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종영한 <무한도전>(MBC)의 마지막 대형 이벤트는 3년 이상 공들여 준비했다는 <토토가3(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H.O.T.콘서트>였다. H.O.T.의 열성 팬들은 물론, 그 시대를 추억하는 시청자들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의 작동에 울컥했다. 추억여행은 <무한도전>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장소이자 H.O.T.의 데뷔 무대였던 여의도 MBC 공개홀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공연에 모두가 찬사를 보냈지만 이전의 <토토가> 시리즈와 달리 반향은 지속되지 않았다. <무한도전>도 H.O.T.도, 추억을 현재로 끌어올릴 만큼의 에너지가 부족했던 탓이다. - 글. 김교석(문화평론가)
함께했던 시간이 빛나기에 아련함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은퇴를 앞둔 프랜차이즈 스타를 떠나보내는 기분이다.
토토가, 90년대 특집 등을 통해 90년대를 현재진행형으로 넘나들던 <무한도전>은 지난 3월 31일을 마지막으로 200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후반까지, 특정 세대와 시대(era)의 아이콘으로 남게 됐다.
우리나라 예능은 <무한도전> 이전과 이후로 명확히 나뉜다. ‘국내 최초이자 최고의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으로 꼽히는 <무한도전>은 쇼 버라이어티에서 관찰형 예능으로 진화하며 지난 10여 년간 예능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또한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 제작방식의 획기적인 변화와 장르 융합, 시청자의 의식까지 모든 영역에서 한국 예능 콘텐츠의 외연과 개념을 확장했다.
물론, 그들도 시작부터 창대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4월 <무한도전>은 MBC 주말 예능 <강력 추천 토요일>의 한 코너인 ‘무모한 도전’으로 시작했다.
‘일류 연예인이 되기 위한 초특급 도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유재석, 정형돈, 노홍철, 표영호 등이 황소와 줄다리기 대결을 펼친 것이 첫 방송이었다.
이후에도 목욕탕 배수구와의 물빼기 경쟁, 지하철과 달리기 대결, 모기향보다 모기 많이 잡기, 분류기보다 동전 더 빨리 나누기 등 어이없는 도전에 매번 진지하게 임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는 마이너한 감성의 예능이었다.
이 시절 무한도전의 인상은 훗날 위기설 때마다 ‘초심’의 이미지로 회자되었다. 하지만 이 소소하고 엉뚱한 도전이라는 포맷은 사실 일본 예능의 영향이 엿보이는 기획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릭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진정한 리얼 버라이어티로서의 <무한도전>은 그해 겨울 스튜디오에서 ‘아하 게임’을 하면서 시작됐다. 형식적으로 보면 야외에서 스튜디오로, 무정형 예능에서 과거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KBS)의 코너인 ‘공포의 쿵쿵따’와 같은 벌칙 게임과 같은 익숙한 방식으로의 회귀였지만 이 과정에서 <무한도전>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 쇼가 발화했다. <무한도전>은 방송에서 착하거나, 순수하거나, 긍정적인 면모만 보여줘야 한다는 금기를 깨고 박명수와 노홍철, 정형돈 등을 통해 부족하면서도 뻔뻔하고, 각자의 욕망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있는 그대로의 캐릭터를 보여줬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개별 카메라 시스템의 도입이었다. 김태호 PD는 2006년부터 멤버당 카메라를 배정했다. 그전까지 보통 카메라 두 대로 전경을 담아내던 예능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수많은 각도에서 찍은 영상을 사후 편집하는 스토리텔링 작법을 처음 시도한 것이다. 같은 사안에서도 출연자마다 다른 미묘한 표정변화와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며 <무한도전>만의 캐릭터 쇼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2006년 8월, 뉴질랜드 편 이후 <무한도전>은 촬영 현장과 실제 출연자의 삶이 혼재되는 예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서로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롤링페이퍼를 돌렸던 뉴질랜드 특집은 <무한도전>이 본격적인 리얼 버라이어티로 발돋움한 원년이라 할 수 있다. 캐릭터 간의 관계를 극화할 가능성을 찾았을 뿐 아니라 방송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시청자와 프로그램 간의 좁아진 거리로 인해 몰입의 깊이를 한 층 더 ‘리얼’하게 만들어낸 출발선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확고한 캐릭터의 특성과 이들의 관계성은 무한도전이 563회 동안 특별한 설정 없이 매번 새로운 특집으로 꾸며지는 ‘무형식의 형식’이 가능했던 이유였다. 