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이스라엘
게임산업의 고민
스타트업 국가(Startup Nation)로 불리는 이스라엘에서는 세계 유수의 IT 기업들이 연이어 탄생했으며
게임산업에서도 플레이티카 등의 글로벌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스라엘 게임산업 내부에서는 소셜 카지노와 캐주얼 게임에 집중된 산업 생태계 불균형과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스라엘 게임산업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인큐베이터 설립과 해외 개발사와의 협력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정부의 산업 육성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스타트업 국가로 꼽힌다. 우리나라 경상도에 불과한 면적에 인구 920만 명을 조금 넘는 작은 국가이지만, 스타트업 수는 1,400명 당 1개로 세계 1위이며,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 수도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게임산업은 아직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낮은데, 글로벌 회계법인 딜로이트(Deloitte)는 이스라엘 게임산업 규모를 2018년 기준 세계 53위 수준으로 평가했다. 이스라엘 게임산업협회(GameIS)에 따르면 이스라엘 게임기업 수는 약 360개로 8,000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으며, 이는 32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IT 생태계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숫자이다. 그러나 빠른 성장세를 보여 왔다. 이스라엘 게임산업협회는 이스라엘 게임산업의 매출규모가 2018년 18억 달러에서 2019년 25억 달러로 성장했으며, 2020년에는 팬데믹으로 인한 게임 소비 증가에 힘입어 35억 달러까지 늘어났다고 추정했다.
이스라엘 게임산업 매출 규모 (단위: 10억 달러) 출처: GameIS(2020.10.)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게임사로는 플레이티카(Playtika), 문액티브(Moon Active), 크레이지랩스(CrazyLabs) 등이 있다. 플레이티카는 2010년에 설립되어 소셜카지노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오른 바 있으며, 전성기에는 나스닥에서 130억 달러 이상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다. 캐주얼 게임에 특화된 문액티브는 지난 해 11월 50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으며 30억 달러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기도 했다. 모바일 캐주얼 게임 개발기업 크레이지랩스는 1억 1,000만 명 이상의 월간활성이용자 수를 보유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이스라엘의 대표 게임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스라엘 게임산업은 소셜 카지노와 캐주얼 게임 분야에 편중되어 있으며, 막대한 개발비와 오랜 개발기간이 소요되는 AAA급 게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스라엘에서 일반적으로 제작되는 게임 장르는 하이퍼캐주얼이다. 수익모델은 광고 노출과 게임 내 소액결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일례로 문 액티브가 2015년 출시 후 미국과 영국 등 다수 국가에서 매출 1위를 기록한 소셜 카지노 게임 <코인 마스터(Coin Master)>는 기본적으로 슬롯머신을 돌려 가로로 같은 그림 3개를 맞추면 아이템 보상을 받아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스핀을 돌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며 기본 에너지를 다 쓰고 나면 플레이어는 게임을 계속하기위해 에너지를 구입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사실상 카지노 슬롯머신과 차이가 없다며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1
문 액티브의 소셜 카지노 게임 <코인 마스터> 출처: Apple App Store
이스라엘 게임산업협회의 가이 벤도브(Guy Bendov) 회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게임산업이 소셜 카지노 등의 캐주얼 게임 개발에 주력하는 배경에는 비용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의 인건비는 타국 대비 매우 높은 수준으로, 대형 게임 개발을 위한 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큰 위험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대형 게임 개발에 필요한 노하우의 부족이다. 이스라엘 게임은 초기부터 <888>과 같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위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복잡한 게임 매커니즘을 고안하고 구현할 숙련된 인력을 찾기 어렵다.
1997년 처음 출시된 <888>은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이 필요한 AAA급 게임 개발에 어려움을 겪던 이스라엘 게임 기업들에게 카지노 게임 시장의 잠재력을 입증했으며, <888>을 개발한 인력들이 다른 게임사에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게임산업은 소셜 카지노 위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장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소셜 카지노 게임에 치중한 이스라엘 게임 생태계의 불균형으로 인해 글로벌 게임시장에서 이스라엘의 입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사용자를 중독으로 이끄는 도박성 게임의 특성상 기업 이미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게다가 ‘스타트업의 나라’라는 별칭에 어울리지 않게 게임산업에서는 도전에 나서는 경우가 좀처럼 없어서 전문 인력 양성과 게임 개발 및 운영 노하우 축적이 되지 않는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특정 국가에서 만들어진 게임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면 해당 국가의 위상이 단숨에 높아지기도 한다. 일례로 폴란드 게임기업 CD 프로젝트(CD Projekt)가 폴란드 작가가 집필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개발한 <더 위처(The Witcher)> 시리즈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자 글로벌 게임시장에서 폴란드는 게임 강국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게임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인권 침해에 대해 국제 사회의 비판이 높아지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가 고착된 상황이다. 이는 수출 중심으로 형성된 이스라엘 게임사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이스라엘 게임사들은 부정적 이미지를 우려해 글로벌 시장에서 이스라엘에서 만든 게임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다. 게임 콘텐츠 내에서도 이스라엘의 문화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는 자체 검열이 이뤄지고 있다.
