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통권 155호] 영국 118년 만에 취재 시스템 변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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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기타 | 등록일 | 02.07.15 | ||||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조회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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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9일,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은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의 그랜드홀에서 45명의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75분 동안 기자회견(press conference)을 가졌다. BBC 등 방송들은 이를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기자회견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에게 이 광경은 근대 저널리즘이 지금과 같은 시스템을 갖춘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정치 분야 취재 시스템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역사적인 사건으로 비추어졌다. 이른바 로비 시스템(Lobby system)으로 불려온 폐쇄적인 수상 관저 및 의회 취재 시스템이 '열린 공간'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공개'와 '국민과의 직접 대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기자회견' 형식의 취재 시스템 변화는 정치와 언론간의 복잡한 힘겨루기의 또 다른 산물일 뿐이라는 비난이 만만치 않다. 소위 '출입처' 중심의 취재관행이 항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온 한국의 저널리즘 현실에 이번 사건은 커다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로비 시스템의 폐쇄성 1백여 년 동안 수상 관저와 의회를 취재하는 의회 담당 기자들은 '로비 시스템'이라는 폐쇄적인 취재 시스템에 기대 취재활동을 해왔다. 이들 기자들을 '로비 통신원(Lobby correspondent)'이라고 부른다. 폐쇄적이고 특혜적인 이 시스템의 역사는 1884년부터 시작됐다. 1884년 이전까지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누구나 의회에 드나들 수 있었는데, 이들이 주로 취재하는 장소가 의회의 로비였다. 의회 담당 기자의 로비 통신원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기자들이 로비에 몰려들어 기자와 취재원 모두에게 불편이 가중되자 양자 합의로 의회 접근의 제한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로비 시스템이다. 주로 전국지를 중심으로 보통 한 개의 언론사에서 3, 4명이 의회 담당 기자로 로비 시스템의 혜택을 받으며 취재활동을 해왔다. 이들은 의회 내 안전 담당 부서인 'Sergeant at Arms(일종의 의회 경비대)'에 등록을 하고 여기서 발행하는 출입증을 받아 의회와 수상 관저를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취재해 왔다. 이들이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수상실과 의회에 대한 비공개 독점적 브리핑이다. 이들은 매일 아침 수상 관저 지하 1층에 마련된 브리핑룸에서 수상의 공보 담당 비서에게서 '비보도(off the record)'를 전재로 정치 관련 사안들에 대해 브리핑을 듣는다. 점심 식사 후 오후 2∼3시경에는 의회인 웨스트민스터로 자리를 옮겨 오후 브리핑을 듣는다. 영국의 정치 및 정부 관련 문제들은 이 브리핑에서 모두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의회 담당 기자들은 정치 관련 정보를 철저하게 독점해 온 셈이다. 의회 담당 기자들이 누리는 또 다른 특권은 의회에 들어가 의원들을 상대로 취재하고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다른 기자들은 이런 취재를 할 수 없다. 비록 교육이나 복지 문제가 그 날의 핵심사안이어도 이 분야 담당 기자들이 브리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회담당 기자가 브리핑을 받는 것이다. 대신 이들은 절대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을 엄수해야 한다. 그러나 3년 전부터 수상실의 공보 담당 비서인 '알스테어 캠벨(Alstair Campbell)'은 자기 이름을 인용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취재원 비공개'의 전통은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했다. 언론과 정부의 갈등 지난 5월 2일, 수상실은 이 로비 시스템을 폐지하고 보다 많은 기자들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자회견 형식의 취재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정치 담당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두 차례의 일일 브리핑을 한 번으로 줄이고, 대신 현안에 대해 관련 부처 책임자가 직접 담당 분야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갖게 된다. 