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경일(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오늘부터 사람들의 성(性)이 모두 바뀐다면? 갑자기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 모두 5억 원씩 떨어졌다면? 혹은 남북통일이 됐다면? 물론 현실이 아니다. 다만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을 가정한 버전, 즉 상황 속 일들을 실시간 채팅하며 보여주는 연출 방식을 취하는 것을 ‘버실(버전 실시간)’이라고 한다. 특히 요즘 흔히 청년들을 일컫는 이른바 MZ세대들보다도 더 어린 초등학생들, 즉 알파세대들 사이에서 화제다.
‘버실’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여러 가지 상황극을 꾸며서 유튜브에서 실시간 방송하듯 채팅과 자신의 리액션을 편집해 보여주는 콘텐츠들을 통칭한다. 중요한 점은 그냥 가상극이 아니라 ‘실시간’이라는 말에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채팅창의 내용들 역시 제작자 1인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제작자가 직접 댓글창과 자신의 목소리를 써놓고 녹음하여 진짜 실시간처럼 꾸미는 ‘버실’들을 여러 가지 모으면 ‘모버실(모든 버전 실시간)’이라고 부른다.
물론 지금까지의 예는 어른들의 이해를 위한 ‘버전’이고, 앞으로 설명드릴 알파세대에 속하는 초등학생들이나 중학생들은 ‘친구들이 나에게 뒷담화 한 버전’ 혹은 ‘나에게 뒷담화 한 친구에게 복수한 버전’, 더 나아가 ‘편애하는 선생님에게 복수하는 버전’ 등으로 구체화된다. 필자의 중학생 딸도 몇 년 전부터 이 버실에 푹 빠져있는데, 처음에는 아이가 잠시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나 걱정을 한 것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실제로 ‘응? 무슨 정신 나간 짓이야?’ 혹은 ‘아이들이 잠깐 하고 그만두는 장난이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너무 걱정은 마시길 바란다. 이른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는 이 (모)버실은 유튜브에서 분명한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모의 걱정을 한 몸에 받는 요즘 애들을 연구자들은 ‘알파세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을 이렇게 유별나게 통칭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바로 ‘완전한 디지털화’가 된 시기에 태어났다는 의미 말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과 행동들 이면에는 사회 혁신을 촉진하는 도구나 플랫폼이 등장했을 때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의 발명이나 활자의 출현, 종이의 발명 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비교적 최근인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알파세대의 신체 장기에 비유되는 스마트폰이 이제는 그 중심에 섰다. 이렇게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할 때마다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전달, 습득은 비약적으로 빨라진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일단 이전 세대 모두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활자가 나왔을 당시, 즉 대량으로 서적의 인쇄가 가능해졌을 때 어른들, 특히 종교 권력자들은 “어떻게 완벽하게 암송, 암기하지 않은 지식을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나?”라면서 인쇄된 책을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반박했다. 게다가 당시의 지식인들은 “손으로 직접 쓰지 않고 지식을 소화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걱정했다. TV와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리의 부모들은 이렇게 걱정한다. “책을 읽지 않고 유튜브로 조각조각 얻은 내용은 지식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물론 다음 세대에는 자연스럽게 사라졌거나 사라질 걱정들이다.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복잡하고, 다음 세대보다 단순하다.” 특별한 전쟁이나 질병이 인구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경우가 아닌 이상, 인류는 세대를 더해가면서 항상 더 복잡하고 개성이 강해지며, 한 가지 사안에도 다양한 의견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의미다. 또, 버지니아대학의 아동인지발달학자 앨리슨 고프닉(Alison Gopnik)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모든 어른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멍청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인간의 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연령별 행동 발달 기준을 지속적으로 ‘상향’ 조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8세나 되어야 할 수 있었던 일을 80년대에는 5세쯤 하게 됐고, 지금은 간혹 3세도 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플랫폼의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건 하루라도 더 어린 세대다.
종합하면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나온다. 모든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가 보기에는 다면적이다. 다면적이라 함은 하나의 심리적 혹은 물리적 공간에 담는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화면에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고 그 속도감에 오히려 더 열광할 수 있는 것이다. 그중 하나의 예가 결국 버실인 것이다.
분명한 건 이렇게 더 어린 세대가 더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을 하나의 공간에서 더 속도감 있게 담아내는 것을 이루게 되면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세대가 결국에는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수용한다는 점이다. 결국 기성세대들도 TV와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에 적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대면과 피드백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상대방으로부터 피드백을 더 많이 받으려면 그 상대방이 누구든 접촉(대면)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비대면과 피드백이 공존한다. 그래서 혁명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버 혹은 그와 유사한 모빌리티 서비스를 이용하면 승객은 드라이버에게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는가에 대한 대화의 양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그래서 편안하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호출한 자동차가 얼마나 왔고 어디에 있는지 즉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과정에 대한 피드백은 훨씬 더 촘촘하게 받게 된다.
버실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 피드백(실시간 채팅)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결정하면서 세상의 다양한 시각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버실에 유난히 ‘복수’ 버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정의나 소원을 그저 포기하고 팔자소관 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어떻게든 주도권을 쥐고 대응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이제 분명한 건 아이들의 문화가 오히려 어른들에게 확산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그 ‘속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 이 복잡함이 그냥 세대를 거쳐 가속화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역류해서 이전 세대 역시 더 빠르고 복잡하게 만든다. 몇 년 전까지 모버실의 주 시청자층은 알파세대인 10세 전후의 아동들에게 국한됐었다. 하지만 ASMR(일상소음) 유튜버로 거듭난 개그맨 강유미가 이를 패러디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2021년 11월 현재 16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서도 세대 통합을 위해 다루기 시작하면서 성인들에게도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중요하게 봐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들을 그저 가르쳐 줘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만 보면 절대 안 되는 시대라는 것을 ‘버실’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