스팀(Steam)의 인디게임 카테고리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얻고 있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 <그라임(Grime)>의 개발사 클로버 바이트(Clover Bite) 역시 예외가 아니다. 클로버 바이트의 야르덴 바이스브롯(Yarden Weissbrot) 프로듀서는 이스라엘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게임 개발과정에서 게임 스튜디오가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하려고 극도로 조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하다가 출신을 묻는 질문에 이스라엘이라고 대답했다가 게임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국적 노출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 게임 이용자가 남긴 <그라임> 후기에는 “이 게임이 이스라엘에서 개발되었다고 해서 평가를 바꾸지는 않겠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개발사의 국적이 게임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역설이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게임업계의 보이콧 사례만 보더라도 이스라엘 게임사들의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미하일로 페도로프(Mykhailo Fedorov) 우크라이나 부총리가 SNS를 통해 글로벌 게임사와 플랫폼에 러시아 제재를 요청하자 게임업계는 이에 즉각 반응해 러시아와 관계 단절에 나섰다. 게임 판매 중단이 이어졌으며, EA는 축구게임 <FIFA 22>에서 러시아 대표팀을 삭제하기도 했다. 스팀과 같은 플랫폼에서 게임 이용자들이 러시아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리뷰를 도배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스라엘 게임산업 역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첫 번째 해결 노력은 게임 스타트업 지원으로 지난 3월 베자렐 예술아카데미,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예루살렘 문화유산부 등이 힘을 합쳐 예루살렘에 게임 스타트업 전문 인큐베이터 ‘게임허브(Gamehub)’를 설립했다. 게임허브는 현재 초기 단계의 게임 스타트업들에게 3개월의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향후에는 중견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6-9개월의 기간 동안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지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게임허브의 대니 베이컨(Dani Bacon) 매니저는 언론 인터뷰에서 소셜카지노와 하이퍼 캐주얼 게임 중심의 이스라엘 게임산업에 대한 비판을 알고 있다며, 이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학계의 지원을 받아 다양한 장르의 인디 게임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에서 당장 AAA급 게임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반적인 게임산업 생태계가 갖추어져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기존 게임사가 당장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모델에 주력하는 만큼, 게임허브는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트업들이 금전적 압박에서 벗어나 콘텐츠의 품질에 중점을 둔 게임 개발에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다른 해결 방안은 글로벌 퍼블리셔 및 개발사와의 협력이다. 국가 이미지는 정치사회적 이슈와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게임산업의 자구노력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스라엘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원치 않고 기존 이스라엘 게임시장의 제한된 장르에서 벗어나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추구하는 게임 개발자라면 해외에서 기회를 찾는게 더 빠르다.
다행히 원격근무 확산 트렌드에 힘입어 현지 개발자와 글로벌 기업의 연계가 수월하지고 있다. 이스라엘 출신으로 EA의 COO를 역임한 마야 랜드(Maya Rand)가 설립한 엑스플레이스(Xplace)는 이를 지원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게임산업에서는 매 프로젝트마다 필요로 하는 전문성이 다른 만큼 하나의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신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인력 구성도 달라지므로 인력 수요가 항상 존재한다. 엑스플레이스는 프리랜서 개발자가 자신의 포트폴리오 프로필을 올려놓으면 자동으로 해당 프로필에 적합한 프로젝트를 매치시킨다. 현재 텐센트, EA, 유비소프트, 징가 등 유수의 게임사들이 엑스플레이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글로벌 게임사들이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개발자들이 늘어날수록 이스라엘 게임 생태계의 다양성과 역량도 자연스럽게 증진될 것이다.
이스라엘 게임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엑스플레이스의 랜드 대표는 이스라엘 혁신청이 게임 분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며, 차세대 산업인 게임에서 기회를 놓치고 있는 정부에 유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IT 강국으로 손꼽히는 이스라엘은 특히 사이버보안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으며, 이는 정부가 국가 방위 차원에서 사이버보안 산업 육성에 전폭적인 투자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게임산업에서도 스타트업 지원을 비롯한 정부의 다양한 육성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