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의 디지털화라는 격동기를 맞이해 지난 40여 년간 아성을 지켜온 지역 방송의 경영체계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당장 내년부터 시작되는 대도시권의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화가 지역 방송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예측을 불허한다. 지역 방송에 있어서는 거액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하드 및 지역적 특성을 살린 콘텐츠 개발과 더불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첩첩산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일부의 지역 방송 중에는 지역의 특색을 살린 콘텐츠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자구책 강구에 분주한 곳도 적지 않다.
지역 민간방송의 위기의식 대두의 배경
일본의 지역 방송은 일부 대도시권의 방송국은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동경의 키 국을 중심으로 한 계열국에 소속돼 키 국이 제작한 프로그램을 전송하고 약간의 지역 프로그램과 뉴스를 제공하는 체제로 운영되어 왔다. 이들 지역 방송은 지역 경제의 규모에 따라 제작능력에도 큰 차가 존재한다. 가령 같은 지역 방송국이라고 해도 인구 규모와 경제 규모가 큰 방송국은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역으로 동경의 키 국에 판매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중소 규모의 지역 방송은 단지 키 국의 프로그램을 전송하는 기능과 약간의 로컬 뉴스를 제공하는 선에서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민방이 동경 키 국 제작의 프로그램 전송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발생되는 문제는 다양하다. 우선 지역의 문화와 지역정보를 제공해야한다는 방송 본연의 역할이 갈수록 축소된다는 점이다. 콘텐츠 제작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몇십 년간에 걸친 이러한 관행이 눈에 보이지 않게 지역 방송의 제작능력을 하락시켰다는 점은 명백하다.
또한 수직적인 문화전달로 인한 다양성의 결여도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동경으로부터 정보 및 문화가 수직적으로 각 지역에 전달됨으로써 문화의 획일화 현상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역으로 일본 고유의 문화가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져오고 있는 지방으로부터 발신되는 문화 및 정보가 철저히 무시되고 국적을 알 수 없는 문화가 도쿄라는 브랜드 명으로 일본 전역의 안방에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역 문화의 발신 및 정보 전달을 게을리한 일차적인 책임은 지역 방송국에 있다. 지역 방송이 힘 안 들이고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키 국의 프로그램을 전송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동안 방송산업의 도쿄 중심화 현상이 가속화되어 온 것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지역 방송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지역 민방이 이러한 도쿄라는 일국 중심의 방송구조에 대해 위험성을 실감한 것은 2000년 12월부터 시작된 키 국의 BS디지털 위성방송 개시로부터였다. 당시 BS디지털 위성방송에 참가한 동경의 키 국들은 장기적으로는 자신들의 콘텐츠를 지역 민방이 아니라 전국을 커버할 수 있는 BS디지털 위성방송을 통해 일본 전국민을 상대로 방송하는 것이 수익성이 높다는 인식하에 BS디지털 위성방송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실시했었다.
이에 지역 민방들은 기존의 수직적인 방송산업구조가 얼마나 취약한 구조인지를 절실하게 실감하게 된 것이다. 즉, 방송기술의 변화가 자신들의 생존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BS디지털 위성방송 실시 후 지역 민방에서는 지역 밀착을 위한 다양한 시도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콘텐츠 개발에 힘쓰고 있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지역 민방의 다양한 시도와 콘텐츠 개발에 관한 노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지역 민방 생존을 건 다양한 시도와 콘텐츠 개발
- 지역과 더불어 생활
1997년 3월 스미토모 상사, TBS 등이 중심이 되어 재팬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JET)이라는 동남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방송이 시작되었다. JET의 방송 지역은 대만을 중심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호주, 중국, 미국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홋카이도 텔레비전은 JET에 참가한 유일한 지역 민방이다. 홋카이도 텔레비전은 1997년부터 현재까지 JET의 프라임 타임에 주 1회 <홋카이도 아워>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홋카이도 아워>는 '아시아에 雪을 내리게 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어에 중국어 자막으로 방송된다. 내용은 홋카이도의 눈 축제, 온천, 스키, 스노보드, 카누 등 홋카이도의 옥외 활동과 홋카이도의 지역 소개,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한 이벤트와 다큐멘터리 등이 중심으로 대부분 지상파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을 재편집해 사용하고 있다.
