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 캐릭터와 자기표현에 관해
작성자: 태그 켈리(Tadhg Kelly) 작성일: 2012년 7월 10일
[영국 출신의 게임 디자이너이자 Gamasutra 기고자인 태그 켈리의 이 에세이는 ‘What Games Are’ 블로그1에 처음 실렸던 것으로, 그의 허락 하에 전문을 옮긴다. 여기에서 그는 플레이어 캐릭터라는 것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맥락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분석한다. ]
나는 다른 글 2 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라는 것은 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여러 게임 제작자들은 플레이어와 캐릭터 간에 정서적 유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도 역시 논란을 일으켰다.
이 두 문장은 모두 이면에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플레이어의 정체성에서 게임 내 경험의 유의미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잘못 해석하면 이런 문장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할 때 느끼는 모든 감정이 가짜라는 말처럼 읽힌다.
그러나 내 의도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 “플레이어 캐릭터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말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플레이가 “인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내 의도는 게임의 맥락 안에서 게임 플레이의 정서적 경험을 재해석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게임에 적용될 수 있는 유용한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은 실제이지만, 이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방식은 잘못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생각을 충분히 설명하고 대다수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하는 맥락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분석하며, 정체성과 자기표현의 중요성에 관해 논할 것이다.
정서적 경험에 관한 개인적 경험담
런던으로 이사할 당시 나는 그 이유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중간쯤 되는 수준에서 게임 업계에 오랜 기간 관여하면서, 아일랜드에서 열리는 게임전시회에서 롤플레잉 게임과 카드게임, 실사 롤플레잉 게임 등을 만들었다. 나는 또한 소매 업계에서 일한다거나 게임제작사 하복(Havok)에서 기술작가로 일하는 등 게임 주변 업계에서도 얼마간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스스로 어디에 가장 적합한지 알 수 없었기에 런던으로 자리를 옮겨보기로 했다.
운 좋게도 나는 곧 처음으로 게임 디자인 일을 하게 되었고, 다음 해에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나는 레벨 디자인에서부터 시나리오 작성 및 액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업무를 익히고 담당했지만, 당시 영국의 여러 게임사들이 그러했듯이 내가 다니던 스튜디오도 자금 부족으로 파산하고 말았다. 나는 실의에 빠졌고 새로 일거리도 찾아야 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제일 먼저 생기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고, 그 결과 계약직 테스터 일을 맡게 되었다.
플레이어 캐릭터란 이런 식이다.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영국에서의 첫 해가 환상적이었다면, 두 번째 해는 비참했다. 내가 다니는 기업의 문화는 출시일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게임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무조건 내놓고 보는 식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급조된 게임을 수없이 만들어냈고, 게임의 품질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형편없는 급여를 받으면서 해고의 두려움에 시달리며(테스터는 계약직으로만 고용되었다), 쓰레기 같은 게임을 테스트하는 나날을 보냈다. 오랜 기간 나는 밑바닥을 헤맸다.
이런 암울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테스터들은 게임을 했다. 우리는 사무실의 로컬 네트워크 PC로 점심 시간에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 벽이 투명유리로 되어서 교실과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밖에 앉은 관리자들이 우리를 감시하는 동시에, 제작자들도 어슬렁거리며 우리가 게임을 제대로 테스트하고 있는지 빤히 바라보고는 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불시에 들이닥쳐 우리가 딴짓을 하고 있으면 불만을 제기했다. 마치 영화 <브라질>에 나오는 사무실이 실제로 재현된 듯 했다. 우리는 숙제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었고 관리자들은 감독관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해 테스팅은 어렵지 않았다. 새로운 버전의 수정사항을 확인하고 신규 콘텐츠를 플레이하며 인터페이스의 버튼을 조작하는 등의 일을 하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상당한 자유시간이 있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생산성 높은 훌륭한 직원처럼 보여야만 했다. 그 말은 <콜 오브 듀티> 같은 게임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고, 그 대신 우리는 에뮬레이트된 GBA 롬같이 숨기기 좋은 소형 게임들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의외로 어떤 축구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나는 열성적인 축구팬이 아니다. 유로2012처럼 국가적인 대회가 열릴 때면 사면초가에 몰린 아일랜드 팀에 응원을 보냈지만 리그 경기나 이적 시장에서 펼쳐지는 드라마 내지 어느 선수가 누구를 모욕했다는 등의 소문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축구게임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컨트롤 방식은 단순했지만 게임은 흥미진진했다. 나는 언제나 특정 팀을 선택해서 플레이했는데, 팀 색깔이 마음에 들었는데다 설정상 그 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4분 동안 펼쳐지는 싱글 매치만 했지만 나중에는 에뮬레이터에 게임 상태를 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때부터 수백 번에 걸쳐 리그 경기를 플레이했다.
