초점 맞추어
9·11 시즌 프로그램들이 정점에 이르고 있는 가운데 가장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프로그램은 9월 11일 수요일 저녁에 방송된 BBC의 <9/11>과 ITV의 <9월의 슬픔>이다. 그러나 이 두 프로그램들은 언론으로부터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언론들은 ITV <9월의 슬픔>에 대해 BBC의 <9/11>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매겼다. <9월의 슬픔>은 사건이 안고 있는 '슬픔'이 뭔지 침착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욕 테러로 숨진 4명의 영국인 희생자의 가족, 친척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가디언>지는 "'9·11'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비극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차분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다루었다."고 평했다. 사건 두 달 만에 유복자로 태어난 한 아이를 위한 보스턴의 기금모금단체에서 인터뷰를 한 영국인 미망인 엘리자베스 터너(Elizabeth Turner)는 인터뷰 끝까지 한 번도 울먹이지 않았다. <가디언>지는 바로 이 점은 시청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대목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눈물로 시청자들을 선동하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인터뷰 끝에 기자는 그녀에게 "고맙습니다. 당신 이야기는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뭘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디언>지는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희생자 가족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미디어 특히 뉴스미디어들은 사람들 인생의 가장 어렵고 험하고 힘든 비밀을 먹고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불행은 뉴스미디어에게는 행운'이 된다는 것. 그러나 사회적 참사에 있어 개인적인 비극은 미디어로서는 가장 호재이지만 대단히 조심해야 하는 접근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9월의 슬픔>이나 <9/11> 두 다큐멘터리는 방송윤리의 극단을 시험하고 있다고 보았다. 과연 개인적인 비극을 공적인 비극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느 선까지 허용할 수 있으며, 역겨울 정도의 감상적인 것과 객관적인 보도의 구분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BBC의 <9/11>은 이런 맥락에서 비난을 한몸에 받고 있다. 우선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이제 겨우 충격에서 회복될 만한데 가족들의 고통을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다시 끄집어내고, 나아가 다시 찾아가는 일상을 간단하게 파괴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가족들의 항의는 소수이긴 하지만 이런 희생자 가족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방영을 취소해야 하는가 하는 논란으로 이어질 정도로 번져갔다. 비슷한 예로 20여 년 전 리비아 게릴라들에게 납치돼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공중폭발한 비행기 희생자 가족들이 방송사들이 비행기 잔해를 반복적으로 화면에 비추었을 때 공식적으로 항의했던 일이 있었다. 이때 방송사들은 이 항의에 대해 정중하게 그러나 간단하게 "그러면 보지 마십시오."라고 답변했다. 이번의 경우에도 희생자들은 차라리 이들 프로그램들을 보지 말 것을 언론들은 권하고 있다. 그만큼 희생자 가족들에게는 아픔을 되새겨 주기만 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또 다른 문제는 프로그램 소재에 대한 것이다. 어떤 문제든 다룰 수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BBC의 <9/11>처럼 희생자와 그 가족들들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에 매몰되어 무역센터 희생자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두 명의 제작자가 몇 달 동안 뉴욕 소방대의 훈련생을 쫓아다닐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9/11>은 또 '9·11' 자체에 관한 내용 외에 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화면들을 삽입하는 등 제작진들이 프로그램 후반 작업 때 지나치게 자신들의 의도를 끼워맞추려 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즉, 사건 이전에 소방대들이 가족 파티를 하면서 즐거운 저녁 한때를 보내는 장면은 비록 프로그램의 구도상으로 볼 때 서막과 결말을 위해 필요하다지만 이것만 조명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오히려 본질을 외면한 채 감정적으로 흘렀다는 것이다. 여기다 배우 로버트 드 니로의 감상적인 애도멘트를 삽입한 편집 역시 시청자들을 감정적인 국면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를 보였다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ITV의 <9월의 슬픔>은 <9/11>보다 점수를 더 얻었다. <9월의 슬픔>은 배경음악을 일체 배제하고 스토리 이동을 지시하는 간단한 자막만 처리했다. 이 때문에 비록 프로듀서인 로저 그라프(Roger Graef)가 미국인이지만 다큐멘터리 제작 문법은 철저히 영국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감상적인 흐름으로 빠진 BBC의 <9/11>은 상업적인 냄새와 선정적인 방식이 물씬 나는 미국식이라는 지적도 뒤따랐다. 이에 대해 BBC의 제작진들은 "네 가족을 시종 따라잡은 것은 가족들의 희생에만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구성이나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사건의 본질을 외면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또 왜 사건을 직시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9.11'을 둘러싼 콘텍스트에 대한 접근은 왜 없느냐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회교에 대한 방송들의 접근 방식이다. 최근 British Film Institute(BFI), 방송기준위원회(BSC), 그리고 민영방송 규제기구인 ITC 등이 공동으로 재원을 출자한 'After September 11: TV News and Transnational Audiences'라는 기구는 300여 명의 영국 회교도들을 대상으로 방송들의 회교에 대한 보도태도에 관해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9월 9일 내놓았다. 이 조사에 의하면 '9.11'이나 아프간 전쟁에 대한 영국 방송 보도에 대해 이들은 심각한 수준의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방송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회교도를 비롯한 소수민족이나 종교에 대한 방송들의 편파적인 시각이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킬 소지까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Cultural Diversity Network라는 단체는 문제해결을 위해 각 프로그램에서의 소수민족 등장 빈도를 늘리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미디어들이 등장시키는 취재원들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After September 11…'이 내놓은 문제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 방송들은 '9·11'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을 두려워하고 토론의 여지를 줄여버린다. 대신 선정적인 태도에 치중하면서 반아랍·반회교주의적인 주제들을 주로 다룬다. 특히 이런 접근들은 미국 언론들이 강조하는 내용들을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미국내 주요 언론이나 미 국방성이 정례 브리핑을 통해 만들어 내는 의제의 범주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냥 따라간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의 고난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한다.