특정 분야의 문제가 이슈가 됐을 때 그 분야의 전문기자들이 기존의 의회 담당 기자와 같이 기자회견에 참석할 수 있게 된다. 언론들은 이 같은 변화는 당장에 로비 시스템의 수혜자였던 의회 담당 기자들의 파워를 잠식하고 그 결과 이들간에 이루어져 왔던 '팩저널리즘(pack journalism)'이 수그러들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취재 시스템 변화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 같은 정보공개라는 고상한 의도가 아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정부와 언론간의 전쟁에 대한 정부측의 대응이라는 것이 정계나 언론계의 일치된 생각이다. 로비 시스템 아래서는 영국의 정치여론은 결국 의회 담당 기자와 브리핑을 하는 공보비서가 좌우하게 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스핀 닥터(spin doctor)'로 불리는 공보비서는 로비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스핀 닥터는 정치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방향을 정해서 여론을 유도한다.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서구 정치 생리상 수상마저도 이 스핀 닥터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취재 시스템 변화 이전까지 이 스핀 닥터의 자리에 있었던 전 〔데일리 미러〕 정치부장 출신 알스테어 캠벨은 '블레어의 실체'로까지 불리면서 정부와 여당인 노동당의 정치 정보를 100% 장악, 통제했던 인물로 이름이 높다. 이런 정보 통제 때문에 그는 특히 기자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며, 정부와 언론과의 전쟁 한복판에 섰던 장본인이다. 다우닝가 10번지의 스핀 닥터에 대한 의회 담당 기자들의 불만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불만이 가장 극에 달했던 시기는 '철의 여인' 대처 시절이었다. 당시 스핀 닥터는 〔가디언〕지의 정치부장을 지냈던 버나드 잉햄(Bernard Ingham)이었다. 그는 취재원 비공개의 로비 시스템의 관행을 악용, 정보를 교묘하게 통제해 기자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반발한 〔가디언〕, 〔인디펜던트〕, 〔스코츠만〕, 〔이코노미스트〕 등의 의회 담당 기자들은 결국 1986∼1991년까지 5년 동안 로비 시스템을 탈퇴하기도 했다. 기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캠벨은 정보 통제로 정부의 문제를 호도하거나 숨기는 문제의 인물이었지만, 캠벨을 비롯한 정부측의 입장에서 볼 때 의회 담당 기자들은 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무리(pack)'였다. 이런 태도는 최근 캠벨이 양자간의 관계를 '귀머거리들의 대화'라고 한 데서 잘 나타난다. 서로가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언론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시비를 걸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이런 언론에 대한 정부의 불신은 철도 문제, 의료복지 문제, 교육 문제, 치안 문제 등 행정 전반의 핵심정책에 대한 일관된 비판적 보도로 정책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만으로 이어졌다. 특히 최근 의회 담당 기자들이 정책현안들을 다루는 것보다 "블레어가 여왕 장례식에서 보다 큰 역할을 하려고 했다"는 등의 정부 정책의 본질을 벗어난 이야기에 더 매달리고 있다는 불만은 취재 시스템 변화의 도화선이 됐다. 취재 시스템의 변화가 언론과 노동당 정부간 갈등의 결과라는 점은 5월 2일 이를 발표하는 현장에서도 나타났다. 이날 수상실 대변인은 노골적으로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기자들은 불러들일 것이며, 당신들 몇몇 의회 담당 기자들의 기사에 노심초사할 필요도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기보다 유권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의회 담당 기자들의 편파적 보도를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신문과 방송의 경쟁과 정치 취재 시스템 변경의 또 다른 배경은 신문 중심의 취재 시스템에 대한 방송의 불만이다. 이미 방송은 1986년부터 하원의 의회 진행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정치현장의 공개가 유권자들의 신뢰를 확보한다는 것이 의회 중계의 이유였다. 정파적 입장에 충실한 신문들이 사안의 본질을 자기 입맛에 따라 변질시킴으로써 유권자에게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다는 불만과 같은 맥락이다. 