나는 팀에 속한 각각의 선수가 독자적인 개성을 갖는다고 생각했고, 특정 선수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한 전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게임 속의 조그만 녀석들과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느꼈고, 필승 전략을 개발해 승리를 이어간 뒤에도(보통 5-0 이상의 점수차로 이기는 경기를 의미한다) 플레이를 그만두지 않았다. 게임은 내가 성취감을 느끼고 열띤 관중들과 우승트로피 따위를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나는 심지어 게임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일종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직장생활이 정체일로에 있다고 느껴지던 시절, 그 조그만 게임은 내 일상에서 최고의 기쁨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게임은 나에게 게임이 무엇인지를 낱낱이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고, 나는 종종 그 게임을 양식(modality)의 본보기로 떠올리고는 한다.
플레이 가능한 것들(the playable)의 불가피한 양식
멋진 선율로 시작되는 게임이든 기본적인 3막(act) 2구성(plot-point) 구조의 게임이든, 혹은 이동과 점프로 이루어진 단순한 게임이든, 가장 기본적인 것이 중요하다. 예술 형식이 무엇이며 보통 어떤 것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모든 매체는 동일한 형식이 점점 정교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
이는 “양식주의(modalism)”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의미는 가장 단순한 형식이 그 나머지 형식을 작동하는 규칙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작하는 대상이 바뀌더라도 사용 방식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5,000년 전의 조각상과 오늘날의 조각상은 양식적으로 동일하다. 현대의 조각상이 관객들과 좀 더 복잡한 대화를 거친 결과물일지는 몰라도, 원칙적인 형식은 과거와 동일하다. 고대 시와 현대 시, 고대 그리스극과 현대극, 찰리 채플린의 영화와 <디센던트(The Descendants)>( 2011년작 미국의 코미디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게임 제작자들은 게임이 이런 규칙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언젠가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거나 게임 이용자들의 교육 수준이 충분히 높아지면 게임이 지금 이상의 뭔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미래의 게임은 현재의 모습과 같을 것이며, 현재의 게임은 게임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내가 하던 축구 게임처럼) 가장 단순한 게임에 담긴 플레이와 상상력, 재미, 흐름(flow), 경이(驚異, thauma)은 자본을 투입해 만들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게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양식적으로 게임은 게임일 뿐이며, 즉 그 둘은 서로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플레이어의 두뇌로부터 우러나오는 한계라는 점에서 불가피한 (필연적이며 저항할 수 없다는 의미) 특징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며 생각하는지에 따라 양식은 정해진다.
밝은 무대가 있는 어두운 곳에 많은 사람들과 모여 있다면, 우리는 공연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각 공연이라면 음악적 패턴과 리듬, 어쩌면 노래를 기대할 것이다. 공연이 대사와 가면과 관계된다면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규칙과 관계된 경우 스포츠와 공정한 플레이를 기대하게 된다.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에 걸쳐 고대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본적인 이해방식이 있다. 그러한 이해방식은 연극과 춤, 발레, 오페라, 영화에도 적용된다. 컴퓨터나 게임콘솔(혹은 태블릿이나 스마트폰) 앞에 앉아 게임을 할 때 우리는 재미를 기대한다.
양식(modality)은 우리 모두가 같은 취향을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웅장한 공상과학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메탈리카 콘서트에서 격렬한 헤드뱅잉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꽉 막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정신 없이 총 쏘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지적인 퍼즐 어드벤처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다만 이런 것들이 어떻게 양식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경험에 해당하는지와, 양식이 어떤 부분에서 적용되고 어떤 부분에서 적용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메탈리카와 오페라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음악적 구조라는 범주로 묶이며, 공상과학과 로맨틱 코미디는 플롯과 캐릭터 형성(character development)의 기본적인 특징을 여러 면에서 공유한다. 너무나 다르게 보이는 슈팅 게임과 어드벤처 게임조차도 명료성(clarity), 피드백, 재미라는 공통된 뿌리를 갖고 있다.
현대 게임들은 다만 익숙한 형식을 바탕으로 한층 정교하게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다. <금지된 세계>(1956년작 SF영화)와 비교해 <프로메테우스>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게임은 과거의 게임보다 훨씬 세련된 화면과 사운드를 자랑하지만, 이런 게임의 목적은 <컴뱃(combat)>, <동키콩(Donkey Kong)>, <테트리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현대의 게임은 동일한 종류의 즐거움, 그리고 경이와 창발(emergence), 이야기, 재미, 흐름 따위의 동일한 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창작상수(creative constants)라 불리는) 기능적으로 훌륭한 게임 디자인의 규칙은 이용자 층과 미학적 특징, 문화, 시장, 단순성이나 복잡성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한 창작상수 중 하나가 이것이다. 플레이어는 언제나 그 자신이다.
※ 자세한 내용은 첨부(PDF)화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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