1997년 JET에서 <홋카이도 아워>가 방송된 이후 홋카이도의 관광산업에 큰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 1997년 5만 명에 머물렀던 대만의 관광객이 1998년에는 9만 3,000명, 1999년 12만 명, 2000년에는 10만 9,000명, 2001년에는 11만 9,000명으로 증가했다. 물론 대만 관광객의 증가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홋카이도 아워>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현재 <홋카이도 아워>는 JET뿐만 아니라 BS아사히에서도 주 1회 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 지역 교류
'일본의 한복판 공화국'이라는 독특한 공화국이 일본에 2000년 탄생했다. 이 공화국은 물론 실제의 공화국은 아니고 후쿠이방송, 기후방송, 미에방송, 비와湖방송의 지역교류를 위해 4개의 지역방송이 만든 가상의 공화국이다. '일본의 한복판 공화국'에서는 4개 지역 방송이 지역교류 사업의 일환으로서 관광, 레저, 스포츠, 음식, 온천 정보, 계절의 맛 등을 테마로 매주 금요일 저녁에 자국의 정보 프로그램을 이용해 방송을 실시한다. 네트워크를 형성해 참가하고 있는 4개 지역의 민방은 각자의 취재력을 동원해 지역의 소재를 발굴한 뒤 지역 시청자에게 공동으로 방송을 한다는 점에서 지역 민방의 수평적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참가하고 있는 지역 민방은 각기 자신들의 시각에서 취재한 소재를 방송하는 관계로 같은 테마라고 하지만 실제 방송되는 내용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점이 역으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지역 방송의 수평적 결합은 동경의 키 국에 종속된 수직적 관계와는 달리 지역 민방 스스로가 소재를 발굴하고 취재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다양한 지역의 소재를 발굴해 교환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취재력은 물론이고 제작능력도 향상된다. 지상파의 디지털화를 대비해 지역 민방 각 사가 콘텐츠의 개발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이러한 지역민방의 수평적 결합은 주목받을 만하다. 또한 일상생활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점점 광역화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정 지역의 정보와 일본을 대표하는 도쿄의 정보, 문화 이외의 중간적인 공간 및 지역을 커버할 수 있는 지역 미디어의 수평적 연계는 다 채널화되고 있는 디지털 방송시대의 지역 포털 사이트로서도 커다란 역할이 기대된다.
- 방송국과 신문의 연계
'Banana'는 니이가타방송, 니이가타新報社, JR東日本 니이가타 지사 등 3개사의 공동사업으로 총 사업비 2억 엔을 투자해 니이가타 역에 개설한 지역 발신형 대합실의 기능을 수행하는 미디어 스테이션의 애칭이다. 원래 'Banana'는 니이가타방송과 니이가타新報社가 라디오와 석간신문의 인지도를 향상시키고자 미디어 믹스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로 니이카타縣을 대표하는 2개 지역 미디어가 풍부한 자산과 지역 인지도를 이용해 상승효과를 노리고 하루 이용객이 7만 5명에 이르는 니이가타역을 PR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니이가타역의 대합실을 이용해 인터넷 코너, 라디오 및 텔레비전의 중계 스튜디오, 멀티비전 코너, 신문기사의 검색 코너 및 호외 발행 시스템 코너 등을 완비하고 있다. 특히 라디오 및 텔레비전의 중계 스튜디오에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로컬뉴스를 매일 방송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멀티비전 코너를 통해 방영된다. 또한 니이가타新報社의 신문기사도 문자 뉴스 및 데이터 방송의 형태로 멀티비전을 통해 볼 수 있으며, 뉴스 이외에도 니이가타縣의 PR비디오, 니이가타 방송국의 영상 라이브러리를 이용한 니이가타縣의 영상 등도 멀티비전을 통해 방송된다.
특히 Banana의 라디오 및 텔레비전 중계 스튜디오를 활용한 인기 기획 코너인 <바나콘그>는 특정 테마를 석간신문에 실은 뒤 전용 홈페이지와 휴대전화로 찬반의 의견을 모아 Banana의 라디오 중계 스튜디오에서 방송하는 기획 코너인데, 관심이 높은 테마일 경우 1,000명 이상이 참가한다고 한다. 이들 참가자의 대다수는 기존의 AM 청취자, 신문 구독자가 아닌 새로운 이용자로 분석돼 광고효과도 기대되고 있다. 현재 미디어 스테이션 Banana의 회원은 약 5,000명에 이르고 있으며, 주 이용층은 10대 후반에서 30대 전반의 학생 및 회사원 등이다.
다채널화 다미디어화의 흐름은 지상파 지역 민방의 수익구조는 물론이고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CS 및 BS 디지털 위성방송의 전국적인 전개로 지역 시청자들은 보다 다양한 내용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 민방이 도쿄의 키 국이 편성한 내용을 그대로 내보내기만 해도 앉아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수익구조는 시대적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지역 민방의 새로운 시도와 노력도 다양하다. 위에 거론한 3개의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지역 민방의 모습들로 지상파의 디지털화에 직면해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송이 디지털이든 아날로그이든 시청자들은 우수한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방송을 시청한다는 점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수한 콘텐츠의 개발을 위한 지역 방송의 노력은 비록 때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지역 방송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행착오로 큰 의미가 있다.
ㅇ참조 : AURA No.154 2002. 8.,민간방송 2002. 9. 3.
ㅇ작성 : 김경환(일본 통신원, k-kim@sophia.ac.j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