방송을 통한 생중계는 이런 신문의 편파적인 개입을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의회 중계와 같은 맥락에서 방송계는 미국의 백악관 브리핑 스타일로 수상실 및 의회 취재 시스템을 개편해 이를 방송이 중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이런 방송의 입장을 반영하듯이 BBC의 의회 담당 기자인 '앤드류 마(Andrew Marr)'는 "로비 시스템의 폐지는 의회 담당 기자들의 사적인 카르텔의 폐지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문들은 텔레비전 생중계라는 새로운 방식은 로비 시스템의 폐지가 의회 담당 기자들의 영향력을 희석시키려는 정치권의 언론통제 의도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언론, 특히 신문의 신랄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통해 스핀 닥터의 교활한 정보통제와 미디어 플레이를 걸러내는 기능은 중단되고, 대신 정부의 의도를 방송을 통해 그대로 중계함으로써 언론의 감시자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자회견 방식의 브리핑에서는 정치권의 영향에 보다 위약한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매체들이 신문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취재 시스템의 개방화 및 방송중계는 언론의 정부 견제 기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특히 BBC의 경우 수신료제도처럼 자기와 관련된 문제가 현안으로 있을 때 정부의 의도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마련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우려는 6월 20일 처음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더 타임즈〕의 벤 멕킨타이어(Ben Mcintyre)는 "블레어 수상은 질문자를 지명할 때 방송기자를 분명히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질문자 순서 선정에서도 방송기자들이 우선 순위에 올랐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방송기자에 대한 블레어의 선호는 텔레비전 화면 노출에 큰 집착을 보여 온 블레어의 미디어 플레이의 단면이라고 분석했다. 방송 중계되는 기자회견에서 신문기자보다 방송기자들에게 더 많은 질문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블레어의 방송 노출 빈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방송 중계되는 공개적 기자회견 방식은 블레어가 자신의 말을 언론의 게이트키핑을 피해 직접 유권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인디펜던트〕지의 정치부장 '앤드류 그리스(Andrew Grice)'도 "시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기자회견 방식은 정부가 상대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문제에 대해 기자들이 자세하게 질문을 펼칠 시간을 줄여버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야당인 보수당도 신문과 같은 입장이다. 보수당은 "118년 전통의 취재 시스템을 없앤 배경은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 기자들의 비판을 피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즉, 겉으로는 의회 담당 기자들 외의 다른 기자들의 접근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는 기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 자신을 위한 술책"이라는 주장이다. '팀 콜린스(Tim Collins)' 보수당 의원은 "브리핑을 모든 기자들에게 개방함으로써 기존의 의회 담당 전문기자들은 블레어 2기 정권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각종 스캔들 기사나 정책 불협화음을 취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대처 수상 시절의 스핀 닥터였던 버나드 잉햄은 "로비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기자들이 주축이 된 관행이며, 이를 정부가 없앨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정부가 이를 폐지해 버린 것은 결국 언론조작을 위한 작전의 하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정치, 언론 모두 위기' 반증 일부에서는 이런 취재 시스템의 변화가 언론, 특히 신문과 정치권의 이익이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의 각종 여론조사들은 블레어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도가 50% 이하로 떨어지는 적지 않은 위기상황에 처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다 유럽 전체에 불어닥치고 있는 우경화 현상에 맞서 유럽화 가입이라는 난제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유권자들의 정치 무관심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런 정치 무관심은 신문 산업에 판매 감소라는 현상으로 어려움을 던져 주고 있다. 정치정보의 공개라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이들의 관심을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디언〕은 양자의 이해가 일치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ㅇ참조 : Guardian 2002. 5. 2., 5. 3., 6. 11., 6. 12., 6. 13., 6. 22., 6. 24. / Independent 2002. 5. 3., 5. 4., 6. 21. / BBC 2002. 5. 2., 6. 20., 6. 21. / Times 2002. 6. 20., 6. 21. ㅇ작성 : 김사승(영국 통신원, s.kim1@ntl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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