이른바 그전까지 ‘방송의 묘’라 일컬어지던 설정과 대본을 걷어내고 리얼리티와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예능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이후로도 부족하고 못난 캐릭터들의 성장스토리라는 인류 보편의 드라마가 무한도전의 인기를 이끌어나갔다. 10주간 방영된 WM7 레슬링 프로젝트나 봅슬레이, 댄스스포츠 등 여타 대형 프로젝트들에서 멤버들은 제2의 인생을 사는 듯 열정을 불사르며 최선을 다했다. 이 모자란 남자들의 성장을 응원하는 시간이 쌓여가는 사이 시청자와 멤버들은 그 속에서 ‘우리’라는 소중한 정서를 발견하고 키워나갔다. 무한도전은 시청자 뿐 아니라 출연진에게도 단순한 방송 프로그램 그 이상이였다. 500회 특집과 마지막 회 오프닝에서 유재석은 ‘우리는 이 안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무한도전은 카메라가 켜지면 시작되고, 꺼지면 종료되는 촬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청자들 또한 단순히 TV쇼를 시청한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어떤 친근한 존재를 꾸준히 만난 셈이다. <무한도전>을 둘러싼 끈끈한 팬덤은 그렇게 결성되었다.
무한도전은 마치 빅뱅 직전의 블랙홀과 같았다. 드라마와 뉴스, 다큐멘터리, 시트콤까지 다양한 장르를 흡수하며 예능이란 장르를 무한하게 확장시켰다. 방송일정에 따라 가수들이 신곡 발매시기를 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가요제 특집을 비롯해, 김혜수 등의 특급배우와 영화 전문 스태프가 제작한 무한상사, 프로레슬링, 조정, 에어로빅 특집 등 각종 장·단기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대체에너지 특집’, ‘지구특공대 특집’, ‘나비효과 특집’과 같은 환경문제, 탄핵 정국에서의 역사의식을 다루는 역사 강의 특집 등 사회적 이슈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예능과 코미디는 동의어의 관계를 벗어났고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일상성을 품게 되었다.
<무한도전>이 처음 선보인 장르 융합과 실험은 오늘날 예능이 다양하게 진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음악과 예능의 결합은 오늘날 다수의 음악경연 예능으로 이어졌고, 출연자들의 일상 공간과 삶 속에 카메라를 갖고 들어간 시도는 오늘날 관찰 예능의 모티브가 되었다.
예능 작법도 완전히 달라졌다.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나잡아봐라(꼬리잡기)’ 등 추격전이라 불리는 캐릭터 쇼를 기반으로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극화된 예능을 선보이는가 하면, 리얼리티를 내세우며 시청자 곁으로 가깝게 다가오기도 했다. 여기서 핵심은 카메라와 프로그램을 방송국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는 점이다. 통제된 촬영 현장에서 벗어나 학교축제로, 길거리로 다가간 변화는 방송과 현실의 괴리를 줄이고 경계를 무너뜨렸다. 예능이 우리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시도는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시청의 경험을 선사했다. <무한도전>을 시청한다는 것은 방송을 단순히 보고 즐기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고 소통하며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것까지 확장됐다. 그렇게 <무한도전>은 TV 예능과 시청자 사이에 ‘함께 살아간다’는 연대의식을 심어줬다. 시청자도 적극적인 피드백과 정서적 공유라는 또 다른 재미에 눈을 떴다. 더 이상 시청자는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프로그램 진행의 한 축을 이루는 제작의 주체로 올라섰다. 그 덕분에 TV 예능은 가장 친근하고 일상적이면서도 시대성을 가진 대중문화 콘텐츠로 나아갈 수 있었다. TV 시청의 개념과 문화를 바꾼 것이야말로 <무한도전>이 우리 세대에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무한도전>은 시청자들과 일종의 ‘시대정신’을 공유한 최초의 예능이다. 지난 10여 년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두터운 시청자 층과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단순히 프로그램이 재밌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한도전>의 팬이라는 것은 함께 특정 시기를 보낸 친구와 나누는 정서적 유대를 의미한다. 이런 생경한 시청 경험은 시청자들에게 <무한도전>이 ‘우리의 쇼’이며, 자신의 젊은 날의 한때가 담긴 시대적 기록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2000년대를 관통한 청춘들에게 토요일 오후 6시 30분이 갖는 의미가 각별한 이유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토요일 친구들의 도전도 결국 막을 내렸다. <무한도전>은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결국 정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법을 찾지 못했다. 리얼 버라이어티와 관찰예능의 한계인 ‘지속가능한 이야기’라는 불로초를 끝내 찾아내지 못한 탓이다.