심층 인터뷰에서 회교도들이 가장 불만을 드러낸 대상은 케이블텔레비전과 위성채널 뉴스들. BBC의 24시간 디지털 뉴스로 위성을 통해 방송되는 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로 지목됐다. 이들의 첫번째 불만은 속보에 치중하는 24시간 뉴스 채널들은 기본적으로 '분석'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9·11'이 일어나게 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CNN의 경우는 정보를 조작하고 검열한다는 비난까지 제기될 정도다. 인터뷰에 응한 회교도들은 "CNN은 미국의 시각을 전파하고 이를 아랍 세계에 선전하는 것을 주임무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두말할 것 없이 친이스라엘 채널"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들이 영국 방송에 대한 회교도들의 불신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 조사의 결론이다.
중간 입장을 지켜야 하는 고민
모든 프로그램들이 이들의 비난 대상인 것은 아니다. BBC2의 심층뉴스 프로그램인 는 대표적인 좋은 프로그램으로 꼽혔다. 는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취재원들을 동원해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넓고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에 진단한다고 보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인 도 주제에 대해 광범위한 의견들을 수용하고 이를 토론에 끌어들인다는 평을 받았다.
<가디언>지의 미디어 비평가인 제이슨 딘스(Jason Deans)는 방송제작진들의 고민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무엇보다도 제작진이나 프로그램 정책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경영진들은 서구적이며 기독교 기반을 갖고 있는 다수 시청자들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상치되는 종교나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도 해야한다. 요컨대 이중적인 상황을 동시에 수렴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예가 BBC1의 가장 권위 있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인 이다. 은 지난해 '9·11'이 터진 이틀 후에 있은 방송에서 미국의 대외정책 실패가 '9·11'을 불러왔다는 방청객들의 쇄도하는 비판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방청객들은 문제의 본질을 적시하는 발언을 수도 없이 내놓았으며, 당시 토론자로 참석했던 필 레이더(Phil Lader) 주영 미국 대사는 방청객들의 압도적인 반미 태도에 놀라 눈물을 삼키기까지 했다. 방청객뿐 아니라 많은 시청자 특히 회교 시청자들은 이 프로그램이 문제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지적했으며, 다양한 의견들을 가능한 수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며 찬사를 보냈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문제를 적시하고 본질에 접근하려 했음에도 수백 명 친미주의자들의 극렬한 항의를 뿌리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항의에 못 이겨 결국 그렉 다이크(Greg Dyke) BBC 사장이 나서서 공식적인 사과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이크 사장의 공식 사과가 나가자마자 회교도들의 불만과 실망의 항의가 다시 BBC에 밀어닥쳤다. 한 시청자는 다이크 사장의 사과는 영국과 BBC가 미국 정부와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라고 지적했다. 방송이 균형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 준 사례다.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고민
개방대학(Open University)의 사회학 교수인 마리 질레스피(Marie Gillespie)는 'After September…'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방송이 갖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즉, 만일 방송들이 회교 사회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방법론에 대해 분명하고 제대로 된 태도를 정립하지 못한다면 이들 시청자들을 고스란히 아랍권 위성방송인 Al-Jazeera에게 넘겨주게 된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러한 경우 회교도들을 영국 사회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녀는 "때문에 방송들은 당장 서구적 시각의 도그마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더 타임즈>의 텔레비전 비평가인 에리카 와그너(Erica Wagner)는 '9·11' 이후 1년이 지난 지금 방송들은 수도 없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사건을 정의하고 해석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제대로 정의하고 해석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대신 방송들은 마치 영화 같은 프로그램들만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즉, 문제를 제대로 파고들기보다는 드라마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는 것.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며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와그너는 "BBC와 ITV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보여 준 것은 본질의 그림자와 사건의 공포뿐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인디펜던트>의 텔레비전 비평가인 데이비드 아로노비치(David Aaronovitch)는 "저널리스트들이 이 사건의 함의를 제대로 파고들려면 사람들에게 금방 어필할 수 있는 감정적인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진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감정에 호응하기 위해 어떤 가정도 내세워서는 안 되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즉, '누가 이 일을 일으켰는가', '왜 그들은 이 일을 일으켰는가', '이 일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이 사건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이 일은 다시 일어날까', '앞으로 이런 일은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직접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ㅇ참조 : Independent 2002. 9. 8., 9. 10./
Guardian 2002. 9. 8., 9. 9./
The Times 2002. 8. 30., 9. 7.
ㅇ작성 : 김사승(영국 통신원, s.kim1@ntlworld.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