함께 성장할 때까지는 신났지만 어느 정도의 성공궤도를 달린 이후 <무한도전>은 굉장히 오랜 시간 새로운 목표 설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급변하는 방송 환경에다 출연진의 이탈까지 겪으며 파고의 높이는 더욱 거세졌다. 어떤 배도 정박할 수 있을 만큼 든든한 방파제였던 캐릭터 쇼에 균열이 생겼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외부 게스트의 도움이나 해외 촬영에 의존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빈도가 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프로젝트의 판은 점점 커져갔지만 그 파급력, 감동의 온도, 공연 이벤트의 울림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한때 명절 기차표처럼 예매 전쟁을 펼쳐야 했던 ‘무도 달력’도 어느 순간 대형마트에 쌓여 있는 걸 줍다시피 가져오면 됐다.
마지막 회를 앞두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김태호PD는 “<무한도전>의 전성기가 2010년까지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언뜻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굵직한 대형 프로젝트들은 그 이후 더 많았고 시청률이 떨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놀랍도록 정확한 자기성찰이다. 2010년에 이미 <무한도전>의 캐릭터 쇼는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평균보다 조금 모자란 여섯 남자의 도전이란 성장 스토리가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레슬링 특집은 끝까지 짜낸 마지막 한 방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 위기설은 대형이벤트의 스케줄에 따라 계절처럼 돌고 돌았다.
캐릭터 쇼를 기반으로 한 <무한도전>의 입장에서 성장 이후의 스토리는 사족일 수밖에 없다. 멤버들의 관계는 고정되어가고 수동적으로 변했다. 멤버들을 지휘하는 유재석의 손은 점점 바빠졌고, 존재감은 절대적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김태호, 유재석의 재능과 노력 덕분에 7여년의 시간을 버텨냈다.
<무한도전>은 캐릭터 쇼의 재미가 줄어들자 사회적 목소리와 올바른 삶에 대한 고민 등을 통해 정서적 연대를 끈끈하게 이어가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영석 사단의 연작을 대표로 방송은 점점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새로운 흐름이 대세가 되고, 보다 젊은 감각과 다양한 소재의 쇼가 쏟아지면서 정체된 성장 스토리는 점점 청춘 회고록처럼 빛이 바래고 말았다.
김태호 PD는 캐릭터 예능은 이제 끝났다고 말한 바 있다. 절반만 동의한다. 다만 캐릭터 쇼를 바탕으로 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시대는 일단락되었다. 왜냐면 이제 예능은 리얼을 넘어서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리얼 버라이어티는 특정한 상황(이를테면 게임이나 추격전)과 관계에서 우연히 발견한 인간적인 매력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오늘날 시청자들은 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드러나는 삶의 표정에서 재미와 공감대를 찾는다. 이제 모여서 무언가를 해내는 성공 스토리는 살짝 지나간 이야기가 됐다. 일상의 공감이나 또 다른 라이프스타일 제시라는 다음 버전의 문법에 시청자들은 과거 <무한도전>에서 느꼈던 시대성과 정서적 연대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무한도전>에게 캐릭터 쇼 위주의 성장 스토리는 버릴 수 없는 토대였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기에는 이미 기성세대가 되었다. 바로 이 점이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관찰 예능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이유이며, 더 이상 <무한도전>의 캐릭터 쇼가 결국 다시 불을 